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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린 배움동무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심해린 배움동무와 같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비정규직 교수입니다. 저는 학생에게든 교수에게든 '이 더러운' 대학을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학은 우리 인류의 오래된 유산입니다. 그 유산을 현행 대학교의 행정적 지배자들이나 국가의 관료들 또는 시장의 보스들이 독점하게 할 순 없습니다. 우리는 그 유산을 지키고 드높일 의무가 있고 권리가 있습니다. 저는 제 위치에서, 제 탐구에서, 제 성찰에서 그런 의무와 권리를 다하며 살고 싶습니다.

 

이 말은 김예슬 배움동무의 행동이 옳은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그의 글과 실천을 보고 그가 선지자처럼 느껴졌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뜻을 같이 하는 배움동무들과 힘을 합쳐 진짜 대학을 만들어나가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저는 철학을 가르치니까, 만일 김예슬 배움동무가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면, 저는 그 한 사람을 위한 철학 교수가 될 수도 있어요. 아니면 언젠가 그가 다시 학교로 돌아온다 해도 강하고 숭고한 그의 정신이 훼손되지 않았을 것이라 믿습니다.

 

저항하기, 대학을 그만 두는 것만 있을까요

 

 김예슬 선언에 이어 이화여대 07학번 심해린씨가 <'김예슬 선언' 앞에 교수님들의 양심을 묻습니다>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고려대와 이화여대에 붙였다. 사진은 심해린씨의 대자보를 보고 있는 고려대 학생들.
김예슬 선언에 이어 이화여대 07학번 심해린씨가 <'김예슬 선언' 앞에 교수님들의 양심을 묻습니다>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고려대와 이화여대에 붙였다. 사진은 심해린씨의 대자보를 보고 있는 고려대 학생들. ⓒ 서유진

심해린 배움동무는 선생 중에서 대학을 박차고 나오는 그런 선지자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올곧은 메시지를 전하는 데는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김예슬의 방식은 그 다양한 것 중에 하나이고 몹시도 아프지만 아름다운 방식이었습니다. 다수는 아니지만 일부 선생들은 지금 다양한 방식으로 대학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 봅시다.

 

저는 김예슬 선언에 공감하는 이 나라 모든 배움동무들이 대학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갖기를 희망합니다. 대학교에 다니는 것을 그만 두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정말로 없을까요?

 

김예슬 배움동무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대학을 그만 두는 것조차 희망과 용기의 산물이 아니라 어쩌면 절망과 두려움의 산물인지도 모릅니다(아 여기서 김예슬 배움동무의 결행을 가치절하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저는 대학에 남아 있는 것이 반드시 순응과 좌절을 함축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라면서 대학교 안에서 싸워보는 방법도 가능한 스타일 중 하나입니다.

 

먼저 아주 작은 실천을 해보도록 합시다.

 

가령 소위 명문대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꿀 수 있습니다. '듣보잡대(듣지도 보지도 못한잡대학', '지잡대(지방 잡대학)'라는 낱말과 관념은 대학의 이념을 왜곡시키는 악성 밈들 중 하나입니다.

 

한 대학이 단순히 서울에서 물리적으로 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그 대학을 저질 대학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대체로 고등학교 때 성적이 나빴다는 사실은 그 대학을 저질 대학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부모가, 우리의 동생들이 대학들을 평가하는 방식이 대학 행정가들의 정책을 좌우하게 됩니다. 하나의 관념을 바꾸는 것이 쉬운 일처럼 보입니까? 하나의 관념을 바꾸기 위해서 생각의 전반을 바꾸어야 할지 모릅니다.

 

악성 밈들은 이뿐만 아닙니다. 높은 연봉이 보장된 직장을 추구하는 우리의 열망과 욕구는 결국 잘 나가는 기업과 직종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길들이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그런 열망과 욕구를 아주 조금만이라도 줄일 수 없을까요?

 

조금만 줄이는 것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걸 줄이게 되면, 친구들이 비웃기 시작할 겁니다. 네가 능력이 없으니까 그렇게 했다고, 이류 인생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사소한 욕망 하나라도 그것을 줄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재조정해야 합니다. 정말이지 그런 실천은 지성과 절제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20대가 피해자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많은 힘과 에너지가 동원되어 만들어진 것입니다. 자본이 투입되어 있고 토지가 투입되어 있으며 제도가 투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의 투입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과 열망과 욕구입니다.

 

균형발전이고 뭐고, 지속가능한 성장이고 뭐고 관계없이, 세금 적게 내는 대신 자기 연봉이 더 많아지고,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기를 희망한다면, 이명박 같은 모리배가 의원이 되고 시장이 되고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제도가 만들어지고, 그 제도 아래에서 이익이 증대되는 시장의 보스들과 의견 통제자들은 이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해 서로 더욱 강력하게 결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대학 4년 동안 자신이 가진 관념과 생각과 욕구와 열망을 되짚어보고 검토할 시간을 얼마나 가질까요? 우리 사회가 그대에게 그렇게 할 시간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학교의 선생들이 그런 것을 반성할 지성적 힘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성찰해야 할 때, 이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이런 방식의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낸 원래 동인인 바로 그 욕망들을 더욱 가열해야 했으며, 그런 욕망을 실현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선생을 찾아 다녔고, 선생들에게 그런 것을 요구했을 것입니다(김예슬 배움동무나 심해린 배움동무가 그렇게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20대들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관점에서, 20대는 현재의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데 전체 인구에서 20대가 차지하는 만큼의 기여를 했습니다. 20대들이 숭상하는 인간상들이 우리 사회가 숭상하고 있는 인간상을 부분적으로 형성합니다. 20대들이 이건희나 이재용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도 어느 정도 그들을 수치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20대조차 박정희를 최고의 대통령으로 존경하면, 박정희는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분량보다 더 많은 존경을 우리 사회에서 받게 될 것입니다. 20대가 조중동의 의견들에 흡족해 한다면, 그만큼 그들의 불량의견들이 우리 사회에서 더 많이 유통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20대가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에게 기대하는 것들이 대학교의 현재 형태를 일정 정도 결정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성한 노동과 실천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의 숭고한 뜻과 깔끔하고 또렷하고 새로운 생각들도 세상을 크게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호하는 것, 우리가 우러러 보는 사람, 우리의 시간과 열정을 바치는 곳을 변화시키면, 우리 사회 시스템도 그에 따라 약간은 변모하게 됩니다. 우리가 부패보다 무능력이 더 나쁘다고 믿게 되면 우리 사회도 권력을 맘대로 부리면서 부패한 자들이 판을 치는 방식으로 바뀔 것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삶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김예슬씨가 대자보를 붙인 정경대쪽 후문 풍경. 많은 학생들이 지나는 걸음을 멈추고 대자보를 보고 있다. 옆쪽으로는 김 씨의 행동을 지지하는 대자보가 붙어있다.
김예슬씨가 대자보를 붙인 정경대쪽 후문 풍경. 많은 학생들이 지나는 걸음을 멈추고 대자보를 보고 있다. 옆쪽으로는 김 씨의 행동을 지지하는 대자보가 붙어있다. ⓒ 유성호

제 말의 요점은 젊디 젊은 그대 배움동무들이 본디 힘이 없거나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그대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했고 능동적으로 자기 욕망을 실현시키고 있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그렇게 하는 것이 나중에 나쁜 결과를 낳게 될 줄 모른 채, 너나 나나할 것 없이 명문대를 추구했고, 돈 잘 버는 학과를 선택했고, 학점과 자격증에 매달렸으며, 거대 자본에 복무하는 '부품'이 되는 걸 동의했고, 이런 식으로 육체를 돌보는 데 바빠 철학적 성찰과 탐구에 게을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것은 정말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그에 따라 능동적으로 자기 삶을 주도하는 것이 아닐까요? 삶에서 성공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에 내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승리한 삶이 아닐까요? 결국 저는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배움을 계속해야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삶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더 아름답고 더 착하고 더 참된 것을 찾는 삶이 우리가 좇아야 할 삶이고, 실제로 그렇게 살게 되는 게 진짜로 성공한 삶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요? 한때가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내내 그렇게 믿을 용기가 있나요? 혹시 그것이 성공한 삶이 아니라면 어쩔까 하는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지금 대학교를 다니고 있지는 않나요? 대학교를 박차고 나오든지, 대학교를 지금처럼 계속 다니든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살아야 할 삶, 알아야 할 앎, 사랑해야 할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사실 김예슬 선언은 제가 말한 거의 모든 것을 이미 담고 있습니다.

 

"자유의 대가로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삶의 목적인 삶 그 자체를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정말이지 '대학'은 단순히 현행 제도나 건물을 뜻하지 않습니다. 큰 배움, 보편적인 배움, 통합적인 배움을 뜻해야 할 것입니다. 대학교 다니는 것을 이제는 그만 두겠다는 말은 그런 참된 큰 배움에 자기를 내던지겠다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시베리아와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했던 그런 독립투사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저의 아주 오랜 배움동무들인 소크라테스도 스피노자도 감행했던 일입니다.


#김예슬 선언#대학#자발적대학거부#자퇴#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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