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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내랑 결혼한 지 15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생각해 보고 할 것도 없이 저는 아내를 기쁘게 한 날이 별로 없는 거 같습니다. 기쁘게 한 것 보다는 마음 착한 아내를 슬프게 하기도 하고 걱정과 근심을 더 많이 안겨준 거 같습니다.

실력도 능력도 학벌도 없는 저를 만나 마음고생 몸고생 다 시킨거 같아 참 미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직장이 변변치 못해서 울산서 결혼하고 울산서 살다가 부산, 용인, 서울을 거쳐 다시 울산에 와서 살았습니다.

울산에 와서도 근 한 달간 직장없이 백수로 지내다 현대자동차 사내 하청업체에 비정규직으로 들어가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지난 2000년 7월 초 일입니다. 제가 현대차 사내 하청업체에 비정규직으로라도 꾸준히 다니자 아내의 근심도 줄어 드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10년을 넘지 못했습니다. 어지간 하면 꾹 참고 힘들더라도 끝까지 다니려 했었습니다. 아내 심정은 그랬습니다.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정년 퇴직까지만이라도 꾸준히 다녀. 그럼 내가 다 알아서 노후 준비해 놓을게"

틈만 나면 힘들어서 제가 그만 둘까봐 하는 말이 그랬습니다. 아내의 그 간곡한 부탁을 따르기로 하고 정말 열심히 다녔습니다. 어떤 달은 환산된 작업시간이 580시간이 넘도록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주야간 10시간씩 하고 특근도 밥먹듯이 했습니다. 어떤 날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토요일 오후 5시 특근을 들어가 일요일 아침 8시에 마치는 일을 했습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업체 소장이 와서 말했습니다.

"창기씨 내일 아침에 출근하지요? 오늘 아침에 출근 할 직원이 볼일이 있어 일을 못나온다고 하네요. 수고스럽지만 오늘 저녁까지 작업을 좀 해줘요."

소장님은 아침에 먹을 컵라면과 빵, 음료가 들어 있는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저는 잘 보이기 위해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밤새 일해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날 하루 종일 작업을 해주었습니다. 낮에 하는 작업은 저녁 8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습니다. 저녁 9시에 집에 들어가 바로 씻고 잠들었고 월요일 아침부터 6시경 일어나 주간조 출근을 또 해야 했습니다. 저는 잘리지 않으려고 업체에게도 또한 원청 관리자에게도 잘 보이려 애를 썼습니다.

저는 아내의 간곡한 부탁을 가슴에 품고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기를 10여년. 저는 원청과 하청업체 관리자에게 잘 보이면 비정규직이지만 정년까지라도 다니게 해줄줄 알았습니다. 이 순진한 제 믿음은 10년이 채 되기 전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창기씨 우리도 어쩔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냥 조용히 나가주면 고맙겠습니다."

몇 년 전부터 공장 모듈화니 수동변속기는 미래가 없다느니 해서 중국 공장으로 옮긴다느니 하는 소문이 나돌았고 급기야 올 초가 되자 구조조정에 대한 노사간 흐름이 기정 사실로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1년간 새로운 공정 깐다고 했습니다. 정규직은 1년간 유급휴가 보내기로 했고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그냥 아무 대책없이 무방비 상태로 원청의 노사 협상이 마무리 되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하늘이 노랬습니다. '이 무슨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인가?' 정말 제 정신을 멍하게 만들었고 이 냉정한 세상이 싫어지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회사로부터 정리해고 대상이라는 소식을 접하고도 아내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조심성이 많고 마음이 여린 아내가 알게 되면 또 마음 아플까 싶어 도저히 말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정리해고 날을 며칠 앞두고서야 저에게 날아든 정리해고 통보서를 아내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아내는 정리해고 통보서를 본 후 한동안 아무 말 없었습니다. 저도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남편이 하루 아침에 직장에서 쫒겨나는 것에 대해 아내는 얼마나 마음 졸였을까요. 자식들 커가고 생활비는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데, 남편이 다시 백수가 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속을 썩였는데 저는 또다시 큰 걱정을 안겨주고 말았습니다. 현대차 사내 하청 비정규직에서 정리해고 당한 후 저는 정말로 울산이라는 도시가 싫어졌습니다. 친인척이 있어 또다시 다른 직장을 구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다시 오늘처럼 10년 후 대책없이 잘린다면 그땐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차라리 다른 무엇을 찾아 떠나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가야 할지 찾아보다가 제주 귀농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마침 제주도에서 귤농사 지으며 사는 농부 한분과 연이 닿아 사전 답사차 지난 2월 말경 다녀 왔습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들겠으나 정년 퇴직없는 농사 지으며 농부로 살아가자고 다짐했던 것입니다.

"나 제주도로 귀농 해야겠다."

저는 아내에게 이 말을 했습니다. 제 돌파구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울산은 이미 정나미 떨어졌고 울산을 하루 빨리 뜨고 싶었습니다. 저는 아내를 설득했습니다. 제주도 가서 살자구요. 저는 가족이랑 함께 제주로 귀농하는데 실패 했습니다. 아내는 그나마 있는 집 한 채 팔아 제주도 가서 홀라당 다 써버리고 알거지 될까봐 걱정을 먼저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홀로 제주도로 귀농을 한다고 와 있습니다. 그렇게 제주도로 귀농 한다고 온 지 2개월이 지났습니다. 제주도 와서 혼자 밥해 먹으며 관심있는 귤농사 배우랴 귀농 교육 받으랴 그렇게 지내기가 많이 힘이 듭니다. 하지만 걱정하는 아내에게 힘들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나 잘 지내고 있거든. 그리고 난 제주도가 좋아. 자연 속에서 일하는 게 재밌어."

전화하면 말이야 그렇게 하지만 땡전 한푼 없이 내려와 낯설은 제주도에서 하루하루 보내는 게 힘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희망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농업도 업인지라 다른 사업 못지않게 여러가지 복잡한 사안과 사항들이 많지만 저는 꼭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내고 싶습니다.

저는 꼭 제주도에서 터를 잡고 정착하고 성공은 아니더라도 그냥 먹고 살 정도는 이루어보고 싶습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천천히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꼭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돈도 있고 가족이 모두 함께 제주도로 온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귀촌이라 했습니다. 저처럼 살기 어려워 내려온 경우를 귀농이라 했습니다. 어떨 땐 귀촌 온 분들 보면 많이 부럽기도 합니다. 그들은 근사한 집도 사고 큰 귤농장도 사고 여러가지 농기구도 구입하고 또 시골살이에서 필수품인 트럭도 새로 사고 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없이 몸만 달랑 내려온 경우입니다. 하지만 도시처럼 그리 냉정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먼저 귀농온 분들이 조언도 해주고 제주농업기술원 직원 분들이 친절하게 농사와 빈집 정보나 귀농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서로 도와주고 있는 거 같습니다. 도시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좋은 생활 모습이 저에겐 큰 위안이 됩니다.

저는 작으나마 아내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엔 새벽에 일어나 감자밭에 가서 호미로 흙을 파 간혹 나오는 감자를 캐내어 모아 보내 주었습니다. 한 상자 다 언제 모으나 싶었는데 귀농 카페에서 우연히 알게된 금악이라는 마을에서 귀농 12년째라는 조선생님께서 20㎏를 얻어 주어 같이 보내줄 수 있었습니다. 작년과 다르게 올해엔 감자 가격이 높다고 합니다. 한 상자 사 보내려 했지만 비싸 엄두를 못내고 있을 때 귀농 교육생 어느분이 그랬습니다.

"감자 다 캐고난 밭에 호미 들고 가서 파보세요. 감자 나올 거예요."

감자 농사 지은 농부는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큰 감자 밭을 일일이 손으로 캐낼 수 없어 트렉터로 밀어 튀어 올라온 감자만 수거 한답니다. 그래서 감자 밭으로 가서 호미로 흙을 긁어 보았더니 진짜로 감자가 더러 나왔습니다.

그렇게 저번엔 감자를 두어상자 만들어서 보내 주었고 이번엔 마늘을 주워 보내려 합니다. 제주 감자에 이어 제주에서 나는 마늘도 맛보이고 싶었습니다. 마늘 가격도 많이 비싸다고 했습니다.

"다 파내고 난 마늘 밭에 가보세요. 더러 마늘이 있을 거예요."

사람들이 훑고간 마늘 밭 자리 어느 곳엔가 이렇게 마늘쪽이 더러 있었습니다. 한알 한알 정성스레 주워 모았습니다.
▲ 제주 마늘 밭 사람들이 훑고간 마늘 밭 자리 어느 곳엔가 이렇게 마늘쪽이 더러 있었습니다. 한알 한알 정성스레 주워 모았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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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은 사람이 일일이 뽑아 내는 작물입니다. 그런데 마늘이 있을 리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한번 가보자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후 6시쯤 귤농장서 일 마치고 화순 옆 동네 덕수로 가보았습니다. 처음에 우리 마을부터 한바퀴 돌았지만 온통 귤 밭 뿐, 마늘 밭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옆 마을 덕수와 아랫 마을 사계 쪽으로 가보았습니다. 그 마을엔 마늘 밭이 많았습니다.

어떤 마늘 밭은 캐 내 말리고 있었고 어떤 마늘 밭은 마늘 꼭다리를 모두 뜯어 간 후였습니다. 제가 마늘 밭에 도착 했을 땐 이미 서너 명의 여성 분들이 여기저기 서서 발로 마늘 줄기를 뒤적이며 마늘 찾기에 바빴습니다. '이거 경쟁이 장난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휘젓고 간 마늘 밭에 무엇이 있을까요? 순간 흙에 반쯤 묻혀 있는 마늘 한쪽이 보였습니다. 얼른 주워서 비닐 봉지에 넣었습니다. '오라 있구나' 싶었습니다. 진짜로 마늘이 있었습니다.

마늘 통이 아니라 쪽이었지만 분명히 있었습니다. 저는 부지런히 마늘 밭을 살피며 이리저리 다녔습니다. 한 개라도 더 찾아 내려고 말입니다. 여기저기 한쪽의 마늘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일 때마다 주워서 비닐봉지에 넣으니 조금씩 조금씩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마늘 밭을 뒤져보자. 단 한 개의 마늘이 나올지라도'

여러 사람들이 이미 지나가면서 마늘을 많이 주워 갔지만 그래도 더러 있었습니다. 하나 둘 모으니 조금씩 많아 지고 있었습니다. 재밌었습니다.
▲ 제주 마늘 밭 삿삿이 뒤지기 여러 사람들이 이미 지나가면서 마늘을 많이 주워 갔지만 그래도 더러 있었습니다. 하나 둘 모으니 조금씩 많아 지고 있었습니다. 재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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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어두워 질때까지 마늘을 주워 모았습니다. 두시간 넘게 모으니 제법 되네요. 기분 좋더군요.
▲ 어두워 질때까지... 사방이 어두워 질때까지 마늘을 주워 모았습니다. 두시간 넘게 모으니 제법 되네요. 기분 좋더군요.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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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와 사계에 널려있는 마늘 밭을 차례로 다니기로 했습니다. 물론 저는 낮엔 귤농장서 일을 배우고 있어서 귤농장 주인이 일을 마쳐야 갈 수 있습니다. 저는 시간날 때마다 마늘 밭으로 달려 갔습니다. 아내와 가족을 잠시나마 기쁘게 하기 위해서 힘들더라도 힘을 내자 고 마음 먹었습니다. 오후 6시 30분이나 어떨땐 7시경 도착해서 마늘을 주웠습니다.

시간을 보니 저녁 8시가 지나니 날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더 가까이 몸을 숙여서 뒤지기도 했습니다. 나중엔 돌멩이인지 마늘인지 분간이 안 갔습니다. 그때까지 부지런히 마늘 밭을 뒤졌습니다. 마늘 줍느라 몸을 숙였다 폈다를 반복하니 나중엔 허리가 많이 아파 왔습니다.

시간날 때 마다 다니며 마늘 주워 모은 지 2주는 된 거 같습니다. 그렇게 마늘을 모으다 보니 어느새 상자에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조금만 차면 한 상자 만들어 울산의 가족에게 보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마늘 한 상자 그렇게 해서 보내주면 아내가 기뻐해 줄까요?


태그:#제주귀농, #제주마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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