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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장군 사당 입구에는 이곳이 최영 군대가 주둔하던 곳이라는 것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 사당 입구 최영장군 사당 입구에는 이곳이 최영 군대가 주둔하던 곳이라는 것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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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면사무소 앞에는 최영장군 사당으로 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이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가면 추자초등학교를 지나 최영장군 사당에 이른다. 이 사당은 고려 후기 탐라에서 고려 조정에 대항하는 세력이 발호할 당시 추자도가 탐라를 장악하기 위한 교두부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추자도 주민들이 매년 제를 지내는 최영장군 사당

최영장군 사당 입구에는 이곳이 과거 최영일행이 주둔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사당 안에는 '조국도통대장최장군신위(朝國都統大將崔將軍神位)'라고 적혀있는 비와 함께 최영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최영장군이 추자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374년 최영장군이 탐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원나라의 목호(말을 키우는 목자)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제주를 오가면서다.

추자면사무소 앞에 있다.
▲ 이정표 추자면사무소 앞에 있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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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에 전해 내려오는 민담에는 추자도에 고기가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섬의 백성들이 낚시 방법을 몰라서 배고픔에 허덕이는 것을 본 최영이 주민들에게 칡넝쿨 속껍질로 그물을 만들어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주민들은 그 은덕을 기리기 위해 1년에 한차례 이 사당에서 제를 지낸다.     

그런데 최영 일행이 추자도를 다녀가기 100년 전 쯤 이 섬을 먼저 다녀간 병사들이 있다. 고려 조정이 몽고에 굴복하는 것에 반기를 들고 반원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삼별초가 그들이었다.

1270년 여몽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도성이 함락되자 제주로 들어온 삼별초는 한반도 해안에 침투하여 공물 운반선이나 병선을 약탈하며 조정을 긴장시켰다.

추자도를 가장 먼저 장악한 건 삼별초

삼별초의 저항이 극렬해지자 1272년 3월 고려 원종은 금훈(琴熏)을 제주역적초유사로 임명하여 삼별초를 회유하고자 했다. 하지만 금훈 일행은 탐라로 가던 중 삼별초 대원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고려사>에는 삼별초측이 "사신의 배를 빼앗고 탔던 사람들을 모두 잡아서 자신들의 배에 옮겨 싣고는 항복하라는 초유문서를 압수하고 제주도로 보내어 김통정에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김희취 등이 금훈 일행을 데리고 그 길로 추자도에 이르러 그들을 구류하여 감시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삼별초는 금훈은 낡은 배에 태워 돌려보내고, 나머지 수행원들은 모두 살해하였다. 고려에 항복할 뜻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조치였다.

삼별초 대원들이 제주도에 있는 김통정의 회보가 당도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금훈 일행을 추자도에 장기간 억류했던 것으로 보아, 이 섬이 당시 삼별초의 주요 활동기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별초에 대한 회유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원나라 세조와 고려 원종은 삼별초를 토벌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고려 장수 김방경과 원의 장수 흔도, 홍다구 등이 1만여 병력을 이끌고 탐라 정벌에 나섰다.

과거 탐라를 공략하려는 자들은 우선 추자도를 교두부로 삼았다. 김방경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이나 최영이 이끄는 토벌군이 공히 탐라를 공략하기 전에 추자도에 들어와 때를 기다렸다.
▲ 예초리에 남아 있는 옛 포구의 흔적 과거 탐라를 공략하려는 자들은 우선 추자도를 교두부로 삼았다. 김방경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이나 최영이 이끄는 토벌군이 공히 탐라를 공략하기 전에 추자도에 들어와 때를 기다렸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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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3년 4월, 여몽연합군은 나주에 집결한 후 탐라로 향하는 길에 추자도에 정박하며 시간을 기다렸다. 추자도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일격에 삼별초를 압도하려는 계획에서였다.

여몽연합군, 추자도를 교두부 삼아 삼별초를 공격해

여몽연합군이 추자도에 입도하는 과정에서 삼별초군과 연합군 간에 교전이 있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여몽군이 진격해올 것을 알아차린 삼별초군이 사전에 제주로 철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의 대규모 화공을 당해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3년에 걸쳐 이어졌던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막을 내리고 제주는 원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1276년에 이르러서는 제주의 수산평에 몽골식 목장을 개설하여 몽골의 말, 소, 낙타, 나귀, 양 등을 방목했고 목장의 관리를 위해 원의 목호(牧胡)들을 파견하였다.

이후 제주에서 길러진 말들은 원의 조정과 고려 조정에 진상되었다. 그밖에도 원과 고려에서 파견된 관리들은 제주사람을 선박건조 사업에 동원하기도 했고, 이들로부터 각종 토산물을 착취했다. 제주 역사상 민초들이 가장 가혹한 착취에 시달리던 시기다.

그리고 100년의 세월이 흐르자 중국에서 원의 세력이 약해지고, 그 자리를 명이 대신하게 되었다. 이에 편승하여 고려 조정에서는 공민왕 주도로 반원자주의 바람이 불었다.

고려조정은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제주산 말을 명나라에 진상하려 하였는데, 그때마다 제주에 남아있던 원의 목호들이 반기를 들었다. "조국(원나라)의 원수국에게 말을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1374년에 이르자 명나라 황제가 사신을 고려로 보내 북원(몽골)을 정벌할 때 필요한 말 2000필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지만, 목호들의 반대로 고려조정은 원의 요구에 응하지 못했다.

사당 안에 모셔져 있다.
▲ 최영장군의 영정과 비석 사당 안에 모셔져 있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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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로 명나라와 고려의 관계가 악화될 위기에 놓이자 공민왕은 문하찬성사 최영을 삼도 도통사로 삼아 목호들을 토벌할 것을 명했다.     

공민왕으로부터 탐라를 정벌하라는 명을 받은 최영은 314척의 전함과 2만5천6백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제주를 향해 떠났다. 항해 도중에 세찬 바람을 만난 최영 일행은 어쩔 수 없이 추자도에 배를 대었다. 어두운 날씨에 돌풍까지 불어 벼랑의 바위에 부딪쳐 배 30여척이 파손되기도 했다.

추자도에서 출발한 최영 일행은 비양도 앞바다에 상륙하여 석질리필사, 초고독불화, 관음보 등이 이끄는 반란군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렀다.

백전 노장 최영, 바람 때문에 섬을 떠나지 못했다

목호의 난을 진압한 최영 일행은 9월에 이르러서 제주를 떠나고자 하였으나, 대화탈도 인근에서 사나운 바람을 만나 다시 명월포로 돌아왔다. 그리고 순풍을 만나자 출항하여 추자도에 정박하였다가 전라도에 이르고자 했다. 하지만 추자도를 출항할 때마다 사나운 바람을 만나서 다시 추자도로 회항을 세 차례나 반복 하였다.

추자도 주민들 사이에는 최영장군이 목호의 난을 진압하고 난 후 돌아가는 길에 추자도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주민들은 그의 은덕에 감사하는 뜻으로 매 년 이 사당에서 제를 지낸다.
▲ 최영장군 사당 추자도 주민들 사이에는 최영장군이 목호의 난을 진압하고 난 후 돌아가는 길에 추자도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주민들은 그의 은덕에 감사하는 뜻으로 매 년 이 사당에서 제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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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장군이 주민들에게 그물로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줬다는 것은 1374년 9월에서 10월 사이 최영 일행이 추자도에서 후풍하던 시기를 반영한 이야기다. 그런데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백발의 장수가 섬 주민들보다 고기 잡는 기술을 더 잘 숙지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잘 납득 되지 않는다.

제주에서 추별경차관으로 근무했던 금남(錦南) 최부(崔簿)가 남긴 시의 일부다.

송악의 임금이 일어나 흑금(黑金, 난을 일으킨 목호들을 의미)을 쓸어내고
미리 먼저 돌아가 그들의 보배를 바쳤네
어찌하여 난을 일으켜 도망하는 늪이 되어
흘러 들어온 호원(胡元, 몽골제국)에게 나쁜 물 깊이 들었나.

섬 포구에 후풍하던 김방경
명월포 끝의 도통사 최영
앞서거니 뒤서거니 깃발로 바다를 덮고 오니
그에 대하느라 난에 염증 난 그 마음 알겠구나.  -최부의 <탐라시 삼십오절구>중 일부

최부는 최영장군이 목호를 토벌한 지 약 80년 후에 태어난 조선의 문신이다. 삼별초를 토벌하러 오던 김방경에게나, 목호를 토벌하러 오는 최영에게나 제주 사람들이 염증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라는 대목은 당시 제주민초들의 정서를 사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고려사>에는 최영의 목호토벌 이후에도 마필진상에 반기를 든 수많은 반란이 기록되어 있다. 최영일행이 당시 민초들에게 결코 호감이 가는 존재들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추자도 주민들이 이곳에 사당을 세워 망국 고려의 충신 최영의 은덕을 기리게 된 것이 어쩌면 훗날 충효를 중시하는 조선 성리학자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던 조선 조정에 반감을 품고 있던 민초들의 기억 속에서 최영에 대한 허구를 생산해낸 결과가 아닐까?

<계속>


태그:#추자도, #최영사당, #삼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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