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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수교 20주년 기념, 안톤 체홉 탄생 150주년을 맞아 그리고리 지차트콥스키가 연출한 벚꽃동산이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상연되고 있다.
▲ 벚꽃동산 한러수교 20주년 기념, 안톤 체홉 탄생 150주년을 맞아 그리고리 지차트콥스키가 연출한 벚꽃동산이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상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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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 연출가 그리고리 지차트콥스키(Grigori Ditiyatkovski)가 연출하고 지난 5월 28일 개막, 오는 13일 일요일까지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상연중인 <벚꽃동산>은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는 안톤 체홉의 4대 장막극(갈매기, 바냐아저씨, 세자매, 벚꽃동산) 중 맨 마지막 작품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바로 그 해인 1904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체홉의 4대 장막극은 3시간 내외의 시간 동안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에 걸쳐서 일어나는 삶의 장면들 일부를 매우 차분하게 보여주는 연극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이 대개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데 반해 체홉의 작품들은 시종일관 낮은 목소리로 일상의 장면들을 굉장히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다른 연극들에 비해 특히 내면의 연기가 중요시되는 것이 체홉작품의 특징이며 연기자들 역시 이렇게 사실적인 캐릭터를 소화해내기가 더욱 어렵다. 때문에 상당한 베테랑들이 아니면 연기하기 쉽지 않은 편이다.

이번에 지차트콥스키가 연출한 작품으로 <벚꽃동산>을 처음 보았다. 이전에 보았던 <세자매> <바냐아저씨> <숲귀신> 등에 비해 그의 말년에 발표된 마지막 작품이어서 그런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벚꽃동산을 떠나가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대개 어떤 갈등이 있은 후 일부가 떠나가고 남은 사람들은 다시 막연하지만 새로운 희망을 찾아 일상의 일들을 묵묵하게 해 나가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하지만 이 작품은 모두가 자신이 살던 영지를 떠나가, 마치 체홉 자신이 세상과의 안녕을 고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1막 장면, 자신의 농노의 아들이었던 로빠힌은 상인으로 부자가 되었다. 5년만에 파리에서 벚꽃동산이 있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온 라넵스까야는 빚으로 파산의 위기에 처한 상태. 이런 라넵스까야에게 로빠힌은 벚꽃동산의 나무들을 베고 별장지로 개간하라고 조언한다.
 1막 장면, 자신의 농노의 아들이었던 로빠힌은 상인으로 부자가 되었다. 5년만에 파리에서 벚꽃동산이 있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온 라넵스까야는 빚으로 파산의 위기에 처한 상태. 이런 라넵스까야에게 로빠힌은 벚꽃동산의 나무들을 베고 별장지로 개간하라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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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러시아의 대지주인 라넵스까야 부인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으나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도 물에 빠져 죽은 후 딸 아냐와 함께 파리로 떠났다 5년만에 벚꽃동산이 딸린 자신의 영지로 돌아온다. 수양딸 바랴가 그간 어렵게 살림을 꾸려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태. 벚꽃동산과 영지는 빚 때문에 곧 경매에 넘겨지게 될 상황이다.

농노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상인으로 거부가 된 로빠힌은 '벚꽃동산의 나무들을 베어내고 별장지로 개발하면 빚도 갚고 일정한 수입도 생기게 될 것'이라 조언하지만 라넵스까야 부인은 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막연하게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만으로 예전처럼 흥청망청대다, 결국 경매일을 맞는다. 결국 경매는 이루어지고 경매를 통해 벚꽃동산과 영지를 산 것은 로빠힌.

자신의 아버지가 농노를 하던 땅을 사 이제는 주인이 되어버린 로빠힌은 원래 자신의 생각대로 벚꽃나무들을 베어내고 동산과 저택이 딸린 영지를 별장지로 개발하기 시작한다. 라넵스까야는 다시 애인이 기다리고 있는 파리로 돌아가게 되고 딸 아냐는 학교로, 수양딸 바랴는 다른 집의 가정부로, 이런 식으로 모두가 벚꽃동산을 떠나게 된다.

<벚꽃동산>을 처음 보기 전, 대략적인 줄거리를 접하고선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엔딩신을 연상했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오히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가 떠올랐다.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더니 역시 생전의 박경리 선생이 안톤 체홉의 <벚꽃동산>을 좋아했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토지>의 박경리는 이미 2008년에 세상을 떠나 고인이 되어버렸으니 그를 인터뷰할 수는 없는 노릇이나 만일 그에게 물어보았다면 대하소설 <토지> 1부는 체홉의 <벚꽃동산>에서 굉장히 큰 모티프를 얻었다고 하지 않았을까?

2막, 샤를로따의 마술장면. 라넵스까야 저택에서 가정교사로 일하고 있는 샤를로따가 지주 삐시치크 앞에서 마술을 선보이고 있다.
 2막, 샤를로따의 마술장면. 라넵스까야 저택에서 가정교사로 일하고 있는 샤를로따가 지주 삐시치크 앞에서 마술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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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동산>의 주인공 라넵스까야 부인은 19세기 러시아 봉건귀족의 붕괴와 몰락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토지>의 구한 말 양반 가문의 상속녀 서희와 비교할 만한 인물이다. 거기다 라넵스까야 부인 집안 농노의 아들로 태어나 상업으로 부를 일군 신흥 부르주아지 로빠힌은 <토지>의 길상을 떠올리게 한다.

서희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지키기 위해 길상과 결혼하는 것과 라넵스까야 부인의 양녀 바랴가 로빠힌과 맺어질 뻔 하는 장면은 묘하게 닮아 있다. 그리고 실제 <벚꽃동산>의 무대 위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소작농들은 토지에서 평사리 마을 사람들을 연상케 했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 등장인물 모두가 고향을 떠나게 되는 장면도 거의 동일한 느낌을 준다.

물론 딱 거기까지다. 총 21권이나 되는 대하소설 중 최초의 네권에 해당하는 1부가 <벚꽃동산>으로부터 상당한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나머지 열일곱권은 박경리 자신이 암울했던 우리 민족의 구한말,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간도로 건너간 민초들의 삶을 그려냈다 할지라도 그 장대한 이야기의 단초를 이끌어낸 주요한 모티프가 체홉에서 나왔을거라는 추측은 과연 나만의 것일지 꽤 궁금해진다.

이번 <벚꽃동산>은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의 무대 깊이를 최대한 활용, 무려 30m에 이르는 원근법적 스펙타클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을 압도한다. 지차트콥스키는 지난 2004년 같은 무대에서 상연하였던<갈매기> 때에도 그랬다고 하는데, 그 때 보았던 일부 관객들의 말을 들어보니 배우들의 연기 역시 그 때와 비슷한 모양이다.

작년 국립극단이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하였던 <세자매>, 올해 초 심재찬의 연출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 올랐던 <바냐 아저씨> 등에 비해 배우들의 연기 면에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 무대였다. 어쩌면 배우들 스스로 창의적인 캐릭터 소화를 요구하는 지차트콥스키의 연출 방식이 한국 배우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객석에 앉은 관객으로서 '저 캐릭터는 뭔가 핵심을 벗어나 있어, 뭔가 겉도는 느낌이야'라는 느낌을 받는 순간부터 극에 대한 몰입도는 어쩔 수 없이 떨어지게 된다.

2막 장면, 라넵스까야 부인의 딸 아냐는 만년 대학생 뻬짜(뜨로피모프)와 사귀는 사이. 이들은 육체적인 사랑보다는 정서적인 교감을 통한 사랑을 추구한다.
 2막 장면, 라넵스까야 부인의 딸 아냐는 만년 대학생 뻬짜(뜨로피모프)와 사귀는 사이. 이들은 육체적인 사랑보다는 정서적인 교감을 통한 사랑을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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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리뷰어는 '이 작품 속에 체홉의 분신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 근거로 의사 직업의 캐릭터가 나오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데 내 시각은 조금 다르다. 극중 만년 대학생 역할로 나오는 뜨로피모프가 직접 체홉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체홉의 철학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뜨로피모프 역시 매우 중요한 조연이다. 2004년 전훈 연출 작품에서의 조민기 때와 비슷한 나이에 역을 맡았는데, 그가 외치는 체홉의 삶의 철학과 관련한 대사들은 마치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듯 공허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는 단적인 예를 들었을 뿐 특정 연기자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체홉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무리 적은 역할을 하는 배우라 할지라도 하나 하나 다 캐릭터가 살아나야 한다. 그런데 신구를 제외하고는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픈 배역을 찾기 어려웠다.

라넵스까야 부인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공이라면 지독한 악역이건 아주 멍청한 바보로 나오건 간에 매력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의 라넵스까야 부인은 뭔가 자신의 고유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다기보다는 어딘가에 둘러싸인듯한 느낌이었고, 떠 있는 느낌이었다. 1막과 2막, 3막과 4막 각 장면에서의 라넵스까야는 기분 상태도 전혀 다르고 그 대조가 관객으로 하여금 몰입하고 이끌리게 만들어야 했는데 그런게 부족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긍정적으로 보아줄 만한 부분도 몇몇 꼽을 수 있다. 먼저 라넵스까야 부인이 이전과 다르게 훨씬 젊어졌다는 것. 2004년 체홉 서거 100주년 때 예수정(56)이 맡았던 것을 이번에 이혜영(36)이 맡아 40대 초중반 역으로 등장한다. 지금껏 라넵스까야 부인 역할이 주로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 정도로 나왔던 것에 비해 훨씬 더 긍정적이고 생동감 있는 표현이 가능해졌다.

3막 장면, 자신의 영지가 로빠힌에게 팔려 이제는 떠나가야 하는 신세가 된 라넵스까야 부인, 딸 아냐가 엄마를 위로하며 다른 곳으로 가 더 큰 동산을 사자고 한다.
 3막 장면, 자신의 영지가 로빠힌에게 팔려 이제는 떠나가야 하는 신세가 된 라넵스까야 부인, 딸 아냐가 엄마를 위로하며 다른 곳으로 가 더 큰 동산을 사자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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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극의 마지막 장면인 모두가 영지를 떠나는 대목에서는 원래대로라면 벚꽃나무를 베는 도끼질 소리가 들려와야 하는데 반면 이 작품에서는 빗소리가 들린다. 러시아에서는 떠나는 날 비가 내리면 길조라고 한다는데 이 역시 라넵스까야가 좀 더 젊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예전에 비해 밝고 긍정적으로 표현코자 한 것이라고 한다.

3막에서 아냐가 엄마인 라넵스까야 부인에게 "엄마에겐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있잖아! 우리 여길 떠나 여기보다 더 큰 동산을 만들자! 우리 모두 떠나는 거야, 우리 모두!"라고 말하는 장면의 표현도 물소리와 함께 사실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몽환적인듯한 느낌을 주도록 연출한 점이 눈에 띈다.

에밀 카펠류쉬가 디자인한 깊이감 있는 무대가 주는 스펙터클 또한 중요한 볼거리다. 아주 멀리서부터 배우들이 등장하고 퇴장하며 사람이 작아지고 커지는 장면은 이 무대가 아니라면 좀체 보기 힘들다. 3막에서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벚꽃나무가 쓰러지는 듯한 표현도 이 무대를 통해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또한 샤를로따가 삐시치크와 함께 마술을 하며 소동을 피우거나 복화술을 하는 장면도 넓은 무대를 잘 활용하여 살짝 양념과도 같은 재미를 준다.

금번 지차트콥스키가 연출한 <벚꽃동산>은 한국과 러시아 양국의 문화부가 공동으로 주최한 한·러 수교 20주년 기념 한러문화축제의 일환으로 기획된 것으로, 한국 공연이 끝난 후 오는 11월에는 러시아 볼코프 국제연극 페스티벌에도 초대되어 상연될 예정이라고 한다.

4막 마지막 장면, 다 떠나버리고 텅빈 저택에 피르스가 홀로 남아 있다. 밖에는 비가 내린다.
 4막 마지막 장면, 다 떠나버리고 텅빈 저택에 피르스가 홀로 남아 있다. 밖에는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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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벚꽃동산, #안톤 체홉, #지차트콥스키,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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