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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대도시를 관통하는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얼마 멀지 않은 곳 강가에, 버려진 낡고 흉물스런 공장이 있다면…. 또 인근에 얼음이나 포도주를 보관하던 창고들이 삭막하게 길게 늘어서 있다면….

과연 이 '땅'을 갖고 있는 시(市)나 정부의 관료라면 어떤 용도로 개발할까? 특히 2010년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에서 과연 이 땅에 국립도서관을 세우고, 신세대 아티스트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실제로 실현시킨 도시가 있다. 버려진 쓰레기 더미 같은 곳에서 꽃이 피어나듯 새롭게 문화의 공간으로 탄생시킨 곳,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도시, 바로 파리가 그곳이다.

지금은 새로운 도시 계획안이 필요한 때

 프랑소와 미테랑 국립도서관
프랑소와 미테랑 국립도서관 ⓒ 지은경

파리의 세느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다 보면 12, 13구에선 공장과 낡은 창고들, 버려진 운반선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삭막한 이미지'를 자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프랑스의 국립도서관이 생겨났다. 그 도서관의 이름은 '프랑소와 미테랑 국립도서관'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니크한 콘셉트를 가진 도서관으로, 사람들은 이곳을 구경하기 위해 지하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야만 하는 수고로움까지 감수한다. 곧이어 새로운 건물들과 길들이 도서관 주변에 생겨났고 새 이름들이 길에 붙여졌다.

중심으로만 모이려는 파리의 인텔리 계층의 구미를 당기는 무언가가 변두리에 생겨나야만 했고, 그 시작의 척도가 바로 프랑소와 미테랑 국립 도서관이었던 것이다.

프랑소와 미테랑 국립도서관
(Bibliotheque Nationale Francois-Mitterrand)
지난 1989년에 행해진 도서관 건축 콩쿠르에 세계에서 모인 높은 거장들의 경쟁률을 젖히고 입상한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rault). 당시 그의 나이 겨우 36세였다.

그의 건축 아이디어는 심플한 가운데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책을 반쯤 펴서 세운 모양의 타워를 양 사각형의 네 사이드에 세우고 그 사이에 정원을 조성하였다. 건물 안의 숲이라는 새로운 자연 친화적인 콘셉트가 주 아이디어였다. 숲을 중심으로 하여 사면으로 설계된 타워 하단 부분의 열람실은 유리로 구성되어 책을 읽고 학습을 하는 동안 자연의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층층이 내려가는 하단 부분의 열람실에서 책을 찾아 주문하면 고속 서치 머신이 네 개의 타워 층마다 저장된 책들을 자동으로 빼 온다. 책들은 오랜 보관을 위해 기계 안에서 빛이 차단된 책꽂이에 보관되며 온도와 빛의 양을 완벽하게 조절하기 위해 건물의 유리창에는 나무로 된 블라인드를 설치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높이 샀던 당시 프랑소와 미테랑 대통령은 젊은 도미니크 페로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젊은이를 선택한 그의 모험적인 판단이 틀리지 않았었음을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람들을 감동시킴으로써 증명했다. 열람실에 자동 온도 조절 방식을 도입하고 각 열람자의 쾌적하고 넓은 공간을 위해 특수 인체 공학 가구가 디자인되었다. 네 개의 타워는 12cm 두께의 안전유리로 보호된 22층, 80m 높이의 거대한 규모이다.

1층으로부터 7층에 이르는 사무실들 위로 끝 층까지 마가장(시장)이라 불리는 막대한 양의 오토매틱 서적 보관 창고에는 프랑스에서 발간되는 모든 양의 책이 구비돼 있다. 이곳은 도서관의 역할뿐만 아니라 비중 있는 전시들과 세미나 등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개최되어 다양한 문화 인사들과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info: Bibliotheque Nationale de France site  Francois-Mitterrand
Quai Francois Mauriac,75706 Paris cedex 13 / Tel :33(0)1-5379-5959 / www.bnf.fr

 '루이스 바이스' 갤러리가.
'루이스 바이스' 갤러리가. ⓒ 지은경

대형 얼음들을 운반하던 길 건너편의 냉동 창고 프리고(FRIGO). 이곳에 아티스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에 아티스트들의 아지트가 건설되면서 파리 사람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게 된다.

바로 프랑소와 미테랑 국립도서관의 반대편에 '루이스 바이스(Louise Weiss)'란 이름으로 새롭게 단장된 길 옆엔 대형 공장들을 개조한 신세대 갤러리들이 하나 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갤러리가 '루이스 바이스(Louise Weiss)'
루이스 바이스 가는 예전에 지어졌던 커다란 공장들을 새로운 주거 단지와 사무실들로 개조하면서 탄생된 역사가 가장 짧은 길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중요한 길들 중 하나로 자리 매김을 했다.

그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이 바로 젊은 사고를 하는 갤러리스트들이었다. 파리의 중심, 현대 미술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생제르망의 고전적인 예술 고정관념을 탈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당시 가장 값이 저렴하고도 가능성을 가진 동네, 13구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전 화랑가에서 등한시하던 젊은 작가들의 발전성 있는 작품들을 모아 갤러리를 꾸몄다. 도서관이 생겨남으로 인해 많은 발전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변두리의 화랑가는 어느 사이 젊고 유능한 작가들의 전시를 대변하는 대명사처럼 불리기 시작했다.

이곳의 큰 콘셉트는 작은 화랑들이 함께 안내서와 팸플릿을 제작하여 아트 매거진의 역할을 하며 모든 화랑의 오프닝을 공동으로 개최해 저렴한 비용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을 화랑에 방문시키는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비디오와 설치, 멀티미디어 작업들을 주로 선보이는 이곳에서는 현재 가장 주목받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만나 볼 수 있으며 여러 가지 현대 미술과 디자인의 일반적인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

Info: Louise
11, rue Louise Weiss 75013, Paris / France

이처럼 파리는 다양한 문화 사업을 위해 그 세력을 확장해야만 했다. 그리고 파리의 경계선 바깥의 지역을 파리로 합류시키는 작업을 오랜 시일에 걸쳐 시행했다.

 베르씨 빌리지.
베르씨 빌리지. ⓒ 지은경

특히 이곳 강 건너편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파리가 아니었다. 이곳엔 포도주 업자들이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파리 바깥에 세운 포도주 저장 창고들이 많이 있었다. 외관은 보존하고 내관을 새로 단장하는 작업이 행해지면서 그곳은 사람들로부터 큰 관심을 불러모았다.

베르씨 빌라지(Bercy Village)
파리의 12구가 파리로 합류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중세 시대, 이곳 베르씨(Bercy)라는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큰 포도 재배 시장과 정원, 파티 등으로 사람들의 즐거움과 활기가 항상 넘치는 부유한 동네였다. 1859년 파리 리용의 기차 노선이 생기면서 교통이 편리해지자 이 지역은 포도주의 사업을 위한 장소로 탈바꿈했다.

포도주 업자들은 파리의 바로 옆이면서 교통이 편리한 이 지역을 매입하여 포도주를 저장하고 인출하는 창고를 지었으며, 그 창고들은 저마다 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보르도 길, 본 길, 마콩 길, 쌩떼밀리옹의 안뜰… 그 길들의 이름은 그들의 원산지를 뜻하는 말로 이름만으로 그 창고가 어디 지방의 포도주인지를 알 수가 있었다.

이 지역은 점점 포도주의 저장 창고로의 쓸쓸한 분위기를 조성하였고, 도시가 정립되면서 베르씨 시가의 땅값이 오르자 포도주 업자들은 더 이상 많은 돈을 지불하며 포도주를 저장할 수가 없게 되었다. 포도주를 저장하던 창고들은 그나마 그들의 역할마저 잃게 된 것이다. 베르씨는 한 마디로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동네가 되었다. 창고의 형태를 갖춘 곳을 집처럼 꾸미기는 너무나 무리였고, 상점 하나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 사람들이 터전을 꾸미기란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렇게 방치가 된 채 베르씨는 그렇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 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던 중 파리의 남동쪽에 불기 시작한 바람을 타고 이곳은 새롭게 거듭날 채비를 하게 되었다. 도시 개발의 중요한 계획 지점으로 베르씨가 포함되고, 가장 저렴한 예산안에서 가장 높은 효과를 내어야 했던 정부는 이곳의 외부는 보존한 채 내부만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또 상점들을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한 회사들에 싼 가격으로 판매하면서 약 5∼6년에 걸쳐 모든 베르씨 빌라지가 완성되었다.

빌라지의 입구는 파리에서 가장 큰 영화관이 최첨단의 건축으로 탄생하였다. 따라서 파리의 남동쪽에는 파리의 대표 영화관 3곳, UGC, GAUMONT, MK2 등 파리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지점이 나란히 경쟁을 하게 되었다. 영화관 앞으로 뻗어나가는 큰길의 양 사이드에는  인테리어숍, 테라피숍, 의류숍, 펫숍,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위한 대규모의 식물숍 등의 체인이 생겨났으며, 이곳의 옛 전통에 따라 최고의 포도주를 대접하는 레스토랑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info : Bercy Village / cour saint-emillion 75012 Paris / www.bercyvillage.com

파리에서 가장 큰 영화관이 생겨났다. 삶을 더욱 더 아름답고 감성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상품들을 파는 로하스 숍들과, 고급 레스토랑이 탄생했다. 가족을 위한 거대한 공원을 만들어졌고, 그 동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을 심고 오리를 풀어놓았다.

동네의 전반을 새롭게 꾸미는 작업으로 아름답지만 과학이 함께 응용되어 더욱 높은 효율성과 기능, 그리고 미를 갖춘 최고의 유토피아적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베르씨 파크.
베르씨 파크. ⓒ 지은경

14호선 지하철(cour saint-emillion)에서 나와 직진을 하게 되면 베르씨 빌라지가 나오고, 왼쪽의 문을 통해 들어가면 아름다운 공원에 나와 한가한 한나절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오리들이 호수에서 깃털을 손질하며 둥둥 떠있고, 그 오리들을 잡으려는 아이들과 일본식 정원과 정자도 볼 수 있다.

여름철엔 희귀하게 생긴 온갖 꽃들이 만발하게 피고, 아이들을 위한 작은 동산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이다. 공원은 길 건너편으로도 이어져 두 공원과 공원 사이를 높은 육교로 연결시켰다. 그로 인해 그동안 미비한 고속도로의 신호등 시설에 대한 문제를 해소했다.

무엇보다 그 매력적인 모든 곳을 파리 중심에서 12분 만에 연결하는 초고속 메트로가 생겨났다. 더구나 지상으로 다니는 6호선 구식 전철 노선도 더욱 늘려 그 동네를 가로지르게 했다. 그곳은 파리에서 가장 좋은 교통망을 가진 지역이 되었다.

본래 파리의 13구는 오래 전 정부에서 신개발을 위해 고층 빌딩을 대량으로 지었던 곳이다. 그러나 로맨틱한 데코레이션에 길든 파리지엔들에게 그곳은 삭막한 회색 시멘트 덩어리일 뿐이었다. 다른 지역을 향해 프랑스인들이 빠져나가자 그곳은 자연히 땅값이 하락했고 그 틈을 타 중국인들이 몰려들기 시작, 파리의 두 번째 차이나타운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예전 파리의 바깥쪽, 지금의 12구는 세금을 줄이려는 포도주 업자들의 창고로 보르도 등지에서 운반된 포도주들을 저장했던 곳이다. 프랑스는 화려한 도시 파리의 버려지고 후퇴한 이 한 귀퉁이를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은 오랜 시간과 노력, 국민 투표를 바탕으로 변화의 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하나하나의 요소가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도시의 조화를 깨지 않을 안목이 기본이 돼야 했다.

동네 주변의 변화하는 풍경들

 주변의 변화된 풍경.
주변의 변화된 풍경. ⓒ 지은경

이곳 파리 동네 12, 13구는 변화하는 도시의 리듬에 맞추어 주변 또한 많은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허름한 건물들은 일제히 낡은 기운의 때를 벗고 유리 소재의 모던한 아파트들로 리노베이션 되었다.

도서관 앞의 세느강은 몇 척의 배가 정박되어 있다. 사람들이 도서관에서 낮을 보낸다면 이 배들은 그 이후의 밤을 신나는 뮤직 페스티벌로 마무리 짓는다. 젊은 음악가들과 밤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바토파(Batofar)라고 불리는 배와 영국식 이층버스가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길 건너편 냉동 얼음 창고인 프리고(Frigo)는 활기 넘치는 아티스트들의 아지트가 되어 연중 많은 행사를 벌이며, 그 작업실의 문을 수시로 개방한다. 정부는 비싼 작품을 매입하기보다 유망한 신진작가들이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곧 다가올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디자인 도시 서울'은?

한 동네를 바꾸기 위해 파리시는 많은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의 공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탄생시키기 위해 긴 시간을 심사숙고했다는 점이다. 번쩍거리는 화려한 외관이 아닌 좀 더 사람들에게 좋은 서비스를 주기 위한 정신에서 출발했다는 점은 모든 건축가와 아티스트들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아울러 21세기 현대의 사회에 아름다운 도시 건설을 이루기 위한 본보기도 될 것이다.

과거의 유산을 지키고 기억하려는 노력은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과거를 본보기로 삼아, 아름다운 것들을 불편을 감수하고 지켜가면서 우리의 마음은 좀 더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는 과거가 아닌 지금, 현대이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역사를 어떤 식으로 진행해 나갈 것인가가 바로 관건이다. 쓸모 있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작은 아이디어가 오늘의 파리, 전통적임과 모던함이 함께 묻어나는 아름다운 도시를 세우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하나에서 시작하는 작은 개혁은 사람들을 흔들지 않고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이루어진다. 그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어 어느덧 큰 문화의 시너지 효과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서울, 아무리 높은 건물을 지어봤자 서울이 뉴욕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로하스(LOHAS : Lifestyles of Health and Sustainability) 방식의 삶을 고려해 볼 때 높은 건물 짓기란 참으로 뒤늦은 발상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조금의 인내심이 있었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삶을, 그리고 도시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가? 빨리 빨리를 외치지만 앞서가는 선진국들의 기발한 발상과 비교하면 우리 정부는 아직도 시대를 착오하고 있는 느낌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유럽에 불던 자연친화적, 로하스의 바람이 지금 한국에 불고 있다. 그리고 서울시는 앞서 높은 건물 짓기에 발벗고 나선다.

불편한 진실, 우리는 아직 그것을 감수할 준비가 안된 것일까? 바꾸고 뜯어고치기에 앞서 우리가 가진 고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무엇을 반성하고 무엇을 바꾸어 나가야 할지, 그리고 국민들은 무엇을 원하는지, 즐거운 마음으로 의견을 교환하며 함께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 변화와 개혁은 개인의 야심이 아닌 진정 국가를 위해 오랜 시간을 들이는 인내심 또한 요구된다. '디자인 도시 서울'이라는 타이틀을 내걸며 세계적인 건축가들과 디자이너를 끌모으기에 앞서 우리의 디자인 현실이 어디쯤에 와 있는지를 먼저 깨닫고 우리 안에서 그 시작을 이끌어 낸다면 무리한 돈을 들여 디자이너들을 초청하지 않아도 그들이 우리를 찾게 될 것이다.

효과적인 광고라며 연예인들을 끌어들여 얄팍한 관심을 살 것이 아니라 유망한 젊은 작가들에게 투자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끝없이 창출해야 할 것이다. 허술한 기본을 바탕으로 포장만을 그럴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을 들여 충실한 내면을 구축하도록 보이지 않는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거품 경제가 순식간에 허물어졌듯 도시 전체가 거품과 허영으로 잠식될 날을 맞게 될 수도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좋은 것을 선택하려는 노력에 앞서 무엇이 진정 좋은 것인가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자들의 학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안목 높은 관료들이 안목 높은 나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지은경 기자는 지난 2000~2005년 프랑스 파리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2003년 프랑스 아르데코 멀티미디어과를 졸업했습니다. 지난 2005~2007년 클레이아크 김해 미술관 홍보팀장으로 활동하며 전시 기획을 했습니다. 최근 경상남도 외도 전시 기획을 마치고 유럽을 여행 중입니다. 미술, 건축, 여행 등 유럽 문화와 관련된 기사를 쓸 계획입니다.



#도시 개발#파리#동네 12, 13구#서울#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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