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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올레길을 찾는 사람들과 한라산 등반객들이 몰려드는 제주시 시외버스터미널.
시외버스터미널이 열악한 것은 전국팔도 어디나 비슷한 사정일 것이다. 사람을 나르는 교통수단 중 가장 오래된 수단 중 하나인 시외버스는 점점 자동차에, 비행기에, 여객선에, 고속버스에, KTX에 밀려 설 곳을 잃어가고 있다. 시외버스 사정이 이러니 손님을 기다리는 터미널도 마찬가지가 될 수밖에. 돈 없는 서민들에게는 시외버스가 제일이지만 터미널은 가장 낙후된 교통이용 시설 중 하나다.

옛 제주시 시외버스터미널 풍경.
 옛 제주시 시외버스터미널 풍경.
ⓒ 김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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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가 주최한 공공미술사업 대상지로 제주시 시외버스터미널이 선정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공공성을 지닌 다중이용시설로서 다양한 계층이 이용하고 있으나, 시설의 낙후로 인해 환경정비의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

제주시 시외버스터미널의 새단장을 맡은 '2009 공공미술사업추진단'은 도심지역에 현대와 전통의 조화를 주제로, 이 시대와 지역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 문화적 상징을 찾아 공공미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만나는 계기를 제공한다고 했다.

그럼, 새 옷으로 갈아입은 터미널로 현장검증 가보자.

제일 먼저 외관을 살펴보자. 녹색 계열의 색을 칠하고 그 위에 구멍 뚫린 하얀색 틀을 씌웠다. 얼핏 보면 '국방부' 같다. '녹색 성장'을 뜻한다는데, 색이 어두워서 그런지 군복이 떠오른다. 이 의견은 주변인 설문조사 결과다. 지금까지 5명 넘게 비슷한 대답을 했다. 여러 가지 답변 중 '군인 숙소'가 제일 어울린다. 하지만 외관은 중요하지 않다. 개인적 취향은 다를 수 있다. 충분히 그렇다고 인정한다.

새 단장한 제주시시외버스터미널 외관.
 새 단장한 제주시시외버스터미널 외관.
ⓒ 김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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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아진 계단, 미끄럽기까지

그 다음 보이는 것은 계단. 계단 높이가 어른 무릎 정도 되기 때문이다. 어린이나 노약자에게 불편한 것은 물론 치마를 입었거나, 무거운 짐을 들었거나, 발이 짧은 성인에게는 턱없이 높다. 공사 전에는 건물에서 계단까지 자연스럽게 내려갈 수 있었다. 마무리 공사도 엉망이다. 기존의 표면 위에 '땜질'하듯으로 공사를 했는지 페인트가 흘려내려 미관상 좋지 않아 보인다.

기존보다 높아진 제주 시외버스터미널 계단
 기존보다 높아진 제주 시외버스터미널 계단
ⓒ 김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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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시외버스터미널 계단
 제주 시외버스터미널 계단
ⓒ 김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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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에서 계단까지 이어주는 터미널 앞마당도 대대적인 손질이 됐다. 아스팔트를 깔아놓은 듯 쭉 뻗어 시원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미끄럽다. 비가 오거나 눈이 왔을 때는 물론이고, 평소 때 높은 구두를 신었거나 굽이 닳은 신발을 신은 사람도 위험해 보인다.

왜 이렇게 무리를 해가면서 터미널 앞에 넓고 높은 길을 냈을까.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걸까. 신문 기사들을 찾아보니 건물 앞 전체 외관을 '길'로 형상화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보따리를 든 할머니 조형물도 그런 의미에서 세워진 것이라고. 쭉쭉뻗은 아스팔트를 형상화하기 위해서일까. 굳이 기존의 계단까지 높여가면서 보강해야 했을까.

겉만 번쩍...낙후된 화장실은 그대로

제주 시외버스터미널 화장실
 제주 시외버스터미널 화장실
ⓒ 김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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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은 더욱 문제다. 예전 그대로의 모습. 전혀 손질이 안됐다. 손 씻을 물은 나오지 않고, 화장지도 없다. 조명은 어둡고 쾌쾌하고 오래된 냄새가 진동한다. 문고리는 다 뜯어져 몇 번씩 공사를 한 상처가 남아있다. 그나마 다행인건, 변기 물이 내려간다는 것 정도.

예산이 부족해서 차마 화장실까지 손보지 못 한걸까. 그럴 거면 외관에 신경쓰지 말고 내부 시설만이라도 깨끗하게 바꿔주면 어땠을까. 터미널 앞마당과 계단을 보면서 느낀 허술함보다 화장실을 보면서 느낀 배신감은  더 컸다.

터미널을 몇 번 이용해봤다면 금방 알아차렸을 텐데. 터미널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겉치장만 한 것이란 말인가. 그래서 서운한 거다. 내가 제주 시외버스터미널의 화장실 실태를 알게된 것도 이번 설에 내려가면서 터미널을 이용했었기 때문이다.

바뀐 제주 시외버스터미널은 공공미술의 본 뜻을 되새겨보게 한다. 공공미술이 단순히 공공건물을 바꾸는 게 목적은 아니지 않은가. 예술적인 아름다움보다 시민들의 편의를 먼저 생각했어야 했다.

사실 정말 별 것 아닌  문제일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은 사소한 것에서 출발한다. 서민들은 높은 계단 오르느라 허리가 아픈데, 한 쪽에선 예술적인 터미널로 변했다고 칭찬한다. 대체 누구를 위한 공공미술인가.


태그:#공공미술, #제주시시외버스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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