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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년, 캔버스에 유채, 158.8* 125.5cm,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611년, 캔버스에 유채, 158.8* 125.5cm,
ⓒ 카포티몬테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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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유디트의 승리>를 봤습니다. 유디트는 성서에 나오는 인물이죠. 서양 미술사엔 그녀를 모델로 한 그림작품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흔히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매력적인 여자를 일컫는 '팜므 파탈'의 원조로서, 화가들이 그녀를 그린 탓입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를 소개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버전이 제일 좋습니다. 강렬한 매력이 저를 이끕니다.

1593년 로마에서 태어난 아르테미시아는 화가였던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우며 자연스레 화가로 성장합니다. 19세 되던 해, 스튜디오의 또 다른 스승이자 아버지의 친구인 타시에게 강간을 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죠. 강간사건은 법정소송으로 이어지며 타시는 죄의 대가를 치릅니다만, 화가는 가슴에 상처를 안고 피렌체로 이주해 살아야 했습니다. 결혼 후 그녀는 자신의 내면 속 상처를 치유라도 하듯, 유디트를 여러 점 그림으로써, 자신을 강간한 타시를 처절하게 죽이죠.

베튤리아를 정벌한 터키제국 군인들의 학정
▲ 오페라 <유디트의 승리> 중 베튤리아를 정벌한 터키제국 군인들의 학정
ⓒ 충무아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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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 오페라 <유디트의 승리>는 바로 그림 속 세계를 무대로 끌어들여온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아시리아왕 네부카드네자르(한국판 성경에는 앗수르의 느부갓네살 왕이라고 쓰여있어요)의 '보복성 침략'을 이야기의 축으로 삼고 있습니다. 자신이 벌인 전쟁에 파병을 거부한 나라를 전쟁 후 침략으로 응징한 것이죠. 이라크 파병을 둘러싼 미국과 관련 우방국들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작품에선 군사행동이란 직접적 행동으로 보복을 하지만, 현재는 관세를 비롯한 비 가시적 속성의 경제관행을 통해 제재를 할테니까요. 사진 장면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베튤리아 성에 적장 홀로페르네스가 침략, 파괴하는 장면입니다. 지명의 뜻을 새겨보면 극의 의미가 실제 역사가 아닌, 하나의 알레고리처럼 느껴집니다. 유디트는 이스라엘을, 히브리어로 베튤리아는 하나님의 집을 의미하니까요. 결국 성전을 지키기 위한 헌신이란 주제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만나러 가는 유디트
▲ 유디트의 승리 중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만나러 가는 유디트
ⓒ 충무아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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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튤리아에 사는 과부 유디트는 고향을 위해 목숨을 걸기로 마음을 먹고 하녀와 함께 적장의 처소로 찾아갑니다. 빛나는 아름다움을 무기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유디트, 술에 취해 쓰러진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그녀. 그의 목을 잘라 앗시리아의 군대 앞에 내놓자, 군대는 혼비백산 퇴각하고, 고향에는 평화가 돌아옵니다.

이야기 구성은 단선적입니다. 복선이나 다른 극적 장치는 개입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유디트를 소재로 수많은 문학과 연극, 오페라에 이르는 작품이 만들어졌던 걸까요?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는 비발디
▲ 작곡가 비발디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는 비발디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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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 오페라 <유디트의 승리>는 안토니오 비발디의 작품입니다. 인물의 탐미적인 말솜씨와 섹슈얼리티가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지 극에 몰입해 듣다보면, 비발디란 천재 작곡가의 역량을 알 수 있습니다. 오페라 대본은 라코포 카세티가 썼습니다. 1716년 당시 그리스섬을 점령한 오스만 투르크에 맞서 베니스와 독일이 합종하여 함께 전쟁을 일으켰고 승리했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였죠. 결국 오페라 <유디트의 승리>에서 유디트는 베니스를, 홀로페르네스는 터키제국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오페라의 속살을 들여다 보면 정치적인 메타포로 여성의 아름다움과 섹슈얼리티를 사용한 것이죠.

유디트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홀로페르네스
▲ 유디트의 승리 중 유디트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홀로페르네스
ⓒ 충무아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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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유디트의 승리>를 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요. 극의 출연자 전원이 여성이란 점입니다. 저는 1막이 끝나고 인터미션 시간에 쉬면서 빈 무대를 쓱 훑어보며 생각에 빠졌는데요. 포악하고 잔혹할 것 같은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맡은 메리 엘렌 네시의 서정적인 목소리는, 극의 끝부분, 그의 죽음을 오히려 슬퍼하게 만들 정도지요.

그러면 여기서 궁금증이 생길겁니다. 왜 출연자 전원이 여성일까요? 1703년 비발디는 베네치아에 있는 한 고아원에서 바이올린 교사로 일을 했습니다. 음악교육으로 명성이 높던 이곳은 여자 아이들만 수용한 터라, <유디트의 승리>를 초연할 때도 여자들만 등장하게 된 것이죠. 하긴 우리에게도 예전 여성국극이 있었잖아요. 제가 기억하기론 여성이면서 남성 역할을 맡은 분들은, 뭇 여성들의 애정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더군요.

오페라 공연 중 울려퍼지는 챔발로 소리에 영혼의 공명판이 올렸습니다. 귀가 자꾸 그 소리의 속살에 접촉하려는 듯, 챔발로의 명징한 음색이 좋았습니다.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인 피에르 루이지 피치가 이번 작품의 연출을 맡았습니다. 이 분에 대해서는 세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195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작품을 500여 편 연출하신 오페라 연출의 귀재이자 살아있는 거장입니다. <유디트의 승리>는 바로크 오페라입니다. 즉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가장 완벽하게 무대에서 재현한 작품인 것이죠.

삶과 기로의 고민에 선 유디트
▲ 유디트의 승리 중 삶과 기로의 고민에 선 유디트
ⓒ 충무아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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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의상도 연출자가 직접 개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복식사를 하는 저로서는 의상에 눈이 절로 갔습니다. 바로크는 종교적 패권주의에서 벗어난 인간이, 향락과 사치의 개념을 도입하며 가장 화려한 미감을 복식에 적용했던 시대입니다. 스커트 내부에는 버팀대인 베르튀가댕을 넣어서, 힙의 양쪽으로 풍성하게 퍼지는 실루엣을 자랑했습니다. 유디트의 가슴을 보면, 앞가슴과 배에 빳빳하게 직물과 패드를 넣어 브이자 형태의 장식판을 만들어 붙인 것이 보일 겁니다. 이것을 복식사에서는 스토마커(Stomacher)라고 하는데요. 겉은 견직물에 자수와 보석을 달아 화려함의 극치를 보였습니다.

이제 다시 본질적인 질문으로 들어가야 겠습니다. 왜 유디트란 소재가 남성들에게 지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을까? 남성을 파멸시킬 만큼 강렬한 독, 중독성의 매력이 있는 여자의 존재는, 실재로는 사회적 존재인 남성들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흔히 우리가 요부라고 부르는 이미지들은 결국 남성들이 후세에 자신의 입장을 투사해 만든 것에 불과하지요.

'여자에게 가는가? 그렇다면 회초리를 잊지 말게'라고 충고한 철학자 니체. 여성에 대해 갖는 남성들의 원초적인 두려움이 이면에 드러나는 말입니다. 시대와 권력의 양상에 따라, 항상 여성들은 자신의 몸으로 항거해 왔고, 여전히 사회적 기득권자인 남성들은 매력적인 유희의 대상으로 요부의 이미지를 만들고 즐겨왔을 뿐, 정작 자신들에게 위기감이 닥칠 때는 모든 혼란의 원인인 양, 희생양으로 만들어 처리하곤 했습니다. 유디트의 신화 속엔 바로 이런 이미지들의 반복된 역사가 숨겨있을 뿐인 것이죠.

본 공연은 4월 5-7일까지 충무아트홀에서 시연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다음뷰에도 송고했습니다. 오마이뉴스를 위해서 비발디와 패션에 대한 설명을 더욱 보강해 넣었습니다.



태그:#유디트의 승리, #팜므파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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