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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봄이었다.  기자 그만두고 반 백수로 지내면서 한 일간지에 이 글을 연재하기 시작할 때 내 생각이 그랬다. 술에 담긴 여러 기호들을, 영화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살피자. 객관적 정보를 전달하는 기사가 아니라, 취향과 기호의 주관적 세계를 공유하는 온전한 잡문을 쓰자. 그랬는데 글을 쓰면서 스스로 놀랐다. 그렇게 즐겨 마시던 술에 대해, 이렇게 몰랐다니. 수년간 살을 섞어 온 여자의 가족관계, 혈액형 따위를 모르고 있었던 것과 같은 미안함과 궁금함이 뒤늦게 밀려왔다. 나뿐이 아니었다. 내주변의 술꾼 대다수가 술에 대해 무지했다. 국내에 출간된 책 중에도 와인 관련 서적 빼고(이 책은 와인은 다루지 않았다) 술에 관한 게 가뭄에 콩 나듯 했다. 신세계이구나.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에 탐구심이 보태져 이것저것 뒤지고 공부하면서 즐겁게 썼다.-<술꾼의 품격> 서문 일부

<술꾼의 품격>(시네북스 21 펴냄)에는 '마법 같은 유혹과 위로, 25가지 술과 영화 이야기'란 부제가 붙었다. 술을 통해 영화를 만난다. 아니, 영화 속에서 술을 찾는다. 그리하여 영화 속 그 술의 이모저모를 들려준다. 한 꼭지 한 꼭지, 흥미롭고 재미있다. '술과 영화를 적절하게 섞은 달콤하고 매혹적인 칵테일'이란 표현도 적절할 것 같다.

<술꾼의 품격>겉그림
 <술꾼의 품격>겉그림
ⓒ 씨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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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모두 6장, 스피릿, 위스키, 폭탄주, 맥주, 기타재제주, 칵테일로 나누어 들려준다. 제 3장 폭탄주 '대한민국의 밤엔 폭탄이 설치됐다'란 글은 우리의 폭탄주에 대한 이야기. 신학기면 종종 들려오는 대학가 신입생 파티에서 폭탄주 때문에 죽었다는 일련의 뉴스들이 단박에 떠오른 제목이다.

대한민국의 폭탄주와 섞은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2000년), '한국 최다 관객 동원'이라는 기록을 가진 <괴물>을 만든 그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이다.

이 영화에 폭탄주 돌리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단다. 한 번은 국문학 박사이면서 강의할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백수가 "교수가 되려면 학장에게 돈 1500만원 싸들고 가서 건네주면서 술 접대를 해야 한다"는 선배의 충고를 실천할 때, 또 한 번은 그 선배의 입을 통해 주인공보다 선수 쳐서 학장에게 돈 싸들고 갔던 한 친구의 얘기가 나올 때이다.

영화는 재현한다. 룸살롱에서 머리 하얀 학장이 맥주에 양주를 타서 잔을 돌려 회오리를 일게 하는 '회오리주'를 만든다. 그런 후 잔을 감싸 쥘 때 썼던 휴지를 벽에 내던진다. 이걸 양각에 클로즈업에 슬로우모션으로 그로테스크하게 연출한다는데, 솔직히 이 영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거의 실감이 나지 않는다. '비디오라도 빌려 볼까?' 마음이 술렁인다.

다음은 주인공 차례, 학장이 회오리주를 만드는 모습이 똑같이 그로테스크하게 리플레이 된다. 먼젓번에는 웃겼지만, 이번엔 조금 공포스럽다. 아닌 게 아니라 주인공도 똑같은 포즈로 오바이트를 한다. 하지만 술이 조금 더 셌던 탓에 그는 살아서 교수가 된다. 여기서 회오리주, 폭탄주는 뇌물거래가 성사됐음을 알리는 징표다. 맥주잔 속에 양주와 맥주가 섞여 돌면서 일으키는 거품의 회오리가 화면 가득 클로즈업 된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대가로 주어지는 찰나적인 쾌락을 은유하듯.-책속에서

첫 번째 술자리에 있었던, 즉 주인공보다 선수 쳐서 학장과 술자리를 했던 그 친구는 술을 못한다. 그런 그는 학장이 주는 회오리주를 다 받아 마시고는 취해서 지하철 철로 쪽으로 머리를 내놓고 오바이트 하다가 지하철에 치여 죽고 만다. 감독의 의도야 어떻건 이 사회는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해야만 출세도 하고 제대로 살 수 있는 것 같아 좀 씁쓸하다.

불쌍한 폭탄주! 이 영화 이후에도 폭탄주는 불명예의 행진을 계속해야 했다. 국회의원들이 폭탄주 마시고 추행하고, 폭언하고, 폭행하고…. 잊을만하면 되풀이되는 폭탄주와 관련된 사고들 때문에 국회에선 '폭탄주 소탕 클럽까지 만들어지고….곤욕을 치렀던 국회의원들에겐 성경의 한 구절이 절실할지 모른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술이 죄냐, 사람이 죄냐. 어려운 문제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언젠가부터 한국인들은 폭탄주를 죽어라고 마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 기억에 주변 사람들 증언 조금 보태면 폭탄주는 1980년대 중반에 군, 검찰에서 시작돼 1990년대 초반 정계와 언론계로, 1990년대 중반부터 일반 기업으로 퍼져나가 <플란다스의 개>에서처럼 강단까지 잠식했다. 누군가는 폭탄주가 군사문화의 잔재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룸살롱이 그 유행의 진원지라고도 한다. 다 일리가 있지만….책속에서

이어서 폭탄주의 장점과 단점, 영화 <플란다스의 개>와 폭탄주의 공통점 등이 분석된다. 그리고 '폭탄주의 맛을 살리려면', 즉 폭탄주 제대로 만드는 방법으로 맺는다. 저자는 소문난 술꾼이다. 술자리에서 멋진 폭탄을 보고 싶은 사람들은 참고해보는 것도 아마 좋을 듯.

장예모 감독의 <붉은 수수밭>(1987년)이야기도 새삼스럽게 재미있다. 1930년대 중국 산동성에서 고량주를 만들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니 <붉은 수수밭>과 섞어 들려주는 이야기는 당연히 고량주. 저자는 5천 여 가지에 이른다는 중국술의 명칭과 그 변천, 제조 방법과 유통, 중국술과 관련된 기인, 영화에 나오는 붉은 고량주의 진실 등을 들려준다.

사실 <붉은 수수밭>을 몇 번이나 봤다. 그런데도 <플란다스의 개>처럼 비디오라도 빌려 다시 볼까? 마음이 술렁인다. 저자가 그만큼 영화 이야기를 짧고 명확하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콕 집어 재미있게 들려주고 있기 때문 일거다. 장예모 감독은 왜 있지도 않은 붉은 고량주를 영화에 부었을까?

<붉은 수수밭>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우묵배미의 사랑> <개선문> <여인의 향기> <흐르는 강물처럼> <아메리카 뷰티> <질투는 나의 힘> <칵테일> 등, 책을 통해 다시 만나는 영화들이 새삼스럽고 반갑다. 다시 보면 훨씬 더 깊이 있게 남을 것 같다.

기독교 금주운동 단체의 여성들이 네이션을 지지하며 함께 다녔고, 네이션의 방식은 더 과격해져, 손도끼를 들고 술집을 부수러 다녔다. 1900년부터 10년 동안 그녀는 이 같은 파괴 행위로 30번 투옥됐다. 키 180cm에 몸무게 80kg의 거구인 그녀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관 네 명이 달려들어야 했다. 그러나 투옥을 거듭하면서 지지자가 늘어났고 그녀가 들고 다니는 손도끼가 기념품으로 팔려나가 그 수익으로 보석금을 지불하기도 했다. 술집에선 네이션을 닮은 모양의 술병을 만들어 술을 담았고, "캐리 빼고 모든 국가(네이션) 환영"이라는 팻말을 내걸었다.-책속 부록 중에서

부록 '극단적 금주운동가, 캐리 네이션'이란 글 한 부분이다. 네이션은 연설 도중에 쓰러져 65살에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죽은 후, 자신이 여왕이라는 환영에 사로잡힌 어머니의 여종 노릇을 하며 불행하게 자란 그녀의 과거사가 오페라로 제작되었으며 그녀가 살던 캔자스의 집은 사적으로 지정(1976년)됐단다.

맥주 칵테일, 에스프레소 콘 비라
내가 최근에 자주 마시는 맥주 칵테일을 하나 소개한다. 맥주에 에스프레소를 타서 마셔보라.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일단 마셔보라.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이걸 권해서 마시게 했더니, 싫다고 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우선 맥주는 에일보다 라거가 좋다. 커피향이 센만큼, 굳이 맥주 자체의 향이 풍부한 에일을 쓸 필요가 없다. 담백한 맛의 라거 맥주를 잔에 따르되, 조금 부족하게 따르라. 에스프레소는 맥주에 섞기 전에 식혀야 한다.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맥주에 바로 따르면 거품이 철철 넘쳐 흘러 잔에는 맥주건, 커피건 반밖에 안 남게 된다. 맥주를 따른 잔에 식힌 에스프레소를 붓는다. 에스프레소 양은 맥주의 5분의 1 정도로 하되, 취향에 따라 양을 조절하면 된다. 통상 맥주잔 하나에 에스프레소 싱글 3분의 2 정도를 부으면 된다. 차가운 맥주잔에 먼저 에스프레소를 조금씩 따라 식힌 뒤 맥주를 붓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걸 이탈리아에서 '카페 콘 비라', 또는 '에스프레소 콘 비라'라고 한단다.이 칵테일에선 잘 만든 흑맥주의 맛이 난다. 커피를 할까, 맥주를 할까 애매할 때 이것 한잔 마시면 딱이다. 구수하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맥주는 취하게 만드는 반면, 커피는 각성 효과가 있으니 취하는 것 같기도 하고 깨는 것 같기도 한 그 기분이란, 다만 많이 마시면 심장이 쿵쿵 뛰니 조심할 것-부록에서
이 책의 또 다른 재미 하나는 이처럼 술과 관련된 부록이다. 맛있어서 자꾸 집어 먹는 안주처럼 찾아 읽는 맛이 쏠쏠하다. 본문에도 특정 술과 관련된 에피소드나 관련 상식들이 다분하지만, 부록에도 알아두면 요긴하게 쓸 수 있고 이처럼 누군가에게 들려 줄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금주운동가 캐리 네이션 이야기 외에 미국에서 최초로 계엄령을 선포하게 한 위스키 반란,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 다키쓰루 마시타카'와 스코틀랜드 여자 '리타'의 사랑 이야기도 재미있게 읽었다. 맥주를 구별하는 '에일'과 '라거'에 대하여, 폭탄주 소맥 혹은 소폭, 럼과 발렌타인, 글렌피딕의 이모저모도 재미있게 읽었다.

<술꾼의 품격>에는 '애주가를 위한 책'이라는  공공연한 설명도 붙었다. 그런데 애주가뿐이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혹은 나처럼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이 책을 썩 맛깔스럽게 읽을 수 있으리라. 또 어떤 내용들이 있을까.

▲잭 다니엘스, 조니 워커, 바카디 등 술 상표로 귀에 익은 그 이름의 실제 주인공들은 어떤 시대를 어떻게 살았나? ▲라거 맥주와 에일 맥주의 차이는? ▲술에 '천사의 몫'이 있다? ▲우리가 위스키 원액을 만들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압생트는 왜 오랜 세월동안 환각물질이라는 누명을 써야만 했을까? ▲칵테일 마티니는 007 영화 때문에 제조방법이 바뀌었다? ▲한국에 양주 수입이 자유화되기 전 술집 진열대에 가득하던 기타재제주들은 지금은 어떻게 됐나 ▲칵테일의 어원은? ▲한국인들이 죽어라 마시는 폭탄주는 언제부터 누가?

덧붙이는 글 | 마법 같은 유혹과 위로, 25가지 술과 영화 이야기-<술꾼의 품격>|임범 (지은이) |씨네21 |2010-04-28|정가:12000



술꾼의 품격 - 마법 같은 유혹과 위로, 25가지 술과 영화 이야기

임범 지음, 씨네21북스(2010)


태그:#술, #영화, #폭탄주, #플란다스의 개,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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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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