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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넋이 담긴 흙

 

2010년 3월 26일은 안중근 장군이 뤼순감옥에서 순국하신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을 기리고자 나는 몇 해 전부터 안중근 장군 행장을 공부한 뒤 2009년 10월 26일 안중근 장군 하얼빈 의거 100주년 기념일에 맞춰 안 장군의 유적지 답사를 떠났다.

 

속초항을 출발하여 크라스키노, 슬라비얀카,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포브라니치나야, 쑤이펀허, 하얼빈 지야이지스고역, 뤼순에 이르는 8박9일의 대장정을 마친 다음, 순국 100주년 기념일에 앞서 <영웅 안중근>(박도, 눈빛)을 펴냈다.

 

한 친구가 자기가 다니는 성당 신부님이 안중근 의사를 매우 흠모하는 분이라고 소개하기에 책을 한 권 보내드렸다. 이틀 뒤 그 신부님께서 <오마이뉴스> 쪽지함으로 메일을 보내왔다.

 

"선생님께서 쓰신 책 (더욱이 안중근 장군님에 대한)에 직접 서명까지 해 보내시니 안 장군님께서 지금 부활하여 제 앞에 계신 듯하옵니다."

 

방구들장 신부님은 경기도 안성 미리내 성지 유무상통마을의 촌장으로, 마을 안뜰에다가 안중근 의사 동상까지 세운 분이란다. 나라나 지방자치단체에서도 감히 하기 어려운 일을 한 신부님이 하시다니….

 

신부님 소식을 들은 후부터 (신부님을) 한번 찾아뵙고 안중근 장군 동상을 세운 뒷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내가 뤼순 형무소 뒷산 사형수 공동묘지 흙을 담아 가지고 온 것이 있기에 이를 신부님과 나누어 가져야겠다고도 그때부터 별렀다. 마침 지난 달 말 집필 중이던 원고를 탈고한 다음날(6월 28일) 가벼운 마음으로 안성행 버스에 올랐다.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유무상통 마을에 도착한 뒤 나는 찻잔에 담은 뤼순 공동묘지 흙을 신부님에게 전했다.

 

알려진 바로는 안중근 의사 사형 집행 후 아우 명근·공근 두 아우가 형무소 측에 형의 시신 인도 요청을 했으나 일제가 이를 거부했다. 그런 뒤 일제는 안중근 의사 시신을 특별히 송판 관에 담아 사형수 공동묘지에 묻었다고 했다.

 

이에 정통한 현지 대련대학교 역사학과 유병호 교수는 당시 뤼순감옥의 법에는 "무연고 사형수의 시신을 매장 후 3년이 지나면 화장한 다음 산골(散骨, 유해를 흩어버림)한다"라고 하였다.

 

유 교수는 아마 이 얘기가 거의 맞을 거라면서 "사후 100년이 지난 지금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물론 안중근 의사의 경우는 일본 측에서 특수하기에 별도로 관리하였다면 예외일 수도 있다.

 

나는 뤼순감옥 공동묘지를 찾아가 그 일대를 둘러보았다. 공동묘지 바로 밑까지 도시 개발이 이루어져 기존의 옛 묘지 자리도 곧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감옥 옛 묘지에서 안 의사의 넋이 담긴 흙을 두 줌 가지고 왔다.

 

귀국한 뒤 그 절반을 효창원 안중근 의사 가묘에다 허토(봉분에 흙 한 줌을 뿌림)하였다. 남은 한 줌의 흙은 자기에 담아 <영웅 안중근> 집필 기간 동안 책상 위에 놓아두다가 탈고한 뒤에는 서가로 옮겨놓았다.

 

그 가운데 절반을 방 신부님에게 드리는 게 (그에게) 가장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아서 찾잔에 담아왔다. 그 흙에 대한 전후 사연을 신부님께 말씀드리자 그는 성호를 긋고는 마치 안 의사의 유해를 대하듯 조심히 받으셨다.

 

지난 역사에 대한 참회로 시작하다

 

- 왜 안중근 의사 현창사업을 하셨습니까?

:"안중근 장군 순국 100주기를 맞아 우리 교회(가톨릭)의 잘못을 속죄하고, 안 토마스(안중근 세례명)께서 원하신 평화로운 세상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당시 조선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한국천주교를 이끌었던 뮈텔(Mutel, 한국명 민덕효) 주교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살인자'라고 용납지 않았고, 빌렘(Joseph Wilhelm, 한국명 홍석구) 신부가 안 토마스의 마지막 미사를 위해 뤼순 가는 길도 막았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한 신부의 진정어린 참회로 나는 풀이하고 싶었다.

 

방구들장 신부님은 안 토마스 순국 100주기 기념사업으로 동상을 세우고, 안 토마스 바보장학재단을 만들었다. 또, 그는 "안중근 토마스 장군 찬가를 만드는 일을 기획했는데 이 세 가지를 여러 신자들과 독지가의 도움으로 이뤘다""면서 나에게 가사와 악보를 한 장 주고는 찬가를 부르셨다.

 

"우리 근현대사에 안 토마스만한 큰 인물이 없습니다. 제가 이 사업을 시작한 목적은 안 토마스와 같은 인물을 기르고자 함이요, 또 우리가 안 토마스의 정신을 바르게 널리 알려, 그분의 정신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안중근 장군은 경세가다

 

방 신부님도, 나도 안중근 인물에 대한 연구가 깊었기에 서로 공감한 바가 많았고, 얘기에 막힘이 없었다. 안중근 의사는 근·현대인물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남과 북에서 거부감 없는 인물이다. 또 그분의 중심사상이 평화애호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일본군의 포로까지 풀어주었다. 즉, 이토 히로부미를 개인적인 원한으로 저격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안중근 장군은 남북통일에 주춧돌로 삼을 위인일 뿐 아니라, 동양 삼국 곧 한국, 중국, 일본에서 모두 사상과 정신을 기리고 받들어야 한다는데 공감했다.

 

"그분은 한 세기 전에 뤼순을 영세중립지로 만들어 공동화폐를 만들고, 3국의 청년들로 평화군 군단을 편성 및 양성할 것을 주장하는 등, 먼 앞을 내다본 사상가요, 경세가(經世家,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뒤 안 의사의 말씀대로 시행했더라면 대동아전쟁도, 일본이 원자폭탄을 맞는 일도, 한반도가 분단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일본은 두고두고 동양 평화 파괴국으로 지탄받을 겁니다. 안 토마스 장군은 한국뿐 아니라 우리 동양 삼국에서 가장 뛰어난 위인이요, 실천가입니다."

 

방 신부님 집무실에는 낯익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이었다. 내가 곧장 그분을 알아보자 신부님이 놀라는 눈치였다.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종교인이라고 했다.

 

"제가 오산학교 교사 시절, 학교교지에 싣고자 전 교장 유영모 선생님의 구기동 댁까지 찾아가 인터뷰까지 했습니다."

 

"네에! 저는 생전에 뵙지 못한 분인데…."

 

종교인들이 나라를 망친다

 

방 신부님의 차림이나 말씀, 교유하는 분들이 범종교적이었다.

 

"종교인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는 망국병인 지연, 혈연, 문벌, 학연도 부족해 이제 종교연까지 덧보태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나라를 분열하는 망국 병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종교인끼리 서로 상대를 매도하면 안 됩니다. 또 나라의 지도자가 자기 교파만을 중용해도 안 됩니다."

 

방 신부는 "진리는 하나"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은 불교, 기독교 등 모든 종교에 벽을 두지 않고, 사람도 가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부처님 오신 날에는 유무상통마을 가족들과 절에도 함께 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법정 스님도 존경하고 수경 스님도, 문규현 신부도 당신의 절친한 친구였다고 소개했다. 당신이 입은 옷도 승복을 사제복으로 고친 옷이었고, 교회 종 조차도 절에서 사용하는 범종 모양이었다. 나중에 다른 분이 방 신부님은 한때 동국대학교에서 불교를 공부하기도 했다고 귀띔을 했다.

 

"우리 교회의 한 신자가 전주 태생으로 서울공대를 나온 뒤 아무개 기업의 이사였는데, 어느 날 고향을 옮겼다고 고백하기에 그 사연을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출생지에 대한 괄시와 편견 때문에 본적지를 서울로 옮겼다고 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들은 후 나는 경기도 화성에서 전라남도 장흥으로 본적지를 옮겼습니다. 그러자 장흥 군수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이 고향사람들이 본적을 옮겨가는 세상에 신부님은 거꾸로  당신네 고장사람이 되었다고 매우 고마워하면서 많은 선물을 보내주었습니다. 우리 마을에 있는 장승들도 장흥에서 보내준 겁니다."

 

내가 본명과 나이를 묻자 그제야 취재임을 알고서는 손을 저었다.

 

"사제 생활 35년에 교회 밥만 축을 낸 무위도식한 사람입니다.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왜 방구들장이라고 작명을 하였습니까?

"……."

 

방 신부님은 웃을 뿐 대답이 없었다. 아마도 '방구들장'은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전해주고,'최후의 보루'라는 뜻으로 지은 게 아닐까 내 나름대로 추측해 보았다. 다른 분을 통해 방 신부님의 본명이 방상복으로 올해 춘추 62세라고 전해 들었다.

 

내가 신부가 된 제자와 중학교 동창이었던 한 소녀가 수녀가 된 이야기를 하면서 고결한 성직자의 삶을 얘기하자 방 신부님이 못내 닫았던 입을 여셨다.

 

"독신자들은 기본 점수 미달입니다. 기혼자로 30~40년 이상 산 분들은 천국에 가고도 남음이 있지요."

 

많은 신자들로부터 부부 생활과 자녀 양육의 어려움을 전해 들은 탓인지, 당신은 너무 편하게 교회 밥만 축냈다고 다시 겸손의 말씀을 늘어놓으셨다. 그 틈에 얼른 카메라를 꺼내 두어 컷 셔터를 누르고는 일어섰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 통한다

 

'유무상통(有無相通)'이란 "있음과 없음은 서로 통한다"라고 풀이할 수 있는데, 깊은 뜻이 담긴 말이었다. 하기는 누구나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게 인생 아닌가.

 

이 유무상통 마을에는 250여 분의 어르신들이 사셨다. 애초에는 방 신부님이 시골 교회 사제로 있을 때 혼자 사시는 거동 불편한 노인을 당신 방에다 모시고는 당신은 지하 방에서 기거하면서 시작한 일이 점차 커져 오늘이 되었단다. 신부님 곁에서 봉사하는 신자 한 분이 유무상통마을 유래를 슬그머니 일러주었다.

 

이곳저곳 시설을 둘러보며 복도를 지나는데 어느 한 할머니가 반가운 표정으로 나에게 인사를 하고는 물었다.

 

"새로 입소하려고 오신 분이에요?"

"……."

 

내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안내하는 분이 대답을 했다.

 

"아니에요. 이분은 방 신부님을 찾아온 분이세요."

 

나이는 못 속인다고 하더니 그분에게는 나도 당신 동년배 동지로 보인 모양이었다.
 
아마도 나도 이제 곧 양로원으로 갈 때가 된 모양이다. 사람이란 모두가 이미 정해진 죽음의 날로 하루하루 다가가는 슬픈 존재가 아닌가.
 
돌아오는 길에 방 신부님의 안내로 미리내 성지인 김대건 신부 묘소에 절을 드리고 원주 행 버스에 올랐다.

 

원주까지 오면서 한 시간 반 동안 버스 안에서 내도록 "어떻게 사느냐는 실천의 문제다"라고 하신 어느 철학자의 말씀을 되뇌였다.

 

집에 도착한 뒤 방 신부님에게 잘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자 곧 답이 왔다.

 

"오늘의 만남과 안착을 먼저 안중근 토마스 장군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안한 밤 보내소서. 방가 합장"

 

 


태그:#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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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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