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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안무가 피나 바우쉬의 작품 <카페 뮐러>
▲ <카페 뮐러> 독일 안무가 피나 바우쉬의 작품 <카페 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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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통을 위하여 몸을 찢다

현대무용 공연을 봤습니다. 피나 바우쉬란 독일 출신의 안무가가 연출한 <카페 뮐러>와 <봄의 제전>이란 작품입니다. 그녀는 작년 안타깝게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흔히 현대 무용을 북미와 유럽 스타일로 나누는데요. 피나 바우쉬는 유럽 스타일, 그 중에서도 독일의 표현주의 무용의 계보를 잇습니다. 흔히 탄츠 테아터라고 하는데 번역하면 '춤연극'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부퍼탈 탄츠 테아터입니다. 부퍼탈은 독일의 지역 이름이니, 독일의 지방무용단에 불과했던 무용단이 1973년 피나 바우쉬가 안무가로 가입, 활동한 이래 세계적인 무용단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죠.

미국의 현대무용은  움직임 자체와 리듬감이 있는 형식을 몸을 빌어 표현하는 것에 천착합니다. 반면 독일은 인간의 조건을 지속적으로 묻는 일종의 '사회적 퍼포먼스'로서의 무용을 강조합니다.

피나 바우쉬의 <카페 뮐러>의 한 장면
▲ <카페 뮐러> 피나 바우쉬의 <카페 뮐러>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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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느냐에 더 관심이 있다"라고요. 무용하면 갸름한 얼굴을 한 아가씨들의 얼굴과 발끝으로 서는 동작만 떠올리던 이들에게 무용이 '현실과 싸울수 있는 용기'를 만들어내는 그릇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죠. 이번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카페 뮐러>를 본 것은 큰 수확입니다. 무용이 시작되면 두명의 여자와 남자가 등장합니다.

무대는 거울벽으로 막혀있고 카페를 연상시키는 배경 속엔 테이블과 의자가 즐비하게 놓여있습니다. 무용수들은 앞으로 나오려 하지만 계속해서 탁자에 몸을 부딪치기에 이 조차도 쉽지 않습니다. 마치 허공에서 흩뿌려지는 언어를 보는 느낌입니다. 지향점을 찾지 못한채 말은 무대위를 떠돕니다. 소통이 이렇게도 어렵나 하는 한숨이 연극을 보면서 나오네요. 마치 우리시대의 한국을 보는 것 같이 말입니다.

사랑을 하소연 하려는 듯 서로를 껴안고 놓지 않는 연인들이 보입니다. 서로 살을 맞대기도 하고, 타인의 몸에 다가가거나, 유리벽을 향해 뛰고 그 벽에 자기를 던져 충돌하기도 하죠. 옷을 벗거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려는 듯, 껴안고 있는 연인을 떼어놓으려는 이도 등장합니다. 몸을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식으로만 생각한 미국인들에게 그녀의 무용은 한 마디로 충격이었습니다. 인과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깨고, 끊임없이 소통의 부재와 어려움, 세상살이 현실의 불확실성을 몸으로 표현합니다. 기존 무용에 대한 생각 자체를 확 바꿔버린 겁니다.

봄의 제전 중 집단무 장면
▲ 피나 바우쉬의 <봄의 제전> 봄의 제전 중 집단무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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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뮐러>를 보는 동안, 전후 독일사회의 변모하는 단면들을 담으려 했다는 피나 바우쉬의 생각들을 되집어봤습니다. 전쟁 이후 다양한 이념들이 잉태하는 가운데, 독일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파시즘이란 극우사상을 극복하면서 인간의 다양성과 실존의 조건을 끊임없이 물으려 했던 '사회적 여정'은 만만치 않았을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힘들어도 가야겠지요. 그렇게 오늘날의 독일사회를 만든 그들의 이면에, 소통의 봄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을 느끼게 했던 작품입니다.

인터미션이 끝나고 드디어 기다리던 <봄의 제전>이 시작됩니다. 무대는 커피빛깔의 모래가 깔려있고, 그 위로 수많은 무용수들의 집단무가 펼쳐집니다.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처녀를 간택해 제물로 바치는 의식 장면
▲ <봄의 제전>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처녀를 간택해 제물로 바치는 의식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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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봄은 옵니다. 반드시 옵니다-빼앗긴 들에

길고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습니다. 들녘에도 봄 기운은 완연하게 피어오르고 옅은 베이지빛 반투명 의상을 한 무용수들은 마치 각자가 한 송이 꽃이 된듯, 흙을 뚫고 나옵니다. 미만한 봄바람에 몸이 휘날리고 흔들리며, 생명의 찬란한 탄생을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빼앗긴 들에 봄은 쉽게 오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 합니다. 대지의 신, 사터날리아에게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처녀를 간택해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희생제가 없는 봄은 없다란 것이죠. 1913년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과 니진스키란 불세출의 안무가가 협업, 당시 최고의 흥행사였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이끌던 <발레 뤼스>가 초연했던 공연이었습니다. 초연당시 기독교적 가치에 반하는 급진성과 이단성으로 인해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시인 장 콕토는 "마치 자연이 융기한 것 같았고 숲 자체가 미쳐버린 것 같았다"고 후술합니다. 우아함의 도시 파리에 경찰이 출동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니 할말 다했지요.

집단무 장면
▲ <봄의 제전> 집단무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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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발레 음악이 가진 유려한 멜로디에서 이탈, 거친 자연의 야수성, 도발적인 자연의 숨결을 표현한 이 작품은 이후로 20세기 무용과 음악의 혁신을 상징하는 '역사적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내로라 하는 안무가들은 <봄의제전>을 자신의 무용철학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틀처럼 이용했죠. 피나 바우쉬 버전의 <봄의제전>은 지금껏 다른 연출가들이 보여준 방향들과 조금 달랐습니다. 대부분 생명력의 신, 에로스의 축제로 봄을 표현했다면, 그녀는 '인간조건의 나약함'을 문제삼으며, 봄을 맞기 위해서 '희생'이 필요하고, 이 희생은 집단 '내부'의 누군가를 선택함으로써 이뤄진다는 걸 보여주죠. 지금껏 보여준 다른 안무가들의 <봄의 제전>에 비해 가장 강렬하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3 인간은 왜 춤을 추는가

피나 바우쉬의 무용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 생각에 젖습니다. 인간에게 무용은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희망을 꿈꾸게 하는가? 원시시대, 죽음의 갈림길에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주술적 움직임으로 탄생한 무용은, 현대에서 여전히 '소통하려는 인간의 조건'을 묻고 몸을 통해 그 희망을 표현하려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요. 봄은 옵니다. 우리가 갈아 엎어야 할 묵정밭은 넓지만, 포기 하지 않으려고요. 그때 다시 한번 우리들의 <봄의 제전>이 펼쳐지길 소망합니다.


태그:#피나 바우쉬, #봄의 제전, #카페 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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