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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숙지원은 예년보다 화려하다. 겨우 채송화, 봉숭아, 분꽃, 맨드라미, 백일홍 등 몇 가지 이름밖에 모르는 내가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종류의 꽃이 피었다가 졌다. 그리고 지금도 숙지원을 장식하고 있다. 아내가 지난 가을부터 인터넷을 통해 씨앗이나 구근류를 구입하고 이웃들에게 분양받은 씨앗을 봄이 오기도 전부터 심고 가꾼 것들이 숙지원을 화려한 꽃밭으로 만든 것이다.

아내는 조금 구석진 빈 땅에도 끈끈이대나물, 패랭이, 분홍장구채,  수레국화, 봉숭아 등을 심었다.
▲ 아내가 만든 꽃밭 아내는 조금 구석진 빈 땅에도 끈끈이대나물, 패랭이, 분홍장구채, 수레국화, 봉숭아 등을 심었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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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매와 함께 피었던 수선화, 튤립을 시작으로 패랭이꽃, 꽃양귀비, 낮달맞이꽃이 피는가 싶었는데 철쭉, 작약, 아이리스, 수레국화, 우단동자, 끈끈이 대나물, 분홍장구채, 금사매, 백합이 뒤를 잇더니 백일홍과 다알리아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다른 꽃도 그렇지만 백일홍과 다알리아는 아내가 기다린 꽃 중의 하나이다. 아내의 어린 시절 추억 속에 남은 꽃이라고 한다.

백일홍은 언젠가 보림사에 갔을 때 씨를 받아 심은 것인데 한여름 녹색의 단조로움을 깨주는 귀한 꽃이다. 다양한 색상, 조금씩 다른 꽃모양은 백일홍만이 갖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다알리아는 아내가 인터넷에서 사귄 친구에게 분양받은 것이다. 지난 이른 봄 꽃밭에 묻고 싹이 트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는데 이제 꽃이 피고 있다.

빗방울이 떨어져도 꽃양귀비, 낮달맞이는 지고 백합이 피기 시작하는  꽃밭에서 아내는 김매기를 멈추지 않았다.
▲ 김매기 하는 아내 빗방울이 떨어져도 꽃양귀비, 낮달맞이는 지고 백합이 피기 시작하는 꽃밭에서 아내는 김매기를 멈추지 않았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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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날마다 숙지원의 꽃을 들러보고 풀을 뽑던 아내는 주말을 기다려야 한다. 지난 5월부터 기간제 교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대로 적지 않은 연금을 받고 또 아직도 내가 월급을 받고 있는데 굳이 힘들게 학교로 돌아갈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아내는 돈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여름 숙지원의 많은 일을 혼자 하라는 말이냐고 했더니, 김매기는 주말에 하겠다면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말릴 수 없었다. 아내의 건강이 좋아지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숙지원 입구에서 반겨주는 꽃이다.  꽃은 작으나 노란 색이 매우 곱고 선명하다.
▲ 금사매 숙지원 입구에서 반겨주는 꽃이다. 꽃은 작으나 노란 색이 매우 곱고 선명하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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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병' 때문에 아쉽게도 그만 두어야했던 학교였다. 그래서인지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는 염원을 버리지 못했던 아내였다. 그런데 다시 기간제일망정 교사가 되었으니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 했던 소원을 이룬 셈이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이 예쁘고 귀엽단다. 출근 시간에 쫓기면서도 밝아진 표정의 아내를 본다.

지금도 아내의 정확한 병명은 모른다. 하긴 이제는 병명을 알고자 하지도 않는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병의 원인은 1차작으로 과도한 스트레스 누적이었다고 본다. 나의 오랜 해직, 머나먼 길을 통근하면서 집안일을 꾸려야했던 정신적 육체적인 피로감이 아내를 약하게 했는데, 거기에 1996년에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외상 뿐 아니라 정신적인 상처가 직접적인 원인이었지 않나 생각한다.

처음 발병했을 때에는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고 권하는 약도 먹었지만 아내의 병은 차도가 없었다. 민간요법에 의한 치료도 효과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아내는 숙지원을 일구던 해(2007년)부터 스스로 치료를 거부하고 약을 끊었다. 그리고 호미를 들고 숙지원을 헤매기 시작했다.

힘든 일로 인해 아내의 병이 덧나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했다. 그러나 등에 햇볕을 받으며 풀을 매고 땀을 흘리면 기분이 좋다고 했다. 아내가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후 비록 기간제이지만 다시 학교로 돌아간 것이다.

    아내가 기다렸던 꽃이다. 옛 생각이 나게 하는 꽃이다.
▲ 다알리아 아내가 기다렸던 꽃이다. 옛 생각이 나게 하는 꽃이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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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학교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만큼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옛날 치료 효과가 나타난 결과일 수 있다. 아니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내를 괴롭힌 병의 근원이 자연스럽게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무엇보다 병을 낫고자 했던 아내의 의지가 중요했다고 본다. 그리고 또 하나,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지만 지난 3년 동안 꽃과 나무와 풍경에 정을 붙이고 작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면서 손수 가꾼 채소를 먹고 살았던 생활이 아내를 변화시켰다고 본다.

    어름철 단조로우을 깨주는 곷 중의 하나이다. 아내가 이곳 저곳에 가장 많이 심은 꽃이다.
▲ 백일홍 어름철 단조로우을 깨주는 곷 중의 하나이다. 아내가 이곳 저곳에 가장 많이 심은 꽃이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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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아내가 아프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사례를 들으면서도 적절한 노동, 작물의 성장과 수확을 지켜보면서 얻게 된 삶에 대한 의욕, 그리고 자연의 바람, 꽃과 나무를 통해 얻은 감동이 지친 사람의 심신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는 말을 반신반의 했었다. 그렇지만 요즈음 나는 아내를 보면서 자연 속에서 숨 쉬면서 보고 듣고 일하며 자신이 생산한 것을 먹는 것도 치료의 한 방법임을 확신한다.

아내는 당분간 주말에나 숙지원에 들려 호미를 잡을 것이다. 그래서 풀을 매는 일은 나의 몫이 되었다. 그래도 건강해지는 아내를 보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퇴근 후 숙지원에 들려 땀 흘려 일해도 마음은 가볍다. 젖은 옷차림으로 귀가하는 나에게 아내는 꽃의 안부부터 묻는다. 임시 맡은 아이들의 교실과 숙지원의 경계를 오가는 아내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란색  루드베키아와  키 큰 해바라기가 어우러진 풍경.
▲ 구석진 곳의 풍경 하나 노란색 루드베키아와 키 큰 해바라기가 어우러진 풍경.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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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뜨락. 숙지원은 사람을 초대하는 곳이 아니다. 놀이터도 아니다. 그렇다고 일만하는 일터도 아니다. 번잡함을 피해 편안하게 쉬는 공간. 옆 산에 올라 주변 경치를 보거나 당산나무 마을길을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그도 지치면 평상에 깔아놓은 돗자리에서 목침을 베고 누워도 방해받지 않는 공간이다.

앞으로도 사람을 부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숙지원을 찾은 손님들이 떠나가도 붙잡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오라는 말은 의례적으로 차의 트렁크에 담아 보낼 뿐 결코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지난 3년의 세월을 돌이켜 본다. 아직 아내의 병은 완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숙지원의 사계절이 아내에게 기쁨과 보람을 주고 의지를 북돋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숙지원 여기저기에 무더기로 피어난 분꽃, 백일홍, 다알리아, 도라지가 곱다. 루드베키아의 노란색과 해바라기가 어우러진 모습도 한 풍경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아내의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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