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레프도진의 <바냐 아저씨> 중 바냐아저씨와 의사 아스트로프
▲ 레프도진의 <바냐 아저씨> 중 바냐아저씨와 의사 아스트로프
ⓒ LG아트센터

관련사진보기


체홉은 귀신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홉, 그가 쓴 <바냐 아저씨>가 연극무대에 올랐다. 연출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말리극장의 레프도진. 이미 한국에서 2번 내한공연을 했다. 세계적인 연극연출가 피터 브룩조차도 그를 가리켜 차분하게 내면의 진피를 벗기는 연출가라고 추켜세우지 않았던가. 레프도진은 인간에 대한 체홉의 관점을 명징한 연출언어로 투과시켜, 무대위에 세상을 향한 목소리의 집을 짓는다.

이번 <바냐 아저씨>는 안톤 체홉이 1889년에 쓴 <숲의 정령>을 개작한 작품이다. 체홉은 20세기가 낳은 러시아 최고의 단편 작가이자 극작가이며 또한 의사였다. 그는 자신이 잉태시킨 모든 작품에서 '의사'로 분한다. <세자매>와 <벚꽃동산> <갈매기>등 그의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인간의 내면을 처절하게 통찰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다. 체홉은 '내게 있어 의학은 아내요, 문학은 시녀다'라고 말했다. 그는 의사로서, 당대 장원에 묶여있던 재정러시아 시대의 농노들과 사회체계에 대해 '치유적' 글쓰기를 내놓는다.

레프도진의 <바냐 아저씨>중 바냐와 엘레나
▲ 레프도진의 <바냐 아저씨>중 바냐와 엘레나
ⓒ LG아트센터

관련사진보기


바냐 아저씨-삶은 광폭하다

연극이 시작되면 4개의 문을 통해 들어오는 각각의 인물들이 보인다. 흔들의자에 앉아 유모 마리나와 대화를 하는 의사 미하일 아스트로프, 술에 취한 채 들어오는 바냐. 무대는 세레브랴코프의 영지다. 그는 퇴임한 예술학 교수다.

세레브랴아코프와 아내 엘레나가 오고부터 집안 분위기가 흐트러진다. 식사시간도 일정치 않고 온종일 신경통과 관절염에 시달리는 교수의 응석을 받아주느라 모두 밤잠을 설친다. 전에는 열심히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던 바냐 아저씨와 소냐, 모두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바냐와 아스트로프는 무위도식하는 교수 부부를 비난하면서도 아름다운 엘레나에겐 은근한 사모의 정을 품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일마저 팽개치고 그녀와 말을 할 기회를 엿보느라 정신이 없다. 마음씨 착하고 순진한 소냐 역시 의사에게 반하여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기회를 노리지만 의사의 마음 속엔 온통 엘레나만 있다. 줄거리는 이 정도에서 그릴란다. 이 연극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끌어가는 극이 아니다. 밀폐된 공간을 중심으로 자리한 9명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연극이다. 그들의 마음 속 풍경은 현실의 우리를 재발견 하게 한다.

바냐 아저씨 중 엘레나와 세레브랴코프
▲ 바냐 아저씨 중 엘레나와 세레브랴코프
ⓒ LG아트센터

관련사진보기


극을 이끌어가는 인물을 딱히 주인공 바냐라고 규정하기도 어렵다. 하나같이 극 속의 인물들은 그 성향과 삶의 태도에 있어, 관객 모두의 내면에 잠재된 '인간의 모습'을 그리기 때문이다. 퇴임한 예술학 교수 세레브랴코프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 상황의 은유이며 극 중 인물이 살고 있는 사회다.

바냐 아저씨는 그를 존경하며 수십년을 외로운 영지에서 하찮은 일들을 처리하며 자신의 꿈을 포기했다. (그렇게 말해도 될만큼 바냐는 섹시하고 매력있는 캐릭터이며 지적 능력도 갖추고 있다) 이 연극은 그만큼 과거로 돌아간다면 '내가 이 정도는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는 이들에게 현실을 바로 보게 하는 힘이 있는 작품이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삶은 지속된다

의사 아스트로프는 바로 작가 체홉이다. 그는 엘레나에게 숲을 보호해야 한다며 역설한다. 극의 이면을 살펴보면 아스트로프가 말하는 숲은 '더불어 숲'을 구성하며 살아가지만, 그 어떤 혜택도 사회를 통해 얻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소처럼 일을 하면서도 대가를 얻지 못했던 재정 러시아의 농노들이나, 일상에 찌들려 사는 우리들의 초상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의사로서 사회를 치유하고 싶었던 체홉은 아스트로프로 분해, 현실사회를 상징하는 세레브랴코프의 관절염을 치료하려 노력한다. 비록 공허한 주장에 지나지 않지만 극을 통해서라도, 개선의 여지를 만들어보려한 체홉의 마음이 느껴진다.

바냐 아저씨 중 엘레나와 소냐
▲ 바냐 아저씨 중 엘레나와 소냐
ⓒ LG 아트센터

관련사진보기


연출가 레프도진은 '속도전'에 지친 세상일수록 연극은 '느리게'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뒤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곧 지치고 엉킨 우리의 내면을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연극이 수많은 연희장르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힘겨운 생명력을 지속하는 것은, 배우의 현존이,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내가 여전히 이 버거운 생의 현장에서 숨의 그네를 타고 있음을, 명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가 증오스러울 때, 사실은 그의 모습속에서 나 자신의 '감춰진 추악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란다. 연극을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던 것은, 극 속 인물들의 내면이 내 모습과 겹쳐서가 아니었을까?

바냐 아저씨 중 바냐와 엘레나
▲ 바냐 아저씨 중 바냐와 엘레나
ⓒ LG 아트센터

관련사진보기


무대를 보면 4개의 큰 볏단이 집 위에 놓여있고,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볏단이 아래로 내려와 책상에서 일을 시작하는 소냐와 바냐 아저씨를 감싼다. 마치 집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따스하게 둘을 감싼다. 현실세계의 무거움 속에서도 여전히 해야할 일의 몫이 있다는 것, 그들에게도 쉴 생의 공간이 있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오랜만에 좋은 작품을 봤다. 절제된 감정 속에 흐르는 침묵. 안톤 체홉의 인간에 대한 사유를, 무대에 풀어내는 레프 도진은 이번에도 가슴 속에 긴장과 침묵을 연결하는 영혼의 방점을 찍는다. 놀랍다.

* 본 공연 <바냐 아저씨>는 5월 5일부터 8일까지 LG 아트센터에서 상연됩니다.


#레프도진#안톤 체홉#바냐 아저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