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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나는 카나리아 한 쌍과 유리앵무 한 쌍을 샀다. 나의 아파트에서 즐겁게 노래하는 카나리아와 앙증맞은 유리앵무 날갯짓을 상상하면서 나는 새를 받아들고 보물이라도 얻어가진 양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왔다. 거실에 새장을 놓고 새들을 넣었다. 모이 그릇과 물 그릇을 달아주고 들녘 배추밭에서 배추잎사귀를 따다가 넣어주며 애지중지 보살폈다. 

거실에 새장을 두었더니 모이를 먹으면서 마구 흩트려 마루를 온통 어질러놓는가 하면 새털이 날려 여기저기 널려 있곤 했다. 그래도 새들의 모양이나 날갯짓이 귀여워 그대로 거실에 놓기를 바랐으나 아내는 단호했다. 베란다로 내놓자는 것이었다. 아내는 자신의 예전 피부병을 거론하며 새털이 건강에 안 좋다며 내놓자고 하니 내 고집만 피울 수도 없었다.

그래 새장 두 개는 곧 베란다로 옮겨져 새장 두 개가 위 아래로 나란히 놓이게 되었다. 새들은 가을 햇볕 속에서 경쾌하게 몸을 움직이며 모이를 쪼고 물을 마시곤 했다. 나는 출근하기 전 또 퇴근하면 으레 베란다로 나가 새들의 상태를 살펴보고 모이그릇과 물그릇을 확인하곤 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서 걱정거리 하나가 생겼다. 새들의 월동대책이었다. 조류원 주인의 말에 의하면 최소한 영상 10도 이상을 유지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한겨울 아파트 베란다 온도는 영하 20도까지 떨어지기도 할 텐데 어떻게 월동대책을 세워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조류원으로 전화를 해보았으나 특별한 장치나 대책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헌 가구점엘 들러 새장 두 개가 쏙 들어갈 공간이 있나 살펴보기도 하고 겨울용 특별 보온 새장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유리가게와 목재가게를 수소문해보기도 하면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곤 했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날씨가 점점 추어지자 나는 일기예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곤 했다. 우선 온도계를 하나 구입했다.

온도계를 새장 한 모서리에 달아놓고 날마다 온도를 점검하면서 월동대책을 궁리하다가 결국 담요와 비닐로 새장을 감싸 보온을 유지하는 방법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내에게 물으니 헌 담요가 있다고 했다. 헌 담요 두 개를 받아놓고 비닐을 구하려고 외출했다가 동네  슈퍼마켓 한쪽 구석에서 비닐 뭉치가 나뒹굴고 있는 것이 번쩍 띄었다.

차를 세우고 그 비닐 뭉치를 펴보니 매우 두툼한 비닐인데 그 크기도 새장을 세 겹은 감싸고도 남을 만큼 넉넉했다. 나는 주인에게 물으니 버릴 거란다. 내가 쓰겠다고 하니 쾌히 가져가도 좋단다. 일단 나는 그 비닐을 가지고 와서 거실에 쫘 펴놓고 새장을 감쌀 수 있는 크기로 포개어 테이프로 고정하니 새의 월동용으로 완벽할 것 같았다.

그 후 날씨가 영하로 내려갔을 때 새장에 담요를 두르고 세 겹으로 된 비닐을  둘렀다. 문이 있는 앞 쪽은 개폐식으로 해서 밤이면 닫고 따뜻하면 열어놓을 수 있게 했더니 새들이 동사할 염려는 없어보였다. 아주 추워질 때를 대비해서 담요 하나를 추가로 준비해 놓았다.

이렇게 새들은 베란다에서 겨울을 나게 되었다. 고층아파트의 저층이기 때문에 하루에 햇빛이 드는 시간은 아침과 저녁의 짧은 시간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새들은 겨울을 나고 있었고 나는 수시로 물그릇 모이그릇을 확인하며 새들을 보살폈다. 한 겨울 내내 새들은 무사했다. 드려다 볼 때마다 새들은 건강하게 겨울을 잘 견디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가 터졌다. 지난 3월 8일 기어코 일이 터지고 말았다. 무수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장수가 논두렁을 넘다가 넘어진다는 말이 이런 것인가. 직장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돌아와 새장을 들여다 본 순간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새장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카나리아, 움직이지 않는 노랑빛 날개. 나는 비닐과 이불을 헤치며 또 한 마리의 행방을 찾았다. 아뿔싸!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마리는 모이통에 창백한 몸을 뉜 채 죽어있었던 것이다. 물통에는 물이 없고 모이통엔 단 한 톨의 모이도 없었다.

힘들었던 긴 겨울을 나고 이제 막 3월의 햇살이 베란다로 비쳐들 즈음 카나리아 한 쌍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겨우내 그토록 노심초사하며 보살핀 공도 모르고 무정하게 떠날 수가 있단 말인가. 유리앵무 한 쌍은 무사했다. 거의 같은 시간 같은 양의 모이와 물을 주는데 물과 모이의 소비량이 카나리아가 더 많았던 것을 나는 안다. 그러니까 내가 방심한 하루 이틀 사이에 그만 먹이부족으로 죽은 것이다. 

나는 새를 치울 엄두도 못 내고 자책감에 싸여 그 상태로 그냥 두고 있다. 잠깐의 방심이 이렇게 큰 화를 불러올 줄이야. 도대체 나는 왜 겨우내 그 강추위 속에서도 물과 모이를 꼭 챙겨주다가 왜 새봄이 활짝 열리려는 3월에 그만 방심하고 말았던가. 이 방심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나는 곰곰 생각해보았다.

새를 돌보지 않았던 삼사일 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가. 새는 어제 월요일에 죽어 있었고 지난 토요일 나는 피부과에 가서 검버섯 제거 레이저 수술을 받았다. 새를 돌보는 일보다 얼굴을 드려다 보며 수술 상태를 더 확인했던 게 틀림없다. 토요일 이전 이삼일 동안은 아내와 다투고 아직 화해를 하지 않았던 때였다. 아무래도 내 방심의 원인을 이 두 가지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그 사이 한번만 물을 주고 모이를 주었다면 이런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딴 일에 신경 쓰느라 시간이 흐르는 것을 미처 의식하지 못 했다. 오늘 직장에 다녀와서도 죽은 새의 시체를 치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속죄하고 싶은 마음에 그냥 이삼일 더 두고 싶다. 아무래도 최소 5일장은 치러야 할 것 같다.

나의 새 사랑은 어렸을 때부터 유별났다. 산새, 때까치, 종달새 등 어려서 많은 야생조류의 새끼를 붙잡아다가 집에서 길러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결국 성공한 것은 때까치 몇 마리가 고작이고 대부분 새들은 얼마 후 죽곤 했다. 그래 그 후 성인 된 후에 나는 '어린 새의 영혼을 위하여'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어린 새의 영혼을 위하여

밭갈이가 한창이던 봄날 아지랑이는 피어오르고
고운 노랫소리 산새를 잡기 위해서
온종일 둥지를 밀탐하던 나는 한 마리 작은 들짐승이었네
할머니가 등물 하던 잎새 무성히 무덥던 여름 한낮
마당가 꽃밭으로 날아든 호랑나비를 잡기 위해서
꽃밭사이로 꽃밭 사이로 잠입하던 나는 붉은 혓바닥의 한 마리 꽃뱀이었네
가을 햇살이 부서지던 날
청명한 하늘의 고추잠자리를 잡기 위해서
원형의 정교한 그물로 그 가벼운 비상을 향하여 몸을 날리던 나는
한 마리 날렵한 날짐승이었네
유년의 그 난폭한 장난을 생각하면서
새끼 잃은 어미새의 슬픔과 어미 잃고 죽어간 어린 새의 영혼을 위하여
꽃잎 위에 죽어간 호랑나비 아름다운 영혼을 위하여
가을 하늘 맴돌다 죽어간 고추잠자리 그 가벼운 영혼을 위하여
이제 쓸쓸히 한 송이 조화를 준비하네
                                -최일화 '어린 새의 영혼을 위하여' 전문

나의 부주의로 아무 죄 없는 새 두 마리를 저 세상으로 보낸 이 참다한 심정을 누가 알 것인가. 딸들에게 얘기했더니 놀라며 안타까워한다. 특히 막내딸이 제일 가엾게 생각하는 것 같다. 막내딸이 새를 떠올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저 새를 이제 어떻게 장례를 치를 것인가. 아내는 헝겊이나 종이에 싸서 쓰레기와 함께 내놓자고 한다. 나는 궁리중이다. 저 자연의 어느 풀 섶 사이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주고 싶기도 하고 마른 나뭇가지를 쌓아놓고 불을 피워 화장하여 그 영혼을 하늘로 보내고 싶기도 하다.

카나리아는 우리나라가 원산지가 아니다. 열대나 아열대 지방의 새일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카나리아 대부분은 애완조로 실내에서 알을 받아 부화하고 사육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원산지는 더운 나라인 것만은 분명하다. 카나리아 고향으로 그 영혼이 날아갔으면 좋겠다. 타향에서 태어나 고향의 하늘을 그리며 고된 삶을 살다가 몹쓸 주인을 만나 그만 일찍 생을 마감한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다.

하루 이틀 더 지나면 해결책은 나올 것이다. 나의 마음이 다시 안정을 찾는 대로 나는 새를 어느 조용한 숲이나 풀 섶에 장례 지내고 새장을 깨끗이 청소한 다음 죽은 카나리아 가벼운 영혼을 위해 짤막한 기도를 할 것이다.

봄볕이 다시 완연해지면 다시 조류원으로 가서 죽은 카나리아와 모습이 똑같은 한 쌍의 카나리아를 다시 사올 것이다. 그리곤 속죄라도 하듯 더욱 정성스럽게 카나리아를 보살필 것이다. 봄이 오면 카나리아가 노래 부르기를 나는 잔뜩 기대했었다. 그 기대마저 저버리고 카나리아는 떠났다. 비록 그 새의 노래는 이제 못 듣지만 새로 사온 카나리아가 우리 집 베란다에서 아주 경쾌하게 노래하기를 기대하며 나는 카나리아 한 쌍을 사올 것이다. 그리고 다시 열심히 물을 주고 모이를 줄 것이다.  


#카나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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