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7.28 재보선의 최대 승부처인 서울 은평을에 출마한 한나라당 이재오 후보가 지난 27일 밤 마지막 유세를 마친 뒤 지지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7.28 재보선의 최대 승부처인 서울 은평을에 출마한 한나라당 이재오 후보가 지난 27일 밤 마지막 유세를 마친 뒤 지지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 남소연

7·28 재보선에서 승리한 이재오 후보는 2년 3개월여 만에 국회로 복귀하게 됐다. 15대 국회 입성 이후로 화려한 정치 행보를 보여준 이 의원이지만, 가난한 유년부터 재야운동시절까지는 그야 말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반복되는 구속과 석방... 이근안, 이한동, 박철언 등 대면

그의 저서 '함박웃음'에 기록된 연대기에 따르면 1945년에 강원도 강릉시 묵호에서 태어나서 경북 영양군에서 자란 이재오의 삶은 시위와 투옥으로 점철돼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유시근 교장에 대한 경북교육청의 부당한 전보발령에 항의, 전근 반대운동을 주도해 영양경찰서 유치장에서 20일 동안 구류 당했다.

대학 1학년 때인 1964년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반대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이듬해 한일수교 국회비준 반대 투쟁에서 중앙대 시위를 주동했던 그는 결국 그 해 8월에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수배자가 됐다. 4개월여의 도피생활 끝에 체포된 그는 영등포경찰서에서 29일간 구류당했다.

1966년 강제징집 당해 입대한 뒤 3년 뒤 만기 제대했지만 중앙대는 이재오의 복교를 거부했다. 1970년 이재오는 중앙농민학교(현 국민대)를 졸업하고 고려대 교육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해 주경야독했고, 당시 백기완, 함석헌, 문익환, 천관우, 계훈제, 김수환 추기경 등과 교류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영등포 장훈고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1973년 10월 이재오는 서울대 유신반대 시위 배후조종 및 내란음모죄로 수업 도중 체포, 치안본부 남산 대공분실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 때 이재오를 고문한 사람이 고문경관 이근안이고, 담당검사는 한나라당 대표를 역임한 이한동이었다. 이재오는 1심에서 징역 3년, 2심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고, 1974년 8·15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1977년 3월 대성고 교사로 있던 이재오는 유신치하 인권탄압을 풍자한 단막극을 연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돼 이듬해 5월 석방됐다.

1979년 8월에는 강연 중 대통령의 딸을 비방하고 유신정권을 퇴진을 요구했다는 이유,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세 번째 감옥살이를 시작했지만, 그해 10월 26일 뱍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났고 긴급조치가 해제돼 이재오는 석방조치 됐지만 출소도 못하고 재구속됐다. 이 것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이다.

이재오가 이끌던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가 남한 내 최대의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이라고 발표된 남민전의 산하단체라고 발표했지만, 이 사건은 훗날 조작 사건으로 밝혀졌다. 징역 5년이 선고된 이 사건 재판에서 징역 15년을 구형한 검사가 박철언이었다.

1983년 8월 15일 네 번째 감옥살이에서 석방된 이재오는 1989년 4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 배후로 지목돼 또다시 구속됐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으로, 범민족대회 실무회담을 위해 판문점으로 가다가 체포됐다. 이 사건 지휘검사는 최병국 한나라당 의원이다.

1990년 2월 석방된 이재오는 그해 11월 이우재, 장기표, 김문수 등과 함께 51개 지구당을 가진 민중당을 창당, 1992년 14대 총선 서울 은평을 지역구에 출마했다. 그러나 이재오 자신도 낙선했고, 민중당이 전국 득표율 3%를 얻지 못하고 해산되는 결과를 맞았다.

민중당 좌절 뒤 신한국당 입당으로 화려한 정치행보 시작

 7.28 재보선의 최대 승부처인 서울 은평을에 출마한 한나라당 이재오 후보가 27일 은평구 일대를 돌며 주민들과 인사하고 있다.
7.28 재보선의 최대 승부처인 서울 은평을에 출마한 한나라당 이재오 후보가 27일 은평구 일대를 돌며 주민들과 인사하고 있다. ⓒ 남소연
반복되는 민주화운동과 투옥, 진보정당의 결성과 해산을 겪으며 좌절의 세월을 보낸 이재오는 마침내 배를 갈아타면서 정치인으로서 화려한 이력을 시작했다. 

1996년 이재오는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에 입당하면서부터 김영삼 대통령의 공천을 받아 15대 총선에서 은평을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재오는 김문수, 홍준표 등 초선의원 35명과 함께 '시월회'를 조직해 당 쇄신 논의를 주도했다. 시월회는 이듬해 2월 노동법 개정 날치기 사건 책임자 문책, 당내 한보사건 관련자 정화 등을 요구하면서 김영삼 대통령의 레임덕을 가속화하는 계기를 만든다.

16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이재오는 2001년 5월 한나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당선되기까지 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2003년 10월엔 최병렬 대표 체제에서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맡았지만, 2개월 만에 물러나고 만다. 17대 총선 공천과 관련해 '살생부'라고 불리던 당무감사 자료가 유출, 서청원 전 대표와 중진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비주류 의원 72명이 최 대표와 이재오 사무총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재오는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나면서도 "공천혁명이 좌절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3선 의원이 된 이재오는 2006년 1월 다시 한번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됐다. 이어 7월엔 한나라당 대표 경선에 출마했지만 강재섭에게 패배하면서 최고위원이 됐다. 그러나 경선 과정에서 강재섭측이 이념공세를 펼친 것과 박근혜 전 대표의 간접개입 등에 항의하는 뜻으로 전남 순천의 절간에서 한동안 칩거했다.

이명박의 경부운하에 깊이 공감한 뒤 서울시장·대통령 선거 앞장

 7·28 재보궐선거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15일 서울 은평을 지역에 출마한 한나라당 이재오 후보가 대조감리교회에서 급식봉사를 하고 있다.
7·28 재보궐선거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15일 서울 은평을 지역에 출마한 한나라당 이재오 후보가 대조감리교회에서 급식봉사를 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이재오가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기 시작한 것은 둘 다 국회의원이던 15대 국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명박 당시 의원이 경부운하 건설을 제안한 것에 공감한 이재오는 "국회의원은 내가 뒤를 받쳐 줄테니까 형님은 대통령 하쇼"라면서 대통령 출마를 권유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재오는 2002년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선거 승리를 이끌어 냈고,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신승한데 이어 마침내 이명박 대통령 당선이라는 결과를 일궈냈다.

이때부터 이재오에겐 'MB정부 2인자' '정권 실세'라는 별명이 따라다녔지만, 개인적으로는 급격한 하향 곡선을 긋기 시작한 시기였다.

18대 총선을 앞둔 2008년 1월 공천 작업, 이른바 '이재오 살생부'라는 것이 공공연히 나돌았고, 김무성 등 박근혜 캠프에 참여한 주요인사들이 공천을 받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났고 친박 인사들의 탈당 뒤 무소속 출마가 이어졌다. 이명박 캠프에 몸담았던 이들 중 공천 탈락의 예는 찾기 힘들었다.

이런 공천 결과의 배후로 지목된 이재오는 박근혜지지 성향 시민들을 넘어 일반 시민들의 광범위한 반감을 사게 됐고, 그 결과 18대 정치신인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에게 큰 표 차로 패배하는 아픔을 맛봤다. 내리 3선을 시켜준 은평을이 이재오를 버린 것.

대통령을 당선시키고도 자신의 선거에서 패배한 이재오는 당 내 친이-친박 갈등의 진원지로 지목됐고, 낙선 한달 반 만에 홀로 미국으로 떠났다. 2009년 3월 29일 귀국한 그에게 재보궐선거 출마설, 한나라당 전당대회 출마설, 입각설 등이 나돌았으나, 이명박 대통령은 그에게 국민권익위원장직을 맡겼다.

2009년 9월 30일 국민권익위원장을 맡은 그는 '부패 척결 전도사'를 자임하면서 임기를 8개월여 채운 뒤 7·28 재보선 출마를 위해 사퇴했다. 41년째 은평구에 살고 있는 이재오는 구산동에 24년째 살고 있는 건물 면적 23평짜리 단독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번 재보선 후보 등록시 공개한 재산 총액은 4억6천345만 원이다.


#이재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상근기자. 평화를 만들어 갑시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