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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레네의 한구석에 자리 잡은 사화산에 움푹 파인 한가운데 지어진 에르미타이다.
▲ 산타 마르그리드 데 라 꼬트(santa margarid de la cot) 피레네의 한구석에 자리 잡은 사화산에 움푹 파인 한가운데 지어진 에르미타이다.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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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점점 따사로워지고 곧이어 봄이 스페인의 북부 피레네 산맥에도 찾아오는가 했더니, 차가운 바람에 눈송이가 날리기 시작했다. 변덕스러운 날씨 앞에 우리는 늘 무기력한 존재들일 뿐이다.

우리의 목표물은 산타 마르그리드 데 라 꼬트(santa margarid de la cot). 피레네의 한구석에 자리 잡은 사화산에 움푹 파인 한가운데 지어진 에르미타이다.

산 중턱에서 만난 당나귀.
 산 중턱에서 만난 당나귀.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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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중턱에는 당나귀 한 마리가 서성이고 있었다. 길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영역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세바스티안이 당나귀에게 풀 한 움큼을 뜯어주었다. 그것을 맛있게 입으로 받아먹은 당나귀가 우리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기원전 어느 때인가는 절대 꺼질 것 같지 않은 불길을 내뿜다가, 중세의 어느 시점엔 에르미타 수도자들이 살았고, 지금은 한 사진사가 에르미타를 찍기 위해 사화산 한가운데 서 있다. 에르미타를 둘러싼 둥그런 지형은 마치 제주도의 성산일출봉을 연상시켰다.

잔잔하게 내리던 눈은 소리 없이 세상을 하얗게 덮어 놓았다. 우리는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멀찌감치 떨어져 에르미타 주위를 맴돌았다. 뒤늦게 찾아온 피레네의 눈, 아마도 이 여행의 마지막 눈이리라. 밀가루처럼 고운 입자의 눈으로 주위는 더욱 신비로운 빛을 자아내고 있었다. 지구의 반대편 어느 곳에는 뜨거운 햇볕의 여름이고 또 어느 곳에서는 따사로운 봄바람이 사람들 가슴을 들뜨게 하는데 아직 피레네는 겨울을 보낼 준비가 안 된 모양이었다. 저마다 자신이 속한 환경 안에서 이런저런 현상들을 겪는다.

핀홀카메라의 사진사, 행운을 만나다

눈덮힌 에르미타 익스프레스.
 눈덮힌 에르미타 익스프레스.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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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홀카메라의 단점을 말하자면, 사진사가 뷰파인더 안에 담기는 피사체를 미리 관찰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세바스티안은 경사진 지형 위에서 수도 없이 위치를 바꾸며 거리를 재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해에는 에르미타들을 너무 멀리서 찍은 느낌이 들어."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사진사는 점점 초조한 듯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좋은 사진을 건져야 해, 내일이면 이 얇은 눈의 켜들이 사라질 거야."

때늦은 눈을 만난 건 정말이지 행운이었다. 석양빛이 하얀 눈밭 위에 고스란히 반사되고 있었다. 어두워서 사진을 찍을 수 없을 때까지 우리는 분화구 주변을 맴돌았다. 따라오던 당나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눈이 쌓인 산속에서 자동차의 수평을 맞추는 일만큼 성가신 일은 없을 것이다. 에르미타 익스프레스의 수평을 맞추려 하자 얇게 쌓인 눈에 미끄러져 차가 계속 왼쪽으로 기울었다. 나무 블록과 돌멩이를 대고 가까스로 수평을 맞췄다.

새벽을 깨운 양떼.
 새벽을 깨운 양떼.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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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하고 긴 밤이 시작되었다. 깜깜한 하늘이 에르미타 익스프레스를 금세 덮어버렸지만 눈의 하얀 빛이 주위를 환하게 밝혀주었다. 어둠 속에서 우리를 소란스럽게 깨운 것은 몽실몽실한 털을 덮은 양떼들이었다. 양치기 개 두 마리가 수십 마리의 양들을 몰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아직 눈이 녹지 않았어, 새벽의 첫 번째 빛으로 에르미타를 어서 찍으라고!"

하얀 눈밭을 지나는 양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밤새 눈은 더욱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차가운 눈이라 할지라도 곧 찾아올 한낮의 햇살이 모든 것을 앗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진사 세바스티안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는 눈을 보고 감격했는지 쏜살같이 점퍼를 걸치고 카메라 장비를 꺼내 밖으로 나갔다. 동트는 새벽의 첫 사진을 찍었다.

이 세상 모든 객체들을 위해 소원을 빌다

분화구에 놓인 santa margarid de la cot.
 분화구에 놓인 santa margarid de la cot.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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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강차를 끓여 보온병에 담은 뒤 밖으로 나갔다. 스페인의 피레네 산맥의 한 귀퉁이, 분화구의 동트는 아침, 작은 에르미타. 성산 일출봉에 올라 떠오르는 둥근 해를 바라보며 소원을 빈 적이 있었다. 그때는 여름이었고 봉우리 위에는 초록 풀들이 이슬을 머금은 채 햇빛을 받아 윤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때의 뺨으로 느껴지던 바람과 향기, 그 모든 분위기들이 되살아났다. 그런데 나는 그때 어떤 소원을 빌었더라? 그것만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 스페인의 피레네는 아직도 겨울의 공기를 머금고 있다. 윤기나던 풀들 대신 새하얀 눈이 동트는 새벽의 빛을 두 손 안에 모으고 있고 따사로운 여름 향기 대신 하얀 입김이 숨을 내쉴 때마다 시야를 감싸고 있었다. 왠지 다시 한번 소원을 빌고 싶어졌다. 어쩐지 지금 무언가를 강하게 바라면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항상 바뀌는 나의 개인적인 소원들은 늘 시간이 지나면 의미를 잃고 잊히기 마련이다. 그러면 어떤 의미 있는 소원을 빌어볼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한 후 나는 이 여행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과 동물들, 낯선 장소에서 삶을 영위하는, 어쩌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객체들을 위해 소원을 빌어보기로 했다.

이 세상 하찮은 만남이란 없는 것이다. 이 넓고 넓은 우주 한가운데, 지구라는 작은 행성, 그 작은 행성에 무수히 살아가는 생명들, 그리고 같은 시간대를 지나는 우리들. 거대한 인연의 끈으로 묶인 소중한 이들, 그것이 풀 한 포기를 더 얻어먹기 위해 따라오던 당나귀일지언정 그것은 소중한 만남인 것이다. 그 많은 만남과 시간의 둘레를 늘 함께할 수는 없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 아닐까?

'이 세상 그 누구이건, 어느 곳에 있건,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은 자신을 행복하게 지켜갈 수 있기를, 외로움과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를….'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지은경 기자는 지난 2000~2005년 프랑스 파리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최근 경상남도 외도 전시 기획을 마치고 유럽을 여행 중입니다. 현재 스페인에 머물고 있으며, 미술, 건축, 여행 등 유럽 문화와 관련된 기사를 쓸 계획입니다.

사진작가 세바스티안 슈티제가 핀홀 카메라로 찍은 에르미타(ermita) 등 다양한 사진을 만나보시려면 세바스티안의 홈페이지(www.sebastianschutyser.com)를 찾아와 보시기 바랍니다.



태그:#에르미타, #에르미타 익스프레스, #세바스티안, #피레네, #산타 마르그리드 데 라 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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