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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두에 있는 두보초당
 청두에 있는 두보초당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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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궁에서 노자의 흔적을 찾아보고 두보초당으로 향했다. 35번 버스는 바로 두보초당 앞에서 내려 주었다. 시인의 초당은 한가로웠다. 5월의 신록이 우거진 두보초당은 대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리며 출렁거리고 있었다.

이태백(李太白)과 함께 중국 최고의 고전시인으로 일컫는 두보(杜甫 712-770)는 허난에서 태어나 20세에 중국을 보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중국을 유람하던중 두보는 744년 때마침 장안의 궁정에서 추방되어 산둥 성으로 향해가고 있던 이백과 뤄양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이백의 천재적인 풍격을 사모하던 두보는 이백과 함께 양송(梁宋 : 지금의 허난 성) 지방으로 유람을 떠났다. 여기서 이백 외에 시인 고적(高適)·잠삼(岑參) 등과도 알게 되어 함께 교우를 하며 시를 지었다.

그해 겨울 이백과 헤어진 두보는 강남(江南)으로 향했고 그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두보는 오랫동안 이백을 사모해서 종종 그를 꿈속에서 만나는 일도 있었는데 사흘 밤이나 계속해서 이백을 만나는 꿈을 꾼 후 지은 것이 〈몽이백이수 夢李白二首>란 시이다.

장안에 도착한 그는 약 10년 동안 과거시험에 급제하지도 못하고 관직도 얻지 못한 채 곤궁한 생활을 계속했다. 두보는 명사고관의 집을 드나들고 시문을 조정에 바쳐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했으나 임용되지 못했다. 754년 두보는 처음으로 금위군의 무기고 관리로 정8품 하(下)라는 가장 낮은 관직을 얻어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다.

'안사의 난'으로 기약없는 방랑길에 올라

그러나 755년에 일어난 안사의 난은 두보에게 또 다시 기약없는 방랑의 길을 떠나게 한다. '안사'라는 이름은 난을 이끌었던 '안녹산과 사사명'의 머릿글자를 딴 것이다. 양귀비에 빠진 당현종은 정치를 환관들에게 넘겼고, 환관과 외척들의 전횡과 부패속에서 제도와 관리들은 타락의 길을 걸어갔다. 환관과 외척들의 부패와 권력다툼은 안녹산에게 난을 일으킬 명분을 주게 되었다.

8년간이나 지속된 참혹한 전쟁으로 많은 농민들이 죽고 당은 쇠퇴기로 접어들게 된다. 이 전란으로 인구는 13년 전에 비해 890만호에서 293만호로 70%가 감소되었다. 597만호가 사라짐으로써 한 호당 5인 기준을 삼아도 3천 만 명이 넘게 죽었던 것이다. 이는 중국 역사상 가장 최악의 잔혹한 전쟁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春望(춘망)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조정은 망했어도 산하는 그대로요
城春草木深(성춘초목심) 성안은 봄이 되어 초목이 무성하네
感時花淺淚(감시화천루) 시대를 슬퍼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
恨別鳥驚心(한별조경심) 한 맺힌 이별에 나는 새도 놀라는구나
烽火連三月(봉화연삼월) 봉화불은 석 달이나 계속 오르고
家書抵萬金(가서저만금) 집에서 온 편지 너무나 소중하여라
白頭搔更短(백두소갱단) 흰 머리를 긁으니 자꾸 짧아져
渾欲不勝簪(혼욕불승잠) 이제는 아무리 애써도 비녀도 못 꼽겠네

신록이 우거진 두보초당. 두보는 이곳에서 4년간 기거하며 240수의 시를 지었다.
 신록이 우거진 두보초당. 두보는 이곳에서 4년간 기거하며 240수의 시를 지었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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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녹산의 난 때문에 백성들이 받은 고초를 보고 체험한 두보는 위와 같이 노래했다. 이 시에는 안녹산의 난이라는 전쟁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인간의 이기심이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결집되어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일시에 폭발하듯 나타나는 것이 전쟁일 것이다.  전쟁이 일단 터지면 모든 것은 전쟁의 단순 논리와 단순 생리로 진행된다. 철저하게 강자만이 살아남는 잔인하고 몰이성적인 처참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느 한쪽이 다 없어질 때까지 비인간적이고 적의 모든 것이 파괴되는 것이 전쟁이다.

그토록 수많은 인간의 목숨을 빼앗고 고통과 파괴를 요구하는 전쟁을 인간은 왜 지속하는 것일까? 과연 전쟁의 발생에 대한 신의 섭리는 무엇인가? 신은 왜 전쟁이란 비극에 대하여 침묵하는가?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신은 질투하는 것일까?

두보의 시 "춘망(春望)"에는 전쟁을 직접 보고 체험한 두보의 이러한 사상이 그대로 깔려있다. 그는 시를 통하여 전쟁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전쟁이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찢고 죽여 온갖 물건을 파괴해도 계절은 언제나 때 맞추어 나타나고, 초목도 그에 따라 질서있게 변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오직 인간만의 전쟁일 뿐이다.

두보는 꽃(花)과 새(鳥)들도 전쟁의 참상에 반응을 한다며 전쟁으로 꽃도 눈물을 뿌리고, 새도 놀란다고 했다. 조정이 정치를 잘 못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국토와 백성이 고통을 받는 시대를 슬퍼하며, 전쟁으로 가족과 생이별하는 인간의 한 맺힌 이별을 두보는 시에 담아냈다.

전쟁은 오직 인간만의 전쟁일 뿐

장안에서 청두로 피난을 온 두보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장안에서 청두로 피난을 온 두보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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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걱정, 나라 걱정, 자신의 건강과 장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흰 머리가 더욱 희어지고, 머리털이 빠져서 비녀도 꽂지 못하게 됨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결국 두보 자신도 전쟁으로 심신이 극도로 쇠락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안사의 난은 당조를 급속히 몰락시켰다. 낙양에서 반란군이 장안을 향해 물밀듯이 쳐들어오자 당 현종은 양귀비와 몇몇 측근을 데리고 쓰촨으로 도망갔다. 도망 중에 황제의 친위병들이 황실의 몰락이 양씨 일가 때문이라고 해 양귀비를 처형하려고 하자, 양귀비는 자살했다고 한다.

두보의 위패와 초상화를 모신 공부사
 두보의 위패와 초상화를 모신 공부사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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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9년 두보도 안사의 난을 피해 도토리를 주워 먹으며 청두로 피신을 왔다.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불리는 쓰촨은 장안과는 달리 문물이 풍부했다. 두보는 완화계(浣花溪)라 불리는 개울가 암자의 빈방에 정착을 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갔지만 마음은 평온하여, 시상은 끝없이 떠올랐다. 두보는 이 초당에서 4년 간 머물며 무려 240편의 시를 지었다.

현재 두보 초당은 약 20만㎡에 이를 정도로 넓다. 송, 원, 명, 청대를 거치면서 두보초당은 성역화 되어 대나무 숲이 우거진 멋진 정원을 이루고 있다. 두보의 초상을 모신 공부사(工部嗣), 청나라 건륭제가 친필로 하사한 소릉초당, 마오쩌둥의 지시로 만들어진 두보초당 회랑 입구의 '草當'이라는 글씨들이 눈길을 끈다. 권력자들은 속으로는 검은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처럼 비치고자 자신의 글씨를 남기고 있다.

두보초당 입구에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청두의 노부부
 두보초당 입구에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청두의 노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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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초당은 영화촬영지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 영화 <호우시절>이란 영화도 두보의 '춘야희우(春夜喜雨)'란 시의 구절에서 제목을 가져왔다고 한다.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중국 청두로 출장을 간 한 남자가 두보초당을 구경하다가 그곳에서 가이드를 하고 있는 미국 유학시절의 여자 친구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다.

대숲에 일렁이는 시인의 초당을 돌아보다 보면 누구나 시 한 수를 읊어지고 싶어진다. 초당 입구에 노부부가 미소를 지으며 평화롭게 앉아 있다. 온갖 시름을 잊고 소박한 모습으로 다정히 앉아 있는 그들에게서 초막에서 시를 짓고 있었을 시인 두보를 떠올린다. 전쟁은 저 노부부의 평화로움도 앗아갈 것이다. 어떻게 하든 전쟁은 피해야 한다.

(2010.5.9 청두 두보 초당에서 뉴스게릴라 찰라)


태그:#두보, #두보초당, #청두, #쓰촨성, #춘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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