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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인지 달팽인지 이름도 예쁘지 않은 달팽이관이 고장 나 자리 보존한 지 한 달여. 드디어 웬만큼 나아 내 발로 병원 나들이를 했다. '간뎅이' 때문에 양약을 오래 먹는 게 부담이 된다고 하소연했더니 의사가 시원하게 그만 먹어도 되겠다고 말한다. 단 여자들은 재발률이 높은 편이니까 조짐이 이상하면 즉시 병원으로 오라는 당부만 했다.

 

일단 완치판정을 받자 날아갈 것 같았다. 룰루랄라~~ 발걸음도 가볍게 광주의 명동 충장로 거리를 활보하다 모처럼 서점으로 들어갔다. 쭉 책을 훑어보다 베스트셀러 코너로 갔다.

 

법정스님이 돌아가시면서 "그 동안의 말빚을 갚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셨다는 발표가 있기 무섭게 서점에 있는 법정스님 책이 완전히 동이 났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쌓여있는 책들 제목부터 구경을 시작했는데 이게 웬 일. '무소유' 빼놓고 스님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어지럼증 때문에 중풍 맞은 여편네처럼 남편 팔에 의지해 법정스님 다비식을 보러 기어코 송광사까지 기어가 스님의 다비식을 보고 난 단상을 우리 네 식구가 들락거리는 가족 카페에 올려놨더니 아들이 댓글을 달았다.

 

"엄마, 우리 집에 법정스님의 무소유 있어요?"

 

아들의 댓글을 본 남편이 책장을 뒤집어 무소유를 찾기 시작했는데 손바닥만 한 문고판 '무소유'가 어디로 갔는지 오리무중이었다. 그래도 사람 욕심이 곧 없어진다는 소리를 들으면 소유욕이 발동하는 법.

 

가물가물, 법정스님의 웬만한 저서들은 읽은 기억은 있지만 그래도 몇 권 집어 들었다. 그리고 유달리 '인연'자만 들으면 깜박 자지러지는 본병이 도져 암 투병 중이라는 최인호작가의 '인연'도 집어 들고 (얼마나 인연이란 단어를 좋아하는지 피천득선생의 '인연'도 샀던 전력이 있다) 계산대 앞에 서니 무려 책값이 8만 원 가까이 되질 않는가.

 

내 돈, 그것도 이런 거금을 들여 책을 사 본 지가 언제 적이던가? 사실 나는 별로 책을 잘 읽는 편이 아니다. 남편과 딸이 부지런히 사들이는 책들을 정 심심하면 들쳐보지만 아주 흥미 있는 책 빼고는 정독을 한 적이 없고. 재미있는 소설은 보고 싶지만 소설책을 내 돈 들이고 산다는 게 괜히 아까워서 포기했다.

 

하여튼 소설책을 공짜로 보자면 도서관을 가야 하는데 차타고 읍내에 있는 도서관까지 나가는 게 머리 무거워서(참, 핑계도 많다) 이래저래 책들과 멀어졌다. 그런 내가 모처럼 거금을 투자한 것이다.

 

 

참 소설책 중에 유일하게 내 돈 주고 사는 책들이 있긴 하다. 바로 박경리선생과 박완서선생의 저작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작가의 저서들이라 정 빌릴 데 없으면 사곤 했다. 박경리선생 타계 후 선생의 유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를 읽었다.

 

무슨 참고서도 아닌데 공부하는 학생처럼 틈만 나면 읽고 또 읽었다. 페이지로 보자면 150여 장이 채 안 되는 얇은 책. 산문처럼 잔잔하게 펼쳐진 시어마다 아니 행간 행간까지 선생의 마음이 느껴져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았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선생님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면서 가난과 고통과 상처로 얼룩진 지난 생을 뒤돌아보시는 선생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나이가 가르치는 것일까? 선생의 속마음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과의 이별 준비를 마치신 선생님. 이제 이 양반이 평화와 안식을 얻으셨구나...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최인호작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의 인물이다. 소설이면 소설, 수필이면 수필 작가가 쓴 모든 글 중 베스트셀러 아닌 것 드물다. 오죽하면 그렇고 그런 가족 이야기를 십수 년 동안 연재할 수 있을 정도일까. 그만큼 대단한 문재가 있을 뿐만 아니라 '허벌나게'(전라도 말로) 소재개발을 잘 하는 이야기꾼이란 얘기겠다.

 

최인호의 '인연'이란 책을 사서 일사천리로 읽어버렸다. "그만 불 좀 끄지?" 잠결에 투덜대는 남편도 무시하고 책장을 덮고 나니 새벽 두 시가 넘었다. 사진작가의 멋진 작품들이 사이사이 끼어있는 수필집은 읽기에도 편했고 눈도 즐거웠다.

 

그러나 쓸쓸하고 허망하고 참 입맛이 썼다. 아직은, 아직은 세상에 미련이 많을 나이. 중병을 앓으며 힘겹게 다시 일어서고픈 그래서 지난 세월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할 정도의 최인호, 그  이름 석 자를 포기하기 힘든 작가의 마음이 전해진 탓일까.

 

너무나 당당해 기고만장하기까지 했던 자신이 그동안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부모형제, 처자식 그리고 가까운 지인들과 전혀 관심 없던 주변의 자연과 풀꽃까지. 이제는 돌아 와 거울 앞에 선 누이처럼 작가는 모든 것에 미안했고 모든 것에 사랑과 연민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와 당신 사이에 인연의 강이 흐른다.

 

책 1부 머리글이다. 책 표지 맨 뒷장.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으로 떠나는 최인호의 추억여행' 아래 이런 글들이 있다.

 

이토록 수많은 인연의 별이 반짝이고 있으니

우리의 생애는 얼마나 위대한가

 

우리 모두는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다. 이 별들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며 소멸하는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이 신의 섭리를 우리는 '인연'이라고 부른다. 이 인연이 소중한 것은 반짝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의 빛을 받고, 너는 나의 빛을 받아서 되쏠 수 있을 때 별들은 비로소 반짝이는 존재가 되는 것. 인생의 밤하늘에서 인연의 빛을 밝혀 나를 반짝이게 해준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삼라와 만상에게 고맙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인터넷 한겨레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박경리, #최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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