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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분홍병사>를 봤습니다. 거대한 스펙터클, 화려한 조명과 무대장치가 돋보이는 작품은 아닙니다. 학전의 작품들은 브로드웨이식 '물량공세'가 돋보이는 작품들이 아닙니다.지금까지 극단 학전이 보여준 <지하철 1호선><의형제><모스키토>등은 유럽식 소극(Farce)입니다. 소극이란 중세부터 서민들이 주체가 되어 기존 정부 관리들을 비꼬거나,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풍자를 우스꽝스럽게 풀어내던 연극을 의미합니다.

 

<지하철 1호선>도 독일 뮤지컬을 빌려, 당대 한국의 사회정치적 속살을 드러내는 작업이었듯, 이번 <분홍병사> 또한 프랑스 뮤지컬을 도입, 한국적인 변용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연극이 시작되면 마트의 장난감 코너에 홀로 남은 푸름이가 게임기에 몰입하는 장면부터 나옵니다. 이후 진열대에서 살아 움직이며 무대로 나오는 장난감들을 만나며 생기는 이야기, 이것이 큰 줄거리입니다.

 

 

마트의 장난감들은 우리 시대의 단면들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자신이 외롭지 않기 위해, 주변 장난감들이 팔리지 못하도록 가격표들을 비싸게 바꾸는 '바코드', 남자아이는 분홍을 좋아하지 않고 여자아이는 총을 좋아하지 않아 아무도 사지 않는 '분홍병사', 아시아의 대형공장에서 밤낮으로 만든 헝겁인형 '메이드 인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주인공 푸름이와 분홍병사와의 만남, 장난감들을 통해 배우는 세상의 단면들은, 어른세상이 싫어 장난감 가게에 스스로 갖히기 원한 푸름이에겐 여전히 낯설고 기괴한 세상입니다.

 

프랑스의 작곡가 루이 쉐디드와 작가 피에르 도미니크 뷔르고가 만든 <le Soldat Rose>를 번안한 <분홍병사>는 감미로운 노래속에, 우리 시대의 풍자를 담습니다. 프랑스 작품과 한국적 번안이 교차하면서, '우리 모두 동일한 상황 속'에 놓여있음을 말해주기에, 내내 공감과 울림의 크기가 큰지도 모르겠습니다. 중국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지는 저가 공산품들은 세계의 모든 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분홍과 청색으로 대변되는 여아와 남아의 선호색은 여전히 변화없이 성차에 기반한 차별과 인식을 만들어냅니다.

 

 

경영학 개념 중에 소비자 사회화(Consumer Socialization)란 개념이 있습니다. 기업이 세대를 거듭하며 물건을 제조하고, 이 물품을 통해 소비자들과 정신적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자연스레 기업의 가치와 철학에 동조하게끔, 사회화 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월트 디즈니를 비롯한 아동용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기업들은 철저하게 이 전략을 사용하지요. <라이온 킹>과 같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가부장적 질서의 안정을 이야기하고, <신데렐라>를 통해 성차에 기반한 시각을 세뇌시키는 것 또한 기업의 소비자 사회화와 연결됩니다.

 

예전에는 엄마라는 존재를 통해 '소비'에 눈을 떴지만, 이제 아동들은 주체적으로 소비하는 인간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걸 가장 부추긴 것도 기업이지요. 마트에 놓인 수많은 장난감들, 아동용 특화 상품들은 저열한 상업주의에 물들어, 아이들의 건강이나 정서적 영향은 고려하지 않은 채, 시장을 침탈하고 있습니다.

 

 

뮤지컬 <분홍병사>는 따스한 아날로그 감성을 입힌 성인을 위한 동화입니다. 가족의 소중함이란 기존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것도 뭐 그리 지루하진 않습니다. 루이 셰디드의 음악 중 <아인슈타인>이란 곡이 나오는데요. 가사가 좋아 일부 발췌합니다.

 

"그래 발명가가 된다는 건 절대 쉬운 게 아닌가 봐. 모든 게 벌써 다 발명 돼 있지. 우주선, 핸드폰에 초코 아이스크림까지. 탐험가도 되지 마."

 

이 노래가 유독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미 나올 건 다 나왔다는 식의 발언들, 더 이상의 창작논리나 상상력은 한계에 부딪쳤다는 말이 등장할 때마다, 그런 말에 가장 상처를 받을 이들은 어린 아이 중 '아인슈타인'이 될지도 모를 새싹들은 아닐까 하고요.

 

상상력을 불어넣는 장난감이라고 한쪽에선 광고를 하고, 또 다른 한쪽에선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는 세대라고 잔혹한 논평을 내놓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약삭빠른 이들이 보여주는 행태란, 기존 권력에 철저하게 빌 붙고 그들의 부정에 함구하는 일이겠지요. 무대 속 세상이 그저 무대 속 만의 문제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유입니다.

덧붙이는 글 | 뮤지컬 <분홍병사>는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4월 29일부터 6월 27일까지 공연합니다.


태그:#분홍병사, #김민기, #극단 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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