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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고인을 기리는 지인, 동지들이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 묘소에서 15주기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
▲ 묘소 참배 생전 고인을 기리는 지인, 동지들이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 묘소에서 15주기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
ⓒ 장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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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에서 노동운동, 다시 농민운동 활동가로 한없이 낮은 길을 가면서 기층민의 삶과 애환을 더불어 함께 보듬어 가고자 했던 청년. 서른다섯의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불꽃 같은 삶을 마감한 청년농사꾼 고 송창욱씨의 15주기 추모제가 지난 8일 전남 고흥 동강면 마동마을 고인 묘지에서 있었습니다.

고 송창욱추모사업회(회장 노기탁) 주관으로 열린 이날 추모제에는 유가족, 농민회원, 전교조 교사, 그를 아끼던 지인들과 광주 들불야학 형제 등 5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참석자들은 고인을 추모하고 생전 소망해왔던 평등세상, 민중세상 실현을 위한 유지를 되새겼습니다.

참석자들은 추모제를 마친 후 향후활동과 추모사업의 발전방향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이들은 유족 보필활동에 집중할 것과 고인이 노동자시절 야학 교사를 통해 실천적 삶을 살았던 유지를 받들어 장학사업도 점차 확대해 나가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생전의 삶 처럼 그는 마을이 바라다 보이는 대숲 중간지점에 안장됐다.
▲ 묘소 원경 생전의 삶 처럼 그는 마을이 바라다 보이는 대숲 중간지점에 안장됐다.
ⓒ 장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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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농사꾼 고 송창욱의 짧은 삶
           


           참된  민중세상을 꿈꾸던 고인의 30대 초상
▲ 생전 초상 참된 민중세상을 꿈꾸던 고인의 30대 초상
ⓒ 송창욱 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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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 마동마을,1961년 8월19일 한 아이가 태어났다. 1995년 8월8일 한 청년 농사꾼이 죽었다. 서른 다섯 살이었다. 그의 이름은 송창욱. 그의 짧은 삶만큼 내놓을 수 있는 그의 약력은 이것이 전부이다.

전태일과 박관현을 좋아했고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과 '내 영혼 대륙에 묻어'의 뇌봉을 존경했던 청년, 아무도 몰래 시를 썼던 문학청년 송창욱, 그를 노동자로 농민으로 변신하게 했던 것은 이 사회의 모순과 80년 5월이었다.

1980년 그는 전남대학교 불문학과에 입학했다. 입학 후 전대 신문사 기자로 활동한 그는 5.17 휴교 조치에 이은 광주 민중 항쟁을 겪으면서 기자 활동을 중단했고 그 후 광주항쟁의 쓰라린 상처를 안은 채 자신이 처한 사회의 모순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즈음 그는 개인의 입신에 거의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그의 자취방은 사회 비판적인 월간지와 사회과학 서적들로 쌓여갔고 그 책들과 함께하는 사색과 독서는 그에게 가장 큰 위안이 되었다. 5월 학살에 이은 숨죽인 억압의 시절, 그는 당대의 패배주의와 안이한 일상 속에 자신을 방치하지 않았다.

1980년 12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전두환 일당의 광주학살과 폭압 정치를 비난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전남대에 뿌리기도 했다. 사면이 바람벽인 외딴 정자로 자취방을 옮기고 모포 한 장 깔고 겨울을 나며 냉수마찰도 거르지 않았다. 엄격하고 절도 있는 생활, 고통을 스스로 선택하여 감내하는 일상이 그 억압과 혼돈의 시절을 극복하는 자신의 비법이기도 했다.1983년 초, 휴학과 동시에 가장 강도 높은 훈련이 기다리는 해병대에 자원 입대한 것도 그 꿋꿋한 생활의 연장이었다.

1985년 5월 해병대를 제대하고 복학하면서 그는 곧바로 야학활동에 참여했다. 건강한 사회로의 변혁을 위해서는 자신이 조직 활동을 해야만 하고, 그 조직과 함께 해야 한다는 소신의 결과였다.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한 청소년들과 열악한 조건에 처한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하면서 그는 기층 민중과 함께 하는 자신의 미래를 설계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광주 하남공단의 작은 중소 기업체에서 몇 개월 동안 노동자로 일했다. 2년여의 야학 활동과 노동자 생활을 거치면서 그는 광주 지역의 촉망받는 활동가로 주목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명망가로 부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고인을 기리는 추모사업회가 결성되어 타계 2년 후 발간된 유고시집. 평소 민중운동을 해 오면서  그가 일기 형식으로 남긴 삶의 흔적들이  70여편의 주옥같은 유작시로 남겨졌다.-'길은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동녘
▲ 유고집 고인을 기리는 추모사업회가 결성되어 타계 2년 후 발간된 유고시집. 평소 민중운동을 해 오면서 그가 일기 형식으로 남긴 삶의 흔적들이 70여편의 주옥같은 유작시로 남겨졌다.-'길은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동녘
ⓒ 장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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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한없이 낮고 낮은 길'을 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발길이 머문 곳은 농촌이었고 조직조차 지리멸렬했던 농민운동의 길이었다. 1988년 말 그는 부모님이 계신 고흥군 동강면으로 낙향해 삽자루를 쥐었다. 대학 출신 아들이 농사짓는 것을 그의 부모님이 달가워할 리 없었다.

그는 부모님과의 갈등, 생산비도 보장 안 되는 농촌 경제의 어려움, 장가 못 가는 농촌 총각의 아픔을 몸소 체험하면서 철저한 농사꾼이 되어 갔다. 동강민주청년회와 고흥군농민회를 활성화하는 데 그의 헌신적인 활동이 계속됐다.

고흥군농민회 조사·선전부장, 사무국장을 거쳐 전농전남도연맹 교육부장 등을 맡으면서, 그는 자신의 농사일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농민형제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자신의 고민은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이웃과 농민형제들의 고민을 밤새도록 경청했다. 막걸리를 잘 마셨고 언제나 껄껄껄 웃었다. 그의 당당함과 인간미에 농민회원 수가 늘었다.

그는 사랑이 넘치는 활동가였다.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입장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다. 한없는 애정으로 설득하고 이해시켰다. 그래도 안되면 껄껄껄 웃으며 자신이 물러섰다. 입장이 달랐던 사람도 결국은 그의 입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원칙적이면서도 교조적이지 않는 품성,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현장의 작은 씨앗이 되고자 했던 헌신성을 가진 농사꾼! 그가 송창욱이었다.

결혼하고 형편이 안돼 주말부부를 채 청산하지 못하고 있던 차 3개월째 되었을 무렵. 활동가들과의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척에 집과 부모님, 아내와 2개월 된 뱃속아이를 남겨두고, 형제처럼 지내던 동지들을 뒤로하고 1995년 8월 8일 노상에서 교통사고로 그는 불꽃같은 짧은 삶을 마감했다. 혼돈의 시대에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의 화두를 던져놓고....


태그:#송창욱, #고흥군농민회, #장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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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부터 지역 언론매체에 종사해 왔습니다.오마이뉴스 출범과 함께 독자회원으로 가입했었고 80년대에 창간된 한겨레신문 이상 벅찬 감격으로 오마이뉴스와 함께하고 있습니다.다양한 정보와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온라인매체 혁명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신자유주의로 폐해로 신음하는 농촌의 모습과 인간미 넘치는 시골사람들의 향기를 담아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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