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방선거가 있던 날, 아침 일찍 투표를 하고 산에 다녀와 집에서 쉬고 있는데 한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선생님, 저 지금 선암사에 왔어요. 국사 리포트 쓰려고요."

"그래? 선생님도 오전에 산에 갔다 왔는데."

"전 산에는 안 가고 선암사만 구경했어요."

"그래도 절이 산 속에 있잖아. 거기 나무도 많고 좋지?"

"네. 너무 좋아요."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가 마치 산의 정기를 받은 듯 우렁차고 맑았습니다. 전화를 걸고 있는 아이의 해맑은 얼굴이 눈에 선했습니다. 당장 그곳으로 달려갈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습니다. 그 맑고 환하고 쟁쟁한 목소리가 얼마만인지 제 마음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농부만 같았습니다.

 

그늘이 존재하지 않는 태양 같은 아이라고나 할까? 그 존재하지 않는 그늘로 인해 조금은 불안해 보이기도 하는, 조금은 충동적이고 채 생각이 영글지 않은, 그러다가도 깜짝 놀랄 만큼 현숙하고 사려 깊은 마음을 글로 담아내기도 하는, 어쨌거나 가까이 다가다면 팔딱팔딱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그런 아이의 입가에서 갑자기 웃음이 사라진 것은 오월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아침 조회를 하기도 전에 교무실로 찾아와 조퇴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너무 머리가 아프다는 것이었습니다. 꾀병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조퇴를 허락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일단 돌려보냈다가 점심시간에 다시 아이를 만나 차분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이의 고민의 친구문제에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소한 오해가 발단이 되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골이 깊어진 듯했습니다.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에 비해 친구 문제에 더 민감한 편입니다. 그것은 항상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니길 좋아하는 여학생들의 습성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친구 간에 오해가 생겨 우정의 전선에 금이 가면 일단 짝을 지어 다니는 습성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늘이 없는 아이일수록 단 하루라도 무리를 벗어나 혼자 외톨이가 된다는 것은 머리가 터져버릴 만큼 견디기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늘이 없는 아이를 좋아합니다. 아니, 그늘이 없는 아이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늘이 없다는 것은 아이에게 좋은 일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런 보편적인 생각을 배반하는 일도 종종 경험합니다. 적당한 그늘이 있는 아이들이 비교적 외로움을 잘 견딘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쉴만한 적당한 그늘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날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선생님은 걷는 걸 참 좋아해. 지난 겨울방학 땐 순천에서 여수까지 걸었어. 해안선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는데 참 좋더라. 경치가 좋아서가 아니고 나 혼자라는 사실 말이야. 너도 보니까 글을 참 잘 쓰던데 글을 쓰는 사람은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이 필요하거든. 혼자 식당에 가고 혼자 하교하고 그런 일들이 많이 힘들 거야. 하지만 이번 기회에 그런 경험을 해보는 것도 좋아. 외롭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야. 외로워봐야 외로운 사람을 이해할 수도 있고. 이번 기회에 혼자 도서관에 가서 책도 빌려보고 네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도 가져봐. 선생님이 널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것도 임시방편일 뿐이야. 중요한 것은 바로 너야. 난 네가 강해졌으면 좋겠어. 친구 문제로 자꾸만 도망치려하지 말고 네가 일이 잘 되도록 한 번 풀어봐. 이번 기회에 다른 좋은 친구들도 사귀어 보고. 알았지?"

 

이런 말들이 아이의 영혼에 얼마나 깊이 스며들 수 있을까요? 한 아이를 신뢰하는 것은 곧 인간을 신뢰하는 일일 것입니다. 인간의 변화에 대한 신뢰, 이것이 교육의 시작이자 전부가 아닐까요? 지난 주 아이에게서 받은 편지입니다.

 

사랑하는 선생님께!!

 

선생님 컴퓨터시간에 잠깐 틈이 나기도 하고 선생님 생각도 나고 해서 이렇게 편지를 해요.

 

항상 칭찬해 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친구 같은 선생님이 제 곁에 있어서 지금까지 너무 행복했고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요. 요새 제게 너무 힘든 일도 있고 그랬지만 그래도 정말 좋은 친구들과 선생님이 제 곁에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요.

 

이젠 다짐했어요. 절대 울지 않기로. 혼자서도 꿋꿋이 당당하게 다니기로요! 힘이 들 때 피하려고만 했는데 이젠 부딪쳐 볼 거예요. 어떤 험한 일이 있더라도요.

 

전 늘 생각했어요. 왜 힘든 일은 나한테만 찾아올까 하구요. 하지만 이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요! 예전에 모습처럼 밝고 활기찬 모습 보여드릴게요. 선생님 항상 걱정해 주시고 문자 보내주시고 다독여주셔서 감사하고 존경해요. 선생님 그리고 사랑해요!!

 

가만 보니 아이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긴 듯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전인가는 예전의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오해가 풀린 거냐고 물어보니 아이에게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냥 잘 지내기로 했어요."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그늘 없이 환히 웃어보였습니다. 친구 문제로 잠시 드리워졌던 그늘은 사라졌지만, 오히려 외로울 때 찾아가 쉴만한 내면의 그늘을 소유한 듯, 아이의 거동에  깊이와 여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순천효산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