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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명에 달하는 이들이 지금 감옥에 있다. 엄청난 숫자다. 2007년 9월 노무현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백지화되어 버렸다. 노무현 정부 말기에 국방부 장관을 지냈고, 이후 한나라당 비례대표 자리를 받아 국회의원이 된 김장수가 자신이 장관 재임 시절 결정한 것을, 한 나라의 국방부가 결정한 것을 이렇게 뒤집으면 어떻게 하냐고 따질 정도로 무책임한 일이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2000년대의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였지만, 어느덧 우리의 머릿속에서 잊혀지고 있다.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병역거부자들의 감옥행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국제인권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지난 4월 15일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는 병역거부자들을 계속 처벌하고 있는 한국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유엔의 문을 두드린 11명의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개인청원 결정을 통해서이다.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는 한국 정부가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벌을 즉각 중단하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UN, 병역거부자 처벌 중단·즉각적인 대안 마련 권고

지난 6일 평화박물관에서 열린 UN 자유권규약위원회의 병역거부 구제조치 권고에 따른 기자회견
 지난 6일 평화박물관에서 열린 UN 자유권규약위원회의 병역거부 구제조치 권고에 따른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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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유엔의 결정을 이끌어낸 11인, 오태양을 비롯한 정의민, 염창근, 나동혁, 유호근, 임치윤, 최진, 임태훈, 임성환, 임재성, 고동주는 불교, 천주교 등 주류 종파의 종교적 신념이나 반전평화 등의 정치적 신념을 이유로 병역거부를 선택했다. 이들은 지난 6일 평화박물관에서 UN 자유권규약위원회의 발표에 대한 기자회견을 가졌다.

11인을 대리해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에 개인청원을 신청한 오재창 변호사는 "2006년 12월 4일 여호와의 증인 최명진, 윤여범씨에 이어 또 다시 이어진 유엔의 결정을 통해 이 문제가 '양심의 자유'라는 인권을 침해한 것"임이 증명되었다고 말했다.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의 '개인청원'이란, 한 국가에서 모든 권리구제 절차를 밟았음에도 해결되지 않는 사안에 대해서 개인이 직접 자유권규약위원회에 청원할 수 있는 제도이다. 병역거부 이전에도 권리를 침해받은 다양한 사건들이 개인통보를 통해 국제사회의 도움을 요청했다. 1993년 김근태 의원의 국가보안법 관련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에도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는 김근태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형사처벌한 것은 규약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며 한국 정부에 구제조치를 요구했다.

이번 결정에서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는 국방부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위원회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한국 정부의 의견 역시 함께 검토하기 때문에다. 이는 사실상 '국가안보'의 언어에 포섭되어 있는 우리 사회의 통념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체복무 인정했을 때 부작용 발생, 근거 없어

먼저 국방부는 병역거부를 인정하면 병력수급에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 이야기했다. 병역거부자들의  감옥행을 멈춰 달라고 하면, 언제나 가장 먼저 나오는 질문은 바로 "그럼 나라는 누가 지키느냐?"이다. 이에 대해 위원회는 이렇게 말했다.

"…본 위원회는…지금껏 강제 징병제를 유지해오던 나라들 중 대체복무를 도입하는 국가가 늘고 있다는 것과, 해당국가가…당사자의 권리를 온전히 존중하였을 때 대체복무와 관련해서 해당국가가 어떠한 특정한 손실이 있게 될 것인지 보이지 못했던 점들을 주목하였다."

즉, 이미 수많은 나라에서 병역거부자들의 권리가 지켜지고 있지만 한국 국방부가 말하는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병역거부자들에게 다른 방식의 '복무'인 대체복무를 인정했을 때 생길 것이라 두려워하는 '손실'은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판단이다.

이는 대체복무의 본질을 알고 나면 쉽게 수긍할 수 있다. 병역거부자들의 감옥행을 멈출 수 있는 대안으로 논의되는 대체복무제는 병역 의무를 다른 방식으로 수행하겠다는 것이다. 특권이나 면제가 아닌 형평성을 맞춘 복무이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 시행되고 있는 의무 소방관이나 경비 교도대 같은 경우가 해외에서 총을 들 수 없는 신념을 지닌 이들이 행하는 대체복무이다. 아무도 의무 소방관으로 복무한 이들에게 병역기피자라고, 나라는 누가 지키느냐고 말하지 않는다.

'병역거부'라는 단어 앞에 이성이 마비된 채 비난의 언어를 퍼붓지만, 이들의 요구는 생각보다 합리적이다.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이 문제의 대안으로 나온 대체복무 조건은 다음과 같다. 복무기간은 현역 복무기간의 2배, 복무조건은 합숙생활이고, 난이도는 사회복무 분야 중 최고난이도의 업무로 배치하겠다고 명시했다. 다들 대체복무로 '빠질' 것이라 말하지만, 실제 제도가 시행되면 미달될 가능성이 농후한 복무 조건이다.

분단국가의 특수성, 그러나 인권은 존중돼야 한다

지난 6일 평화박물관에서 열린 UN 자유권규약위원회의 병역거부 구제조치 권고에 따른 기자회견에서 조정의민씨가 울먹이며 말을 잇고 있다.
 지난 6일 평화박물관에서 열린 UN 자유권규약위원회의 병역거부 구제조치 권고에 따른 기자회견에서 조정의민씨가 울먹이며 말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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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국방부는 분단국가라는 특수성을 이야기하며 병역거부가 인정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역시 국제인권의 권위자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위원회는 분단이라는 특수한 이유로 일정한 권리 제한이 불가피하다고 해도 "제한은 바로 그 권리의 정수(the very essence of the right)를 손상시켜서는 안"되며, 병역거부권은 그 본질에 속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어쩔 수 없이 병역거부권이라는 인권을 '유보'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인권이란 그러한 조건에서도 지켜져야 하기 때문에 인권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병역거부는 분단 정도가 아니라 실제 전쟁을 치르고 있는 한 가운데에서 인정되어왔다. 1차 세계대전 중에 병역거부를 인정한 영국이 대표적이다.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병무청장이었던 허시 장군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민주주의에 대한 실험이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소수자의 권리들을 보존하기에 충분한지 알아내기 위한" 척도라고까지 표현했다. 분단 상황이기 때문에 안 된다가 아니라, 그럼에도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위원회는 한국정부에게 앞으로 이와 같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하며, 보상 등을 포함한 실질적인 구제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 결정 이후에도 현재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에서 한국 병역거부관련 진정은 500여 건이 추가로 논의되고 있다. G20 유치니 '국격'이니 이야기하지만, 이 정도의 사안이 국제사회에서 논의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이명박 정부는 모르는 듯하다.

한국 정부는 180일 이내에 관련된 조치를 취하고 이를 위원회에 보고해야 한다. 한국 정부가 국제 사회에서 어떤 위상을 가질 수 있을지가 확인되는 시간일 것이다.

성역화된 병역과 군대에 대한 비판적 언어 부재

우리나라 병력 규모는 세계 6위이다. 지난 60년간 거대한 징병제가 유지되어 온 덕택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한 징병제가 제대로 된 비판 한번 없이 유지되어온 사회는 없다. 성역화된 병역과 군대는 수많은 인권유린과 사회적 차별의 온상이지만, 이에 대한 비판적 언어는 부재했다.

군가산점이나 병역거부 관련한 사안이 이를 증명한다. 헌법재판소에서 군가산점과 관련하여 "국가가 아무런 재정적 뒷받침 없이 제대군인을 지원하려 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여성과 장애인 등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을 초래한다는 것을 확인"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도 "억울하면 군대 가라"와 같은 감정적 대응 속에서 압도당하는 상황이다.

병역거부 역시 마찬가지다.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말이나 되냐는 야유에 대해서 독일을 비롯한 포르투갈(제41조 5항), 스페인(제30조 2항), 러시아(제28조) 등의 수많은 나라 헌법에 병역거부가 명문화되어 있다고 답변하는 것도, OECD국가 중에서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는 우리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 어떤 사실도 "나는 가는데 왜 너는 안 가냐"라는 분노 속에서 배척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역거부자들을 계속 감옥에 가두는 것으로 이 분노가 해결될 수는 없다. 여성 대 군필자로, 병역거부자 대 군필자로 만들어지는 거짓 대립에 숨어있는 이들이 바로 이 분노를 해결해야 할 책임을 가진 주체이다. 수많은 이들의 정신적, 신체적 상처를 치유하고 보듬어야 할 의무는 분명 그들을 무자비하게 동원했던 국가의 몫이다. 그러나 국가는 이 분노에 찬 대립을 통해서 자신의 책임을 피하면서도 '동원'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장려하는지도 모르겠다.

천안함 희생자들을 영웅으로 호명하고 태극기에 쌓인 성금을 유가족들에게 안기며 덮으려 하지만 결국 본질은 국가의 동원에 의한 민중들의 억울한 희생이다. 유가족들이 가장 원하는 '진실'은 여전히 가려져 있다.

병역거부자들 역시 군사정권 시절 군대 내부에서 숱한 구타와 고문으로 죽어갔다. 지금까지 수감된 병역거부자들은 1만 5000여 명이 넘는다. 더 이상의 감옥행은 그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 부디 이제는 고통과 희생이 멈추었으면 한다.


태그:#병역거부,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 #개인통보,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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