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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의 끝자락에서 지리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구름 사이로 '황매산'(1108m) 주봉이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합천호에 비치는 산자락이 호수에 떠있는 매화 형상이어서 '수중매'로도 불리는 황매산은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와 중촌리, 대병면 회양리에 걸쳐 있는 명산이다.

 

 경남 합천군 가회면 중촌리에서 바라본 황매산 자락. 2009년 9월 방문했을 때 촬영한 사진인데요. 20년이 지났어도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경남 합천군 가회면 중촌리에서 바라본 황매산 자락. 2009년 9월 방문했을 때 촬영한 사진인데요. 20년이 지났어도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 조종안

 

봄에는 철쭉,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 가을에는 붉은 단풍, 겨울에는 새하얀 눈과 매서운 바람으로 사계절이 뚜렷한 황매산은 산모가 아기를 품 듯 중촌리 목곡마을을 감싸고, 마을 앞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어머니 젖줄처럼 주민들의 식수를 해결해주고 있다.

 

마을 뒷산은 해송과 육송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송이를 비롯한 각종 산실류는 철따라 주민들의 부수입을 짭짤하게 올려주고, 모자이크 모양의 마을 앞 다랑이 논들은 믿음직스러운 식량 창고 노릇을 해준다.

 

바닥의 자갈과 주변 바위들과 부딪치며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내면서 마을 어귀로 흐르는 계곡물은, 주민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지 청아한 소리를 내며 맴돌고 휘돌다가 남강으로 갈라지는 진양호에 이른다.

 

마을 주민이라고 해봐야 모두 이십여 명, 60대 이상 노인이 대부분이다. 학생이라야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매가 있을 뿐이다. 마흔 살 아래 젊은이들은 모두 마을을 떠났고, 사십 대 중반의 조씨 부부가 마을 노인들을 부모처럼 모시며 살아가고 있다. 강아지까지 도시로 떠나버려 적막이 흐르는 폐가 10여 가옥이 외롭게 고향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마을 노인들이 아침마다 모여 담소를 나누었던 장소. 왼편 돌담집 감나무 그늘이 무척 시원했는데요. 황토에 자갈길이어서 더욱 시원했던 것 같습니다.
마을 노인들이 아침마다 모여 담소를 나누었던 장소. 왼편 돌담집 감나무 그늘이 무척 시원했는데요. 황토에 자갈길이어서 더욱 시원했던 것 같습니다. ⓒ 조종안

한 집에 소를 두 마리 먹이는 집도 있고, 양봉과 양계를 하는 집도 있다. 논은 비가 내려야 모를 심을 수 있는 천수답이지만, 주민 대부분이 식량을 벼농사에 의지하고 있으며, 이장 댁은 자가용을 굴릴 정도로 생활에 여유가 있다.

 

하루에 두 번씩 마을버스가 지나가는데, 그것도 이십 분을 걸어나가야 이용할 수 있는 외딴 마을이다. 손님이라고 해봐야 우체국 집배원이 하루에 한 번씩 다녀갈 뿐이다. 주민들은 도시에 사는 가족에게 전하는 안부 편지와 어지간한 생활용품은 집배원을 통해 해결한다. 주민의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는 집배원은 마을에 들어올 때마다 노인들에게 막걸리 대접을 받는다.

 

마을 앞, 다랑이 논에는 개구리밥이 떠다니고, 엄지손가락만한 청개구리와 메뚜기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농약으로 죽어가는 우리 농촌을 살려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한다. 곡식 영그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들녘을 거닐면 놀란 뜸부기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이리저리 도망치는 방아깨비들이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사랑채 풍경

 

 91년, 92년 여름을 보냈던 고가(古家) 사랑채. 구들장 사이로 연기가 솟을 정도로 허름한 빈집이지만 에어컨이 우습게 보일 정도로 시원했습니다. 삼복더위에도 한기를 느낄 때는 군불을 지펴야 했으니까요.
91년, 92년 여름을 보냈던 고가(古家) 사랑채. 구들장 사이로 연기가 솟을 정도로 허름한 빈집이지만 에어컨이 우습게 보일 정도로 시원했습니다. 삼복더위에도 한기를 느낄 때는 군불을 지펴야 했으니까요. ⓒ 조종안

필자는 91년, 92년 여름을 경남 합천군 가회면 중촌리 목곡마을의 어느 고가(古家) 사랑채에서 보냈다. 어쩌다 황토향이 그윽한 사랑방에 앉아 눈앞으로 펼쳐지는 산수(山水) 삼매경에 빠지기도 하는데, 구름에 가린 산등성이 너머로 진주 촉석루가 보일 것 같아 눈을 떼지 못한다.

 

사랑방에 달린 마루에 앉으면 산 중턱을 휘감으며 흘러가는 안개구름이 굴뚝에서 솟는 연기처럼 황매산자락 사이로 퍼져 나가고, 그 사이로 튀어나온 봉우리들을 하나 둘 세다 보면 한 폭의 동양화를 감상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100년도 더 되었다는 빈집에서 갈라진 구들장과 황토 냄새를 친구삼아 밥도 해먹고, 라면도 삶아먹고, 빨래도 하고, 독서도 하고, 글도 쓰면서 몸과 마음을 단련했는데, 사랑채 마루에 걸린 안락당(安樂堂)이라 조각된 때 묻은 양각 목판은 영남 선비들의 휴식처였음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계곡(92년 촬영), 물살이 꽤 급했는데요. 합천댐이 생기면서 계곡물이 말라버려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계곡(92년 촬영), 물살이 꽤 급했는데요. 합천댐이 생기면서 계곡물이 말라버려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 조종안

점심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어찌나 더운지 설거지를 끝내고 계곡에 다녀오려고 했다. 계곡의 바위는 속옷을 세탁하는 빨래터이고, 시원한 물에 몸을 담그고 하늘을 보면 머리가 맑아질 뿐만 아니라, 몰려드는 송사리들과 벌이는 숨바꼭질은 형언하기 어려운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계곡에 가려고 영국이와 영미를 찾아 나서려니까,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며 빗방울이 떨어지기에 지나가는 여우비로 알았다. 그런데 하늘님이 속이라도 상했는지,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로 변했다. 온몸에 싸늘한 기운이 돌면서 큰비가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해서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고 들어와 방문을 활짝 열고 눈앞에서 펼쳐지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귀울인다.

 

앞마당의 무성한 잡초들과 돌담위로 뻗어나간 담쟁이덩굴, 마루 앞 신우대밭을 때리는 빗줄기 소리가 제법 웅장하다. 바람 소리를 베이스로 나를 위한 대자연의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되는 것이다. 작년에는 모를 못 심을 정도로 가물어서 오늘 같은 명연주를 감상할 기회가 없었다.

 

지지리도 못난 두꺼비란 놈이 돌담 아래에서 양어깨를 쭉 펴고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시력도 좋지 않은 시커먼 눈을 꾸벅이며, 움직일 줄을 모른다. 두꺼비와 나는 어느새 친구가 된다. 폭우가 쏟아지는 산골 마을의 오후는 잠시 속세를 떠나 자연을 찾아온 나만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필자가 기거하던 고가(古家) 앞마당. 시원한 산바람을 가슴에 품으며 감상하던 대자연의 연주가 들리는 것 같은데요. 돌담위로 희미하게 보이는 소나무들과 구름에 가린 산등성이는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필자가 기거하던 고가(古家) 앞마당. 시원한 산바람을 가슴에 품으며 감상하던 대자연의 연주가 들리는 것 같은데요. 돌담위로 희미하게 보이는 소나무들과 구름에 가린 산등성이는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 조종안

작년에도 소서(小暑) 며칠 전에 간단한 생활용품과 밑반찬 등을 준비해와 이곳에서 여름을 보냈고, 따뜻하고 친절한 동네 어른들의 정을 잊지 못해서 올해도 다시 찾았다. 산청읍에 사는 집주인은 지인의 소개로 가깝게 지내는데 개축을 하기 전까지는 언제든지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위대한 자연의 유희에 흠뻑 취해 있는데 옆집 영국이 아버지가 신문지로 머리를 가리고 단거리 선수마냥 뛰어들어온다.

 

"조 선생, 비 그치믄 송이 캐러 안 갈랑교?"

"글쎄요···."

 

영국이 아버지는 온기가 올라오기 시작하는 방구들이 좋은지 손바닥으로 연방 구들장을 문질러댄다. 같은 성씨에, 이웃이어서 매일 만나고, 나이도 한 살 차이여서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영국이 아버지는 폭우로 뒷산 계곡물이 불어나 마을로 들어오는 길이 넘쳤다며 며칠은 읍내에 못 나갈 것 같다고 투덜댄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생활필수품은 하루에 20분 시청하기도 어려운 고물 흑백 TV와 집에서 가져온 라디오이다. 기상 예보와 뉴스 등을 제공받기 때문인데, 어젯밤 뉴스에서 내일까지 비가 내린다고 했다고 하니까, 영국이 아버지는 요즘이 송이 캐는 철이라며 비가 오면 사람을 모집했다가, 그치면 며칠 후 산에 오른다고 한다. 값도 비싸고 몸에도 좋다며 캐는 요령을 알려주면서 같이 가잔다. 나는 방 청소와 밀린 빨래를 핑계로 산에 오르지 못하겠다며 사양한다.

 

방안이 훈훈해지니까 밖으로 나가기가 싫어진다. 송이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는데, 뒷집 박씨 아저씨가 날씨가 험해서 임신한 소를 걱정했는데 암컷도 아닌 수컷을 순산했다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들어온다. 예전과 달리 올해는 수컷의 정자를 팔기 때문에 암송아지보다 50만 원은 값이 더 나간다며 입가에 웃음이 가득하다.

 

따뜻해진 구들장을 깔고 앉은 세 사람의 이야기꽃은 끝없이 피어난다. 삶에 회의를 느끼다가도 자연에 순응하고 그 속에서 희망의 열매를 따내는 이곳 주민들에게 삶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가를 배운다. 작년에 왔을 때는 대하기가 서먹서먹했고, 행동도 불편했다. 그러나 올해는 광주항쟁, 전두환, 김대중, 한겨레신문에 대한 얘기도 허심탄회하게 나눌 정도가 되었다.

 

 다랑이 논에 모를 손으로 심는 조씨(영국이 아버지) 부부(92년). 산간지역이어서 그런지 모심는 시기가 무척 늦더군요. 서해안 중부 지역과 1개월 넘게 차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다랑이 논에 모를 손으로 심는 조씨(영국이 아버지) 부부(92년). 산간지역이어서 그런지 모심는 시기가 무척 늦더군요. 서해안 중부 지역과 1개월 넘게 차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 조종안

처음 왔던 91년 7월 초 어느 날이었다. 영국이 아빠가 저녁을 초대해서 갔더니, 무엇을 넣었는지 비위가 상했는데, 알고 보니 '방아잎'이라는 풀잎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전라도에서 즐겨 먹는 깻잎 이상으로 모든 음식에 방아잎을 넣어 먹는다. 특히 찌개를 끓일 때는 빠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구역질이 나고 입에서 받아주지 않아서 고생했다. 그런 걸 보면 지역과 나이에 상관없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는 자장면이 으뜸인 것 같다.

 

이번 '단계' 장날에는 밑반찬이랑 흰 고무신을 한 켤레 사러 나가야 한다. 이곳에 오던 날, 영국이와 영미가 인사하러 왔을 때 장 보러 가는 날 함께 나가서 장터구경도 하고 자장면도 사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킬 기회인 것 같다.

 

마을에서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이드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는 영국이와 영미, 그들에게 밉보이지 않으려면 탕수육은 장날 나가서 생각해보기로 하고, 자장면만큼은 꼭 사 먹고 와야겠다.

덧붙이는 글 | 2010 이 여름을 화끈하게! 응모 

지인의 소개로 91, 92년 여름을 경남 합천군 가회면 중촌리 목곡마을의 어느 고가(古家) 사랑채에서 지냈는데요. 당시 경험했던 아스라한 추억들을 '중촌리 일기'1, 2, 3으로 정리했습니다. 작년 9월에 아내와 함께 다녀왔는데요. 물이 말라버린 계곡에 잡초만 무성해서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여름#중촌리#황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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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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