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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9시30분, 여기는 선교사 합숙소.

 

뭔가 이상하다. 무심코 둘러본 집 내부구조가 심상찮다. 낮에 왔을 땐 미처 확인하지 못한 부분이다. 우리 방 외에 다른 두 개 방이 작은 문으로 연결돼 있다. 현관문이 따로 있지만 한집처럼 이동이 가능하다.

 

이쪽에서 문을 잠글 수 있으나 반대편에서 열 수도 있다. 우리방은 아예 잠금장치가 없다. 끝방 통로를 지나 슬쩍 반대편 문을 열어보니 흙 묻은 남자 신발 수 켤레가 있었다. 이대로 잠들었다간 누군가 우릴 덮쳐도 속수무책이다. 어느새 어머니와 나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고 있다. 

 

"어떤 광신도들은 이런 외진 곳에 사람을 데려와 남한테 말 못할 짓을 한다던데…"

 

조금 전 1층서 만난 남녀도 독특한 분위기였다. 비누를 구하러 내려갔었는데 1층 어느 곳에 사는 듯한 여자가 잠옷 같은 긴 검정치마를 입고 나와 있었다. 인사를 하니 "예" 하고 대답했는데 얼굴이 창백하고 과하게 살이 쪘다. 그러고 보면 우릴 여기로 데려온 간사부터 어제 식당서 본 모든 여자들이 고도비만에 가까운 체형이다. 그리고 교회 쪽에서 내려오던 한 남자가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는 반대로 비쩍 마르고 후줄근한 옷차림이었다. 

 

괴상한 방식으로 치료를 한답시고 사람을 꾀는 사이비단체일까? 방 안에 CCTV나 도청장치가 설치된 게 아닐까? 행여 무슨 일이 일어나도 무조건 지켜주겠다던 어머니는 막 잠이 드셨다. 갑작스레 무릎 통증을 호소하시더니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다. 여행 이후 줄곧 과하게 걸어서 무리가 온 건가. 오늘밤 불침번은 내가 서야겠다. 

 

이렇게 되고 보니 후쿠오카로 온 건 완전히 내 판단 착오였던 것 같다. 그냥 혼슈에서 오사카, 교토를 보고 가까운 나라나 고베 등을 둘러보는 게 나았을 텐데.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경비로 더 안전하고 편한 곳에 머물렀어야 했는데. 이런 불안한 숙소로 온 것도 결국은 경비를 아끼려다 생긴 일이니 후회막급이다.

 

눈 앞이 뿌옇다. 눈꺼풀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 잠들면 안 되는데, 잠이 든 순간 누군가 올 것만 같다. 공포가 내 이성을 조이고 있다. 부엌에 있는 큰 상으로 방문 앞을 막을까? 부엌 칼이라도 옆에 가져다둘까

 

혹시 지금 내가 이곳 선교사들의 순수한 호의를 곡해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곳 사람들의 극단적인 체형과 다소 촌스러운 옷차림이 그들을 의심할 만한 논리적인 근거는 아니지 않나. 그냥 잘까? 안 된다. 안심하는 순간 사고가 나는 법!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그나저나 오후에 만난 유럽인 노부부들은 'Big Buddha(빅 부다)'를 봤을까? 하카타 시내의 기온역 맞은편에 다쵸지절이란 곳이 있는데 그곳에 일본 최대 목불이 있다. 어머니와 나는 나카타 가는 길에 우연히 들러 빅 부다를 봤는데 바캉스 복장을 하고 온 몸이 발갛게 익은 그들이 왔을 땐 이미 절 내부의 자동 셔터문이 닫히고 있었다. 오로지 빅 부다를 보기 위해 3시간을 걸어 왔다고 했는데 목적을 달성했는지 알 수 없다.

 

여행을 하다보면 의지와 무관한 갖가지 우연을 경험할 때가 많다. 지금 이 순간도 행운이 될지, 불운이 될지는 내일 아침에 알 수 있겠지! 잠도 쫓을 겸 가방에 넣어온 소설이나 읽어야 겠다. 오에 겐자부로의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이런 시점에서 읽기엔 책 제목이 너무 살벌하다.

 

어머니와의 닷새 여행 마지막 밤의 진실이 궁금한가?

 

나는 잠들고 말았다. 새벽 4시경 눈을 뜬 어머니의 전언에 따르면 문을 가로막고 둘둘 만 종이뭉치를 손에 쥔 채 자고 있었다. '침입'이 있을 시 시간을 벌기 위해 문틈에 또 다른 종이뭉치와 손톱깎기를 벌려 끼워둔 상태였다.

 

결국 우리는 여느때와 같은 평화로운 아침을 맞았다(사실 불안에 떤 건 나 혼자였고 어머니는 부러 나를 놀리신 거였다).  다시 만난 간사에게 집의 구조에 대해 물었다. 해답은 방과 방끼리 연결된 문은 지진을 대비해 이동을 용이하게 만든 일본 주택의 특징이라 했다. 그리고 2층이 원래 남자 선교사들이 사용하는 곳이라 오늘 1층으로 옮겨주겠다 한 거라고. 전날 이곳으로 오는 차 안에서 간사가 그리 말했었다.

 

이때까지도 긴가민가, 더 머물러야 하나 떠나야 하나 갈팡질팡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곳에서 총 열흘을 묵었다. 새로 옮긴 1층의 숙소는 어딘가와 연결되는 통로도 없었거니와 이웃집을 바라보는 거실 통창으로 햇살이 환하게 들어왔다. 구조는 똑같이 방 세 개, 주방겸 거실, 세탁실과 세면실,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날이 지나면서 그곳이 상식적인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선교사들의 숙소이자 사무실임이 확실해졌고, 마침내 '날씬한' 선교사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나보다 한 살 많은 간사는 여러모로 여행에 필요한 도움을 주었다.  

 

되도록 이 글을 그곳 간사를 포함한 선교사들이 보지 않길 바라며, 행여 본다면 깊이 사과를 전한다. 세상이 험하다는 이유로 남의 진심을 왜곡하고 상상 속에서나마 그들의 인격을 훼손한 것에 대해.

 

귀국 하루 전 나가사키에서 후쿠오카로 돌아와 이곳에 하루를 더 묵었다. 그리고 다음날 간사와 작별인사를 하며 오래도록 고마움을 표했다. 간사는 이 선교사 합숙소가 다른 여행자들에게 알려지는 덴 난색을 표했지만 그게 나라면 "언제든 환영"이라고 했다. 부디 첫날의 내 원맨쇼는 그녀가 모르길 다시 한번 바랐다. 그리고 비록 종교관이 다를 지라도 나는 그곳 사람들의 건강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길 기도했다.

 


태그:#일본여행, #후쿠오카 , #어머니, #선교사 ,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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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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