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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카메라로 핀홀 카메라를 만드는 방법은 이외로 간단했다.

DSLR 카메라의 렌즈를 빼고, 골판지를 잘라 빛이 들어가지 않도록 테잎으로 마운트에 고정시킨 후 바늘로 구멍만 뚫어주면 된다.

 

맨 처음에는 조리개 우선모드(Av)로 놓고 장노출로 사진을 담다보니 카메라에 있는 먼지가 나와 제대로 담을 수가 없었다. 재시도 끝에 자동으로 놓고 찍으니 후레쉬가 터지면서 장노출로 인한 흔들림을 방지할 수 있었다.

 

 

아직 초점을 맞추는 방법까지는 터득을 하지 못했다.

뿌옇게 나오는 사진, 필름카메라보다도 더 고전적인 느낌의 사진이 담긴다.

 

디지털 시대, 빠름의 시대에 아날로그와 느림이 그립다.

경쟁사회에서 지친 마음과 몸이 이젠 그만 좀 괴롭히라고,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옛것을 그리워하는 장치를 발동시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얼마전 필름 카메라의 맛을 느꼈지만, 필름값과 인화, 스캔비용도 만만치 않아 다시 디지털 카메라로 돌아섰다. 빠름에 익숙해진 몸이 기다림, 느림에 어색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게다.

 

 

그런데 DSLR로 만든 핀홀 카메라는 별도의 비용없이 담을 수 있는데다가 바로바로 확인할 수도 있고, 필름 카메라보다도 더 고전적인 느낌의 사진을 주니 일거양득이다.

 

빠름과 느림의 조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조화를 보는 것이다.

식탁에 놓여진 컵, 그들이 나의 첫번째 모델이 되어주었다. 맨 처음 장노출로 사진을 담을 때처럼 먼지도 나오지 않고, 흐릿하지만 제법 형태를 인식하는데는 큰 무리가 없다.

 

 

오랫동안 고물신세, 천덕꾸러기가 되었던 카메라가 다시 생명을 얻었다.

그 카메라는 나의 첫번째 DSLR카메라요, 제주도의 삶을 차곡차곡 담아준 소중한 추억이 담긴 카메라였다.

 

그러나 오랜만의 노동에 지쳤는지 또다시 쉬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요즘 사용하는 카메라로 핀홀 카메라를 만들어 이것저것 담으며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는 내가 그만큼 나이가 들어가는 것임을 알았다.

 

나이 들어감, 언젠가부터는 그것이 그리 부담이 되질 않는다. 오히려 좋다.

그 이전 나이에는 할 수 없는 혹은 느낄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이 풍진 세상의 끝에 다시 시작되는 삶은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도 한몫을 할 것이다.

 

 

30대 후반을 보내고 40대를 맞이할 때에는 몸앓이와 마음앓이가 컸었다.

그런데 이제 40대 후반,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마음이 편안하다.

 

그렇게 마음이 편해진 이유는 나만 나이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나이들어간다는 것때문이기도 하고, 우리 아이들도 세월을 따라 점점 자신의 삶을 자신이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제 조금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일까?

돈 모아놓은 것도 없이 실업자가 되었음에도 그냥 마음이 느긋하고, 날이 풀리면 배낭여행을 할 궁리를 하는 것을 보면 친구들이 뭔가 믿는 구석이 단단히 있는가 보다고 한다.

 

믿는 구석이 있긴 하다.

 

옳게 살고 바른 말 하는 사람, 착취로 돈을 벌지 않는 사람, 뇌물을 마다고 뿌리치는 사람을 사랑하고 도와주시는 그 분을 믿기 때문이다.

 

흐릿하게 보여도 그 안에 나의 생각과 추억이 담겨있다면 그 사진은 내게 소중한 사진이다. 핀홀 카메라로 나름 제대로 담은 첫번째 컵사진, 그 사진은 오랫동안 아날로그의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검정색 절연 테잎으로 마무리를 하면 더 좋습니다. 그리고 핀홀 구멍 갯수에 따라 맺히는 잔상의 수도 구멍수만큼 달라집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 테스트 해 보시기 바랍니다.


태그:#핀홀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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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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