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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고요. 뜨거운 침묵의 외침. 김영갑의 사진 속에는 태초의 근원까지 거슬러 오르는 생명의 에너지가 춤을 춘다. 조용히 맴돌다가 어느 순간 여기에 내가 있다고 외치는 보이지 않는 바람. 고요한 대지와 산과 들을 뒤흔드는 존재의 춤사위. 숨죽여 있던 생명의 고동. 정지된 사진 속에 담겨있는 그 강렬한 생의 증명들. 평생을 수도승처럼 떠돌던 숭고한 예술가의 영혼이 작품들에 담겨 부활했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우리의 곁에서 시간을 초월해 살아 숨 쉰다.

제주도의 자연을 약 3:1 파노라마 와이드 프레임에 담아낸 김영갑 선생의 작품
 제주도의 자연을 약 3:1 파노라마 와이드 프레임에 담아낸 김영갑 선생의 작품
ⓒ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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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했던 시절.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자유롭게 말하는 것조차 두렵던 시절. 젊은 사진작가는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랑에 빠졌다. 순간의 황홀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와 함께 자연을 떠돌았고 필름을 사기 위해 굶주린 배를 부여잡으며 막노동까지 해야 했던 예술가. 사진 현상을 위해 들른 시내 제과점 앞에서 고소한 빵 냄새를 맡은 후 들판으로 돌아와 무와 당근으로 허기를 채워가며 남긴 작품들. 안정된 거처도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간첩으로 몰려 감시당하며 온갖 무시와 냉대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기다림. 그는 사진 한 장을 위해 몇 달 혹은 몇 년을 기다렸다. 그가 포착해낸 것은 한 많은 제주도가 남몰래 숨기고 있던 불굴의 미소. 꺾이지 않는 대자연의 위대함이었다.

"조용한 가운데서도 자연이 속삭이는 움직임이 느껴지는 정중동의 미학이 김영갑의 사진에 내재되어 있다."-오성희(충무 갤러리 큐레이터)
 "조용한 가운데서도 자연이 속삭이는 움직임이 느껴지는 정중동의 미학이 김영갑의 사진에 내재되어 있다."-오성희(충무 갤러리 큐레이터)
ⓒ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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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해오름 들판과 자연을 순례하는 그의 사진은 그야말로 삽시간의 황홀이다. 그는 특이하게도 바람을 찍는 사진가였다. 보이지 않지만 항상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려는 바람이 자연의 모든 생명과 함께 어울리는 그 감동적인 순간을 담아낸 김영갑의 작품들.

그의 작품들 속에서는 대지에 뿌리내려 존재하면서도 말없이 외면당하던 들풀과 바위들조차 신명나는 춤판을 벌인다. 희망 없는 삶이라고 여겨지며 낙오자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암울했던 시대 속에서 그는 끝없이 바람을 찾아 나섰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며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절망하던 희망과도 닮아 있었다.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던 그의 삶 역시 진정 자유인이었다.

처음 김영갑의 사진을 우연히 접하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그 순간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한국에 이런 작품을 남기는 예술가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감탄한 것은 나중의 일이다. 그의 사진 한 장을 본 순간은 물론 작품집을 구해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온전히 느끼는 감동. 신기한 것은 그의 작품을 보면서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난치병에 걸린 말년에도 작품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그는 손수 갤러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루게릭병으로 근육이 굳어가고 있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무거운 돌을 나르며 완성한 공간들. 그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장소 또한 하나의 예술이 되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존재하고 있다. 바로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그를 아끼며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후원을 통해 제주도에서 운영되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고인이 된 그가 생전에 발표하지 못한 작품들 가운데 30점을 전시한 기획전으로 작년 서울의 충무 아트홀에서 먼저 전시했던 것들을 제주도의 두모악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제야 작가의 손길이 담긴 공간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존의 정형화된 회화적 구도를 탈피해 과감한 파노라마 프레임을 사용한 그의 작품들에 대해 충무갤러리 큐레이터 오성희씨는 이렇게 말한다.

전시회장
 전시회장
ⓒ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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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김영갑 사진에서 수평구도와 주제의 단순화는 여백을 만든다. 여백의 의미는 '쉼(休)'이다. 논리적 설명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라, 공기가 흐르는 호흡의 공간이다. 자연을 구성하는 사소한 요소들이 나름의 생존의미를 부여받고,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조용한 가운데서도 자연이 속삭이는 움직임이 느껴지는 정중동의 미학이 그의 사진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작품들은 고인이 1996년부터 촬영하며 남긴 제주도 중산간지대의 파노라마 사진들 가운데 2000년 이후 촬영된 미공개작들이라고 한다. 4월 30일까지 볼 수 있는 이번 전시회의 입장료는 어른 3천원이며 매주 수요일은 휴관일이다. 고독한 예술의 길을 걷다 난치병으로 48세에 세상을 떠나야 했던 김영갑. 그러나 남겨진 작품들은 시대를 초월한 생명력으로 불멸의 감동을 전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스쿨 오브 오마주>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김영갑, #두모악,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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