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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시골에서 나는 농작물이 거래되는 구 군산역 앞 '도깨비시장'은 도시민과 농민, 부자와 가난한 자, 젊은이와 노인들의 커뮤니티가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현금과 물건만 오가는 게 아니라 마음도 오가기 때문이다.

도깨비시장과 가게를 오가며 민물고기와 채소를 파는 아주머니. 전형적인 충청도 말씨에 상냥하고, 일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얼굴도 곱다. ‘됫박 쌀장수’ 정신을 가장 많이 이어받은 아주머니로 보인다.
 도깨비시장과 가게를 오가며 민물고기와 채소를 파는 아주머니. 전형적인 충청도 말씨에 상냥하고, 일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얼굴도 곱다. ‘됫박 쌀장수’ 정신을 가장 많이 이어받은 아주머니로 보인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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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1일 새벽 취재를 하는데 "아자씨는 이 새벽에 어쩐 일이다요!"라며 반갑게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돌리니까 여름에 고구마순과 민물 새우를 사다 먹던 아주머니가 웃고 있었다. "시장 안에 있는 가게는 어떻게 하고 나왔어요?"라고 물었더니 새벽에는 '도깨비시장'에서, 오후에는 가게에서 한다며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새끼들 허고 먹고 살쥬!"라고 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50여 년 전에도 지금처럼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 6시를 전후해서 장이 섰는데, 교통이 좋아지고 경제가 활기를 찾으면서 새벽 2시로 바뀌었다가, 4시로 늦춰지고, 기차가 끊기자 다시 6시로 환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상인들이 취급하는 물품도 '반짝 시장', '새벽시장' 등으로 불리어온 만큼이나 시대에 따라 달라졌고, 장소와 개장 시간도 변화해왔다. 처음엔 쌀 위주로 거래되었으나 식생활이 개선되면서 채소, 나물, 생선, 민물고기 등 거래되는 물품이 다양해졌다.

'도깨비시장' 모체는 '됫박 쌀장수'들  

역사도 길다. 한국전쟁 이후 시골 아주머니들이 집에서 가꾼 채소뿐 아니라 쌀을 이고 나와 팔아서 생선이나 옷감 등 필요한 물건을 사가곤 했는데, 첫차와 오후 기차를 이용해서 오산, 이리(익산)까지 다니며 생계를 유지하는 군산의 '억척 아주머니'들도 상당했다.    

쌀을 '되'로 거래한다고 해서 '됫박 쌀장수'로 불렸던 '억척 아주머니'들은 기차 출발시각에 늦지 않으려고 쌀을 한두 말씩 머리에 이고 민간인 통행금지 구역인 철길을 죽어라 뛰어다녔다. 어쩌다 아기를 등에 업고 뒤뚱거리며 뛰는 모습은 웃음보다는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남편이 술을 좋아하는 삼류 목수여서 수입이 시원치 않으니까 '됫박 쌀장수'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갔던 급우 어머니는 째보선창에서 쌀가게를 하던 어머니를 만나러 집에 자주 놀러 왔는데 당시 동네 사람들 앞에서 했던 얘기가 떠오른다.

"쌀이나 아니나 미친년 엉덩짝만큼씩 팔러 댕김서 기차표 사가꼬 댕길라믄 허천나서 장사 못혀유~. 도둑 차 타다가 차장한티 들키믄 미안허다고 얘기허고 댐뱃값 쪼꼼 쥐어주믄 되그든유. 차장 아자씨들도 우리 처지를 잘 알응게유··"

당시 '됫박 쌀장수' 아주머니들은 20대에서 50대로 세대를 가리지 않았는데, 급우 어머니도 지금쯤은 아흔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도깨비 대동강 건너듯 뛰어다니며 생계를 유지했던 억척 아주머니들이 있었기에 새벽시장이 열리게 되었고, 그들이 '도깨비시장'의 모체일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새벽마다 '쌀시장'이 섰던 '팔마재'

새벽마다 쌀시장이 섰던 ‘팔마재’. 전군도로가 시작되는 군산 입구로 버스 두 대가 겨우 비켜갈 수 있는 좁은 길이었다. 도로변 자가용들이 옛날 수레를 떠올리게 한다.
 새벽마다 쌀시장이 섰던 ‘팔마재’. 전군도로가 시작되는 군산 입구로 버스 두 대가 겨우 비켜갈 수 있는 좁은 길이었다. 도로변 자가용들이 옛날 수레를 떠올리게 한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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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시장'이 서는 구 군산역 앞 광장 사거리에서 '팔마고가도로'가 있던 전군도로(번영로) 방향으로 200m쯤 나가면 건널목이 나오고 오른쪽으로는 '팔마산'(군산고등학교 뒷산)이 보이는데 그 일대를 '팔마재'라고 불렀다. 

마치 여덟 마리 말이 있는 형국이라 해서 '팔마재'라고 했다는데 각종 난개발로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이곳은 군산선과 옥구선이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한데, 길가엔 새벽마다 소와 말이 끄는 수레들이 줄지어 있었다. 

'팔마재' 부근은 '설애장터'와 함께 쓰인 장터였다고 한다. 만경강 물줄기와 이어졌던 설애(京浦)가 강심을 따라 '중동 깨꼬랑'으로 흘러 금강으로 유입되고 이곳에는 날마다 새벽이면 '쌀시장'이 섰던 것. 일명 '팔마장터'.

필자 어머니도 자주 들렀던 '팔마장터'에는 옥산, 회현, 대야 등지에서 쌀과 나락을 수레에 바리바리 싣고 나왔기 때문에 정미소와 수레바퀴 수리소가 많았다. 특히 배가 왕래하던 옛날에는 충남 서천, 화양을 비롯한 금강 연안 농민들도 이곳을 이용했다고 한다.

가난한 서민들이 '됫박 쌀장수'들과 한두 되씩 거래를 했던 역전과 달리 최소 한두 가마에서 수십 가마씩 가래가 되던 '팔마장터'는 군산으로 들어오는 좁은 길가에 자리하고 있어 새벽이면 하얀 무명옷을 입은 시골사람들과 하얀 김을 내 품는 소와 말, 쌀을 가득 실은 수레가 뒤엉켜 장관을 이루었다. '소똥이나 말똥을 밟지 않고는 다닐 수 없는 길'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까. 

'사창가'였던 '역전 종합시장'

구 군산역 플랫폼에서 바라본 역전 종합시장,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사창가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구 군산역 플랫폼에서 바라본 역전 종합시장,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사창가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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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시장'과 이웃한 '구 역전 종합시장'은 80년대까지만 해도 기차역과 공설시장 중간에 위치한 '시파리 골목'으로 불리던 사창가였다. 대명동 '감도가'를 '감뚝', '감독'으로, '시파리 골목'을 '쉬파리 골목'으로 아는 분들이 많은데 바른 표현이 아니다.  

한국전쟁 이후 군부대가 철도 건너 공설운동장과 중앙초등학교에 주둔하면서 생긴 것으로 알려지는 '시파리 골목'을 인근 주민들은 '역전 골목'이라 했다. 명칭도 여성의 몸을 파는 곳이기 때문에 붙었다는 설과 꽃다운 열여덟 살 아가씨들이 많아 불린다는 두 가지 설로 나뉜다. 

일부 아가씨들이 거리까지 나와 호객행위를 하는 바람에 구시장(공설시장)으로 장을 보러 오는 손님들이 지나가는 것조차 꺼려했다. 손님이 떨어지자 상인들이 사창가를 없애든지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는데 사창가가 정리되고 그 자리에 노점상과 점포가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구시장의 확장으로도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처럼 아침저녁으로 도둑 기차를 타면서 생계를 유지했던 '됫박 쌀장수'들의 강한 생활력이 새벽시장에 활기를 넣어주었고, 새벽마다 수레에 쌀을 싣고 나왔던 인근 농민들과 훗날 역전 종합시장이 되었던 사창가도 '도깨비시장'이 형성되는 데 도움이 됐을 것으로 판단된다.   

지리적 요건도 빼놓을 수 없겠다. 군산선이 운행되던 시절에는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기차를 이용해 익산이나 전주로 출·퇴근 하거나 통학을 했고, 기차역 로터리에는 시외버스 터미널이 자리하고 있어 새벽마다 장이 서기에 유리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도깨비시장, #됫박 쌀장수, #팔마재, #시파리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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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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