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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하게 독서하기> 멕시코의 반군 지도자를 만나다.
▲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처절하게 독서하기> 멕시코의 반군 지도자를 만나다.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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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후아나 폰세 데 레온 엮음, 해냄, 2002)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무엇을 강요하고 있는가."

1994년 멕시코의 한 원주민 마을,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NAFTA(북미무역협정)는 우리에게 어떠한 이득을 가져다줄 것인가." "풍요로운 세계화가 이룩될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의 파괴와 빈곤의 확대일 것인가." 논쟁은 치열했다. 그들의 진지한 논쟁과는 무관하게 이미 멕시코 정부는 원주민들이 모여 있는 치아파스에 매장된 석유와 우라늄 등의 천연자료가 필요했다. 시시각각 그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총칼을 들이댄 '강요'였다.

새해가 밝아오고 있다. "우리는 무슨 선택을 할 것인가." 답은 명확해졌고 그들이 주장하는 세계화라는 것은 사실 우리에게 억압과 복종을 강요하고 있다. 우리의 공동체가 사라지고 삶의 터전이 사라질 것이다. 이는 멕시코에서만 발생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역시 WTO와 같은 기구를 통해 의미가 불분명한 세계화 흐름에 동참할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단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994년 1월 1일 멕시코 치아빠스에서 NAFTA에 저항하는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이들은 민중의 나약한 쇠사슬을 깨뜨리고 전 세계에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대개의 반란군이나 반국가 조직은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하는데 반해 이 치아파스에서 일어난 봉기는 자못 새로웠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맞서 전 인류에 대한 자유와 권리 회복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른바 신좌파 운동의 본류이자 다 죽어갔던 국제적 연대운동의 새로운 출발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사파티스타'라고 불리는 이 저항운동은 과거 멕시코 혁명 당시 농업혁명을 주장했던 남부 해방군의 사령관이었던 '에밀리아노 사파타'에서 유래했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을 결성하여 무기를 든 이들의 이념 스펙트럼은 다양하지만 세계화에 저항하고 국가주의를 거부하는 많은 사조가 연대하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멕시코 정부군과의 무력 게임에 있어서 상대가 되지 못했던 이들은 즉시 국제연대의 전략을 채택해 전 세계의 수많은 이들에게 지지와 지원을 호소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또 다른 사파타, 체 게바라를 읽고 있었다.

'베일'에 쌓인 부사령관 마르코스
▲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마르코스 '베일'에 쌓인 부사령관 마르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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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티스타의 실질적인 지도자 마르코스는(사파티스타는 공식적으로 위계질서를 거부하였다.) 수많은 원주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앞에서 요구했다. "당신은 왜 정체를 드러내길 꺼려하는가." "얼굴을 가린 복면을 벗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마르코스가 이들의 요구에 응해 복면을 벗으려 하자 뒤쪽에 있던 다수의 군중들은 "안 돼"를 외쳤다. 마르코스라는 '신비'적 존재가 깨어져서는 안 될 것이란 믿음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이 베일에 감춰진 사내는 전 세계를 향한 연대의 포효를 하기 시작했고, 전 세계의 수백 개 NGO 단체들은 사파티스타의 저항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는 사파티스타 운동을 주도하는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전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다. 멕시코의 명문 국립자치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 유학한 이 엘리트는 무엇 때문에 치아파스에 들어갔을까? 신자유주의의 첨병을 달리고 있다는 한국에서는 이 운동이 어떤 교훈을 줄까?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체 게바라를 외친다. 그의 혁명정신을 칭송하기도 하고,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렸다. 혁명이란 스토리 역시 상업화의 일부분이 된 상황에서 우리는 체 게바라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싸우는 그를 보고 체를 느낄까? 아니면 좌파라고 욕을 할까? 판단은 스스로에게 맡기고 마르코스의 성명을 읽어보자. 다소 길지만 전문을 싣는다.

"꽃처럼 희망도 추수할 수 있습니다."
1995년 9월

이탈리아 브레시아에서 만나, 멕시코 치아파스와 남자와 여자들에게, 전 세계 민중에게

형제자매 여러분,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남녀노소의 이름으로 여러분께 인사드리며, 여러분의 엔쿠엔트로가 잘되기 바라는 우리의 희망을 전합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와 다른 대륙에도 우리의 형제자매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민족과 문화를 파괴하는 세계 질서 탓에 하나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돈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는 권력의 무능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세계 전쟁에, 모든 민중에 맞서, 인류에 맞서, 문화에 맞서, 역사에 맞서 싸우는 전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국도 수치심도 없는 한 줌의 금융 중심지들이 벌이는 돈과 인류의 국제전입니다.

이 국제적인 테러를, 벌서 세계 대전보다도 더 많은 죽음과 파괴를 가져온 이 국제 경제 질서를 저들은 신자유주의라고 부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더욱 가난해지고 더욱 많은 죽음을 당하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불만과 반란과 무언가를 하려는 의지로, 비 순응주의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권력이 쓴 역사는 우리가 졌다고, 냉소주의와 이윤이 미덕이라고, 정직과 희생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국제 시장에서 유통되는 통화가 없으면, 구매력이 없으면, 희망이 없으면, 희망도 돈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착한 학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권력이 가르친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체제에 순응하고 백지처럼 살라고 그들이 가르칠 때, 우리는 수업을 빼먹었습니다. 우리는 근대 과목에서 낙제를 했습니다. 우리 반란 반 친구들은 서로를 발견하고 우리가 형제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상상력으로, 창조력으로, 내일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실패와도 부딪혔지만, 정의를 바라는 마음과 더 나아지려는 꿈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외로움이 많이 모이면 커다란 외로움 덩어리가 되는 게 아니라, 국적과 언어,문화,인종,성별을 떠나 하나로 뭉친 공동체 집단이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우리 사파티스타는 여전히 포위된 채, 여전히 탄압받으며, 우리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한번 숨 쉴 때마다, 한번 걸을 때마다 우리를 엄습해오는 죽음과 함께, 여전히 여기 멕시코 남동부 산악 지대에 있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여전히 포위하고, 여전히 박해하고, 여전히 죽음과 고난을 제공하면서, 여전히 거짓말을 하면서, 여전히 궁전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100만 명이 넘는 멕시코인이 유례없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해, 우리의 기본적인 요구에 그들도 동의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외국 당에 있는 수많은 형제자매들도 우리의 요구가 정당함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정부는 귀를 막고 있습니다. 수 만 명의 남자와 여자가 결집해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국 콘술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정부는 눈을 감고 있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기아와 질병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연방군은 갈수록 더 많은 군사 작전을 펼치고, 정당은 원주민을 시민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대중 매체까지 거짓말과 침묵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절망과 분노가 국민에게 되물림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시당하고, 멸시당하고, 잊혀졌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도 승리가 가까이 온 게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미 여러분이 저마다 여러분 나라에서 벌이고 있는 투쟁과 연대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밝히지만, 우리는 끝까지 (설사 그 끝이 승리가 아닐지라도) 여러분을 지지할 것이며, 여러분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움에 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저항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려움을 헤치고 나아가야 하고, 멕시코 남동부 산악지대에서 여러분과 함께하며 여러분을 지지하는 집단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외로워하거나 고립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항상 잊지 않고 여러분을 주시할 것입니다.

발레, 건강하기를, 그리고 꽃처럼 희망도 추수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기를.

멕시코 남동부 산악지대에서
반란군 부사령관 마르코스


태그:#사파티스타, #마르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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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가 생기면 항상 펜을 잡는 자유기고가. 시민단체 흥사단에서 이사로 활동했으며, 최근까지 국회 정무위원장 비서관으로 일했습니다. '근거있는' 소통의 공간을 열기 위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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