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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안팎의 싸늘한 바람은 잦아들 기미가 없다. 회색빛 짙은 먼지로 온통 뒤덮인 묵시록 같은 세상에서, 홀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예술가의 뒷모습은 초라하기만 하다. 좌절과 절망의 늪은 더욱 깊어지는 것만 같고, 누굴 원망하거나 탓할 기력조차 다할 만큼 조로해 버렸다. 지나친 비관이 아니냐고, 실낱 희망은 버리지 말라는 입바른 충고마저 공허하다. 돈으로 환산하지 못 하면 더이상 예술도 찬밥인 시대가 아니던가! 감상이 길었다.

어김없이 계절의 봄은 오고 있으나, 특히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 예술과 문화 영역은 여전히 춥고 배고프다. 중소도시나 군 단위로 가면 쌀쌀함은 도를 더한다. 이는 인구수 감소와 창작 여건의 불편함이 주요 원인일 테지만, 지역 예술가들이 대중과 만날 매개체가 턱없이 부족한 탓도 크다. 그렇다고 쥐꼬리 만한 정부 지원사업에 기대어 이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지역 내부에서 온전히 발화하는 자체 동력이 미진하다면, 예술이나 행사 대행업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먼저 시작한 서울프린지의 사례

그럼 어디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까? 적어도 하나 정도는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이하 서울프린지)의 사례에 있을 거 같다. 서울프린지는 1998년 서울 대학로 일원에서 열린 '독립예술제'가 그 시작이다. 상업성과 순수 지상주의 예술에 문제의식을 갖고, 이른바 '인디' 혹은 '언더그라운드' 예술가들의 '문화 반란'이 생겨난 것이다. 축제는 해마다 당면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계속 진화하고 있고, 올해 여름에도 어김없이 맥을 이어 열린다. 특히 이들이 가치로 내세우는 '대안, 비주류, 개방, 미래' 등은 젊은 축제 특유의 패기와 도전정신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하는 건 '독립'이라는 내용과 '축제'라는 형식이다. 물론 독립 예술을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자본과 권력에 대항하는 것부터, 주류에 야합하지 않는 정신,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는 경향, 도그마와 이념에 경도되지 않는 몸부림에 이르기까지 결코 만만치 않은 개념이다. 극한 예로는 '독립'에서 독립하려는 '탈독립'의 시각도 포함할 것이다. 그럼에도 모두가 동의하는 건 무엇보다 예술의 가치를 끊임없이 되묻는 자성의 태도일 것이다.

2009 서울프린지페스티벌 포스터.
 2009 서울프린지페스티벌 포스터.
ⓒ 서울프린지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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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맥락에서 '독립 예술'은 모종의 돌파구가 절실한 '지역 예술'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기 존재 이유를 상기하면서 '지역 문화'의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 내용을 고민하는 것 말이다. 가령 예를 든다면, 숨어 있는 지역 예술가를 발굴한다는 점에서, 중앙과 지방을 나누는 기존 이분법의 대안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혹은 이른바 '시민 예술가'의 등장이라는 측면에서 등등. 이렇게 지역 예술과 독립 예술이 접점을 찾아 다양한 내용이 모이고 덧붙여지면, 이젠 이를 담아낼 형식을 고민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서울프린지의 진정한 매력은 다양한 예술 장르가 축제로 만나는 것이다. 서로 충돌하고 연대하고 초월하는 시청각·공감각·다원 예술의 잔치 마당은 흥미진진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예술인단체의 경계를 넘어서, 전문예술인과 아마추어 예술가의 구분을 넘어서, 아시아 독립 예술가들의 연결망을 향해서, 한걸음씩 내딛는 행보는 열세살짜리 치고는 꽤 듬직해 보인다.

무모하여 실패할 것만 같던 축제를 본궤도에 올려놓은 젊은이들의 경험과 시행착오는 소중한 자산이다. 이 자산을 서로 꾸준히 공유할 수 있다면 지역 예술도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다. 지역의 독립 예술 축제가 진정 필요한 이유인 셈이다.

현실 가능한 여건 만들기

그럼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먼저 준비 인력이 꾸려지고, 문제 의식도 상당 부분 공유해야 할 것이다. 뜻이 맞는 지역 예술가들의 느슨한 협의체가 분명 시작이 될 순 있다. 기간과 장소를 정해 해마다 한번 정도 조촐하게 자신들의 작품을 내놓고 시민들과 만나보자는 취지라면 좋은 시작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시도가 지역에서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특정 장르에 치우쳐 있거나 전문 예술축제로 가기에 시야가 너무 좁다. 한편 축제 장소를 굳이 광역도시 이상으로 고집할 필요도 없다. 길게 보며 새롭게 축제 공간을 창출하려는 색다른 시도를 주저해서도 안된다. 접근의 편리함을 들어 중소도시 혹은 군 단위라고 마다하는 건 별로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여튼 공들여 힘들게 시작한다고 해도 걸림돌은 많다. 절대로 정부나 관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 서겠다는 원칙이 필요하다. 일반 지지자들의 후원이나 정부 지원사업 정도까지는 몰라도 가난한 지자체의 눈먼 예산을 생각한다면 아예 때려치기를 권한다. 자생력 없이는 성공할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예술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이율배반의 행태가 만연한 현 문화계의 풍토로 봐선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험난한 관문을 통과했다면, 이제 지역 예술을 넓게 보면서 포용과 연대를 고민하고 다양한 실험이 활발하기를 기원하자. 앞서 서울프린지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면밀히 검토하고 부지런히 서로를 비교해 보며 산재한 어려움을 하나둘씩 헤쳐나가 보자. 그러다 보면 다른 지역과도 연결망을 구축하여 상호 협력하고 상생할 수 있는 여력도 생겨난다. 이제 축제의 성장과 성공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 예술가에게나 창작의 고통은 당연히 짊어져야 하는 숙명이지만, 인고로 낳은 작품이 어떻게 미지의 대중들과 소통하고 대화할 지는 언제나 서툴고 어렵기 그지 없다. 누군가 나서 그 매개 역할을 해주는 게 예술의, 특히 지역 독립예술의 활성화가 아닐까 한다. 과연 감상이 길면 몽상도 커지는 법일까! 젊은 몽상가들의 멍청한 도전을 기원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새전북신문>과 개인 블로그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지역예술, #서울프린지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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