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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나 외로움을 치유하기 위한 방법 가운데 가장 손쉬운 것은 음악을 듣는 것이다. 선율을 통해 고독한 정서를 어루만지며 잠깐의 휴식과 함께 회복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지금 있는 곳과는 다른 공간에서 사색하며 삶을 돌아보고 내적인 힘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인위적인 조형물이 늘어선 곳보다는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자연으로 향하게 된다. 휴양지가 도심에 있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떠나기에 가장 좋은 곳은 바다. 밀려왔다 다시 밀려가는 파도의 울림은 그 어떠한 선율보다도 차분하게 마음을 감싸 안는다. 프랑스어에서 바다(mer)는 어머니(mére)와도 발음이 같다고 한다. 모든 생명이 바다가 생기고 나서 탄생되었다고 하는 것처럼 그곳은 우리들의 모태이며 고향과도 같다.

 제주도의 신비로울 정도로 푸른 바다
 제주도의 신비로울 정도로 푸른 바다
ⓒ 박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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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다를 주제로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지난 번 소개해드린 제주도 김영갑 갤러리 후문의 맞은편 '곳간 쉼'에서 사진작가 박훈일의 작품들이 선보이는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당시, 김영갑 선생과 처음 알게 된 이후 그를 삼촌이라 부르며 유일한 제자가 되었다는 박훈일 작가. 그의 사진 속에 담긴 제주도의 바다는 강렬함과 함께 고요한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제주 사람들에게 바다는 희망이고 꿈입니다. 나를 알기 위해 찾는 곳이고, 스스로 되돌아보게 하는 곳이며 마음을 비우는 곳이고, 나를 다시 채우고 돌아오는 곳이에요."

김영갑 선생이 루게릭병으로 고통 받다가 2005년 5월 세상을 떠난 후, 박훈일 작가는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피를 나눈 삼촌 이상으로 다정다감했고, 때로는 엄한 스승이었던 그의 부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런 생각도,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고, 멍하니 바닷가 바위 위에서 여섯 달을 보냈다고 한다.

 "바다는 거칠지만 고요하고, 매서워 보이지만 따뜻합니다." -박훈일. 
격정과 차분함, 바다는 수만가지 극적인 모습을 통해 삶을 은유한다.
 "바다는 거칠지만 고요하고, 매서워 보이지만 따뜻합니다." -박훈일. 격정과 차분함, 바다는 수만가지 극적인 모습을 통해 삶을 은유한다.
ⓒ 박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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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무기력한 제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바다가 먼저 말을 걸어왔어요. "작업해야지! 그곳에서 뭐하고 있는 거지?" 파도 소리가 마치 제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죠. 불현듯 그 바다를 필름에 담고 싶었고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박훈일의 작품 속 바다는 제주도의 삶과 영혼을 그대로 담아낸다. 기쁨과 슬픔을 넘어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환상과 아픈 현실의 상처들. 무모한 개발과 발전으로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바다의 모습들은 생명의 가치를 무시한 자본의 폭력에 경종을 울린다.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동시대 인류 전체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그럼에도 그 어법은 은근하면서도 객관적이다. 부드러우면서도 강건함을 지니고 있다.

 제주 바다의 모습을 자연 그대로 담고 있는 그의 사진은 강렬하고, 섬뜩하며, 고요하고, 신비롭다. 하지만 박훈일은 이에 머무르지 않는다. 개발과 발전을 향한 무모한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이번 전시에서 함께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제주 바다의 모습을 자연 그대로 담고 있는 그의 사진은 강렬하고, 섬뜩하며, 고요하고, 신비롭다. 하지만 박훈일은 이에 머무르지 않는다. 개발과 발전을 향한 무모한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이번 전시에서 함께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 박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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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태어나 자라온 그에게 바다는 삶의 현장이다. 변화의 과정과 그것을 통해 울부짖던 바다의 목소리를 작가는 알고 있다. 때문에 당사자의 시선으로 담아내는 작품의 바탕에는 안타까움을 넘어서는 애정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지나친 개발 논리에 반발하려는, 일반적인 작가들과는 다른 바탕이 그의 사진들 속에 담겨져 있다.

 제주도에서 생을 이어온 당사자의 시선으로 담아내는 작품의 바탕에는, 안타까움을 넘어서는 애정이 살아있다.
 제주도에서 생을 이어온 당사자의 시선으로 담아내는 작품의 바탕에는, 안타까움을 넘어서는 애정이 살아있다.
ⓒ 박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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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것은 동양화처럼 서정적이나, 인간과 만난 바다의 모습은 서사적이다. 마치 다큐멘터리 사진처럼 말이다. 따라서 앞의 사진들은 미학적 가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편안하게 감상하면 되지만, 후자의 것들은 눈과 귀를 열어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수용하는 노력을 요구한다. 거친 콘크리트와 철조물들이 뒤엉켜 마치 죽은 생선의 괴기스런 육체를 떠올리게 하는 후자의 바다에는 제주인들의 현재와 미래의 삶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김지혜, 독립큐레이터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 437-5에는 밀감창고를 활용한 전시장이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 437-5에는 밀감창고를 활용한 전시장이 있다.
ⓒ 곳간 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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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을 제외하고 6월 20일까지 사진이 전시되는 공간 또한 굉장히 독특하다. 이곳은 원래 제주 밀감을 저장하는 창고를 활용한 곳이라고 한다. 연중 4개월(11월~2월) 동안 밀감저장을 위한 창고로 사용되는데, 나머지 기간은 문화예술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작품들 사이로 차곡차곡 쌓인 밀감 바구니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사진은 물론 공간마저도 제주도민들의 삶과 영혼을 오롯이 담아내는 놀라온 곳이다.

"사람들은 바다를 보면서 쉬고, 바다를 보면서 다시 시작합니다. 자신을 되돌아보는 거울이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런 바다를 메워서 사람들은 땅을 만들었고, 넓은 땅이 생겼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살던 물고기들마저 고향을 잃었고, 어릴 적 그 곳에서 뛰놀던 우리의 추억도 이젠 영원히 묻혀버렸죠. 나와 너, 우리의 아들딸들도 저 바다를 보며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가야 할 겁니다. 어린 시절에 꾸었던 꿈을, 먼 훗날 이 바다에 앉아 다시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박훈일

덧붙이는 글 | -고인이 된 김영갑 선생의 유일한 제자인 사진작가 박훈일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탑동의 어제와 오늘>, <오름, 시간을 멈추다>, <중산간에 서다>, <바람 나무와 꽃을 심다>, 그리고 이번 전시회 <바다>라는 제목으로 5번의 개인전과 5번의 초대전을 열었다.

이기사는 <스쿨 오브 오마주>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바다#박훈일#사진#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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