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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 때문에 아이가 사라졌다

기리노 나쓰오의 <부드러운 볼>

 

ⓒ 황금가지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말로 하지 않고 생각만 했는데, 그게 현실이 되었다. 이런 경우,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인 것 같은 생각을 도저히 떨칠 수 없어 죄책감은 몇 배로 불어나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카스미가 그랬다.

 

사건은 유부녀인 카스미가 유부남인 이시야마와 사랑에 빠지면서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한 때의 불장난이 아니라 서로를 깊이 사랑한다고 믿었다. 사랑에 빠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되는 건 청춘남녀나 유부남 유부녀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두 사람은 위험한 계획을 세운다.

 

이시야마는 밀회장소로 사용하려고 홋카이도에 있는 별장을 산다. 그곳에서 둘만 즐기면 그만인 것을 한 발 더 나아가 두 가족이 그곳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상대방의 아내와 남편이 있는 장소에서 밀회를 즐길 계획을 세웠으니, 무모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대담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두 사람은 별장에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잠든 새벽 후미진 방에서 몰래 만나 사랑을 나눈다. 절정의 순간, 카스미는 '이 남자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아이도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만큼 절실하게 이시야마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게 발단이었을까? 다음 날 아침, 카스미의 다섯 살 난 딸 유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이가 어른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시간은 고작 십여 분도 되지 않았다. 한데 아이는 흔적조차 없다. 아이가 사라지자 별장 동네는 발칵 뒤집어지고, 경찰이 출동했다. 아이 걸음이니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여기고 수색이 시작되었지만, 사라진 아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대체 아이는 어디로 간 것일까? 아이가 사라진 뒤 협박전화가 걸려온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원한에 의한 실종? 이시야마의 아내는 아이가 사라지기 전에 남편과 카스미의 관계를 눈치 챘지만, 경찰에게는 그 사실을 숨긴다. 두 사람의 사이를 질투해서 아이를 유괴한 것이라는 의심을 받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사라지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가정의 평화는 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서로 사랑한다고 믿었던 카스미와 이시야마의 관계도 깨졌다. 불륜은 쉽게 타올랐다가 쉽게 꺼지는 불이었다.

 

이시야마를 안으면서 '이 남자와 함께할 수 있다면 아이도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카스미가 죄책감을 깊이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아니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지 않았다면 아이는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진심으로 아이를 버린 것이고, 그 때문에 아이가 사라진 것이다.

 

카스미는 그런 죄책감 때문에 세월이 흘러도 아이 찾기를 단념할 수 없다. 하긴 누구라도 아이가 실종된다면 쉽게 단념할 수는 없으리라.

 

기리노 나쓰오의 <부드러운 볼>은 실종된 아이를 찾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가 실종된 뒤 변화하게 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실종된 아이의 존재가 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어떻게 끼치게 되었는지, 그래서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집요하게 쫓는다. 한 치 앞도 모르고 사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다. 아마도 작가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부드러운 볼>은 유괴사건을 쫓는 추리소설이 아니다. 추리적인 기법이 가미된 일종의 사회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인지 작가는 끝까지 아이의 유괴범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다. 추리소설을 읽는 입장에서는 누가 범인인지 가장 궁금한데도, 등장인물을 통해서 범인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사건을, 현장을 제시하지만 그 또한 명확한 것은 아니다. 등장인물의 상상의 소산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강한 흡입력으로 읽는 이를 빨아들인다.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제대로 느껴진다. 사건의 전개도 그렇거니와 인물묘사와 심리상태 등이 어찌나 현실감이 있는지, 읽다보면 정말 잘 썼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경제대국 일본에도 밑바닥 인생은 있다

기리노 나쓰오의 <메타볼라>

 

ⓒ 황금가지

한 남자가 오키나와의 밀림을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는 어떤 충격에 의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까맣게 잊었다. 이름은 물론, 나이도 직업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산속에서 아키미쓰와 마주치고, 인연을 맺게 된다. 아키미쓰는 기억을 잃은 그에게 긴지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사람의 인연이란 때론 가볍게 스쳐지나가지만 때론 질기고 질기게 이어지기도 한다. 스치듯 만난 두 사람은 헤어져 각자 살아가게 된다. 이따금 서로를 기억하고 생각하지만 쉽게 만나게 되지 않는다.

 

긴지는 오키나와에서 육체노동을 하거나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서 신분확인이 필요하지 않은 일을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노력하고, 아키미쓰는 잘 생긴 외모를 자산으로 여자들의 호감을 얻더니 결국은 호스트바에서 일을 하게 된다.

 

사회 밑바닥에서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회의 벽은 높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일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저자는 그것을 아주 리얼하게 잘 보여준다.

 

탈출구가 없는 삶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배운 게 없고 가진 게 없는 밑바닥 인생들은 할 수 있는 일도 한정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냉·난방이 잘 되는 사무실에서 우아하고 폼나게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작가는 <메타볼라>를 통해 그런 일본 사회의 그늘을 제대로 조명했다. <메타볼라>는 의미도 있지만 재미도 있다. 역시나 기리노 나쓰오는 보통 작가가 아니다.

 

<메타볼라>는 건축용어 '메타볼리즘(Metabolism. 도시 사회를 생명체로 바라보는 건축학적 관점을 뜻한다)'에서 착안해 작가가 만든 조어로, 본래는 '신진대사'라는 뜻을 가졌지만 작품 내적으로 청년층을 잡아먹고 자라는 현대 사회를 상징한다.


부드러운 볼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남희 옮김, 황금가지(2009)


#기리노 나쓰오#추리서솔#유괴#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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