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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봄, 숙지원 텃밭에 메주콩을 심었는데 보름이 지나도 콩의 싹을 찾기 어려웠다. 씨앗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심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마을 아주머니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까치들과 산비둘기들이 씨앗을 먹었을 것이라는 답변이었다. 이미 다시 콩을 심을 시기는 지난 후였다.

땅 놀리기 아까워 팥을 심던 날. 우리가 씨앗을 심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까치들이 주변의 나무에 모여들어 꼭 다른 친구들을 불러 모으는 것처럼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새들이 붉은 씨앗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지만 모인 새들을 보니 자칫하면 팥도 콩처럼 종자를 남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을 아주머니가 일러준 대로 그물망을 사다 덮었더니 새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튼 늦게 심은 팥농사는 비교적 성공이었다. 그물망의 효과 때문이었다.

시금치밭을 덮은 그물망.
▲ 그물망 시금치밭을 덮은 그물망.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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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을에 완두콩을 심던 날. 어디선가 떼거리로 날아온 새들, 까치는 서쪽 나무에서 떠들고 비둘기들은 동쪽 나무에 앉아 아내와 나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정말 "아 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내는 완두콩을 줄지어 심고 나는 흙을 덮으며 새들을 놀리듯 슬슬 반응을 살피는데 새들이 마치 잔치를 기다린 것처럼 재잘거렸다. 분명히 그렇게 보였다.

씨앗을 다 넣은 후 준비해둔 그물망을 덮었더니 새들의 표정이 변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재잘거림이 시들해지더니 새들은 한 마리 두 마리 자리를 박차고 날아가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물망을 펴는 순간 새들은 기다렸던 잔치가 허망하게 끝나버렸음을 알았던 것일까? 새들에게는 다 된 밥에 재뿌린 꼴이요, 받아놓은 밥상이 엎어진 꼴이었을 것이다. "이런 제길……."새들의 욕설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처음 친구들을 불렀던 새를 찾아 혼쭐낼 것도 같았다.

열흘쯤 지나 서리를 이기고 고개를 내민 완두콩 싹을 볼 수 있었다. 그물망을 벗겼어도 이미 싹이 튼 완두콩 떡잎에 새들은 관심 없는 듯싶었다. 지금 완두콩은 손가락 두어 마디쯤 올라왔는데 지금 추위 속에서도 꿋꿋하다. 

연한 잎은 없고 줄기와 뿌리만 남았다.
▲ 새들의 흔적 연한 잎은 없고 줄기와 뿌리만 남았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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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주전 숙지원에 갔을 때 시금치 밭이 이상했다. 몇 군데 시금치들이 잎은 보이지 않고 낫으로 벤 듯 줄거리만 보였다. 산짐승이 내려왔다면 눈 위에 발자국이라도 남겼을 것인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새들의 짓 같다."

그 말에 수긍하면서도 반신반의하는데, 아내는  "작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서 새들의 소행임을 단정했다. 그렇다면 콩을 못 먹게 했더니 시금치로 보복을 해? 마침 놀러온 박영감님께 물었더니  "겨울에는 먹을 것이 없어 새들이 시금치를 좋아한다"고 했다. 어떤 새들인지는 모르겠단다.

새들이 뜯어먹는 장면을 본 적이 없기에 한 참을 숨어서 지켜봤지만 새들이 먼저 안 것인지 빗감도 하지 않았다.

눈 맞은 시금치는 달다. 엽록소가 부족한 겨울철 찬거리로는 으뜸이라며 아내가 애지중지 하는 것이다. 나물도 하고 국거리로도 좋다고 제법 많이 심은 것인데 새들이 노린 것이다.
"그물망을 덮으라"는 박영감의 말에 "양이 많은데 새들하고 나눠먹지요"하고 호기를 부린 것이 잘못이었다. 다시 지난 일요일, 숙지원에 갔더니 온전히 남은 시금치는 반도 되지 않았다.

내가 심은 작물을 살리기 위해 이름 모를 풀들을 잡초라고 베어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콩밭을 지키기 위해 그물망을 씌워 새들을 막았다. 그걸 농사짓기의 법이라고 여겼다.

세상에는 염치없고 수치도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새들에게 염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설마 얼마나 먹겠느냐고 새들의 염치를 기대했다가 당한 셈이었다.

남은 시금치라도 지키자고 그물망을 덮었다. 그러나 고작 새들과 먹이다툼을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들고, 자연속의 한 부분으로 살겠다고 했던 스스로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같아 흔쾌한 마음은 아니었다.

다시 거의 1주일 만인 어제(22일) 숙지원에 들렀다. 주변을 살피는데 시금치를 뜯어먹을만한 새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내가 그물망을 들치고 시금치를 캐도 찾아오는 새도 없었다.

추위를 이기고 파랗게 자란 완두콩이 귀엽다.
▲ 완두콩 추위를 이기고 파랗게 자란 완두콩이 귀엽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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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비닐하우스 농사는 거의 망쳤다. 워낙 추운 날씨 때문이었다. 케일과 배추만 온전할 뿐, 쑥갓과 무는 거의 보이지 않고 상추는 얼어서 쓰러진 것이 어림짐작만으로도 80%를 웃돈다. 이웃과 나누기는커녕 우리 먹을거리도 딸린다고 한다.

그래서 시금치는 겨울철 우리 가족에게 소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물망을 통째로 덮어버린 것은 너무 야박한 짓 같기도 하다. 다음에 가면 그물망의 절반을 치워야 하나? 사람은 가끔 하찮은 일에 심각해질 수 있다더니 지금 내 모습이 그런 것 같다. 추운 날 새들은 어디에서 무얼 먹고 지내는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 필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시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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