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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의 나전칠기 인간문화재 김봉룡 선생(1902~1994). 그는 평생을 개인의 영리보다는 제대로 된 작품 한 점의 탄생에만 몰두했던 장인 중 장인이었다. 때문에 명성에 비해 가세는 어려웠지만, 선생의 고고한 장인정신만큼은 그에 걸맞는 작품과 함께 더욱 빛날 수 있었다. 뛰어난 솜씨, 작품의 독창성, 노력과 끈기로 뭉친 고집 등은 선생을 나전칠기 명장으로 만들기에 충분했고, 지금까지도 선생의 영향을 받은 많은 제자들은 "스승에게서 진정한 장인의 길을 배웠다"고 입을 모아 전한다.

#나전칠기의 맥을 잇다

호는 일사(一沙), 김봉룡 선생은 1902년 음력 1월 30일에 통영시 도천동에서 입자장(관모, 갓을 만드는 장인) 김여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학문의 길을 걷지 못하고 가업을 도왔으며, 나전칠기 분야에는 17세가 되던 무렵 입문했다.

선생의 첫 스승은 조선 말 나전칠기 명인으로 손꼽히던 박정수 선생이었다. 박정수 선생에게서 나전칠기에 대한 전통기법을 사사했으며, 이어 근세 나전칠기의 명인 전성규 선생에게 당초문(唐草文)을 배웠다.

나전칠기 공예가로서 누구보다 돋보인 해외활동은 1924년부터 시작했다. 일본 경도에서 주최한 세계박람회에 문고(文庫)를 출품하여 기념패를 받았으며, 1925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장식공예품박람회에 대화병(大花甁)을 출품하여 은상을 받았다.

또 1927년에는 일본 동경에서 열린 우량공예품전람회에 문고(文庫)를 출품하여 금패를 받았다. 훗날 1977년에는 대만역사박물관 초대전 및 네덜란드 마드로담 초대전을 통해 한국 나전칠기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

1934년부터는 국내 전람회에도 꾸준히 작품을 출품했다.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을 시작으로 제22회 전람회까지 무려 10차례나 입선 및 특선을 차지했으며, 유려하고 독창적인 문양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흉배쌍학무늬 서류함(1965년 김봉룡 作)
 흉배쌍학무늬 서류함(1965년 김봉룡 作)
ⓒ 김봉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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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전성규 은사를 따라 통영을 떠났던 선생은 6·25를 계기로 30여년 간의 일본, 서울 활동을 정리하고 귀향하게 된다. 1956년부터 5년간은 통영시 항남동에 설립된 경남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에 부소장(소장은 도지사)으로 재직하며 후진양성에 힘썼고, 이 양성소는 이후 6~70년대 나전칠기 부흥기를 이끈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열정적인 작품활동으로 각종 대회의 상을 휩쓸며 1967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전통적 나전칠공예 기능보유자로 공표됐다.

그리고 이듬해 좋은 칠(漆)과 원목(原木)의 생산지인 강원 원주로 이주, 당시 유행하던 화학성 칠기를 사용하지 않고 전통 나전칠기의 맥을 잇는 데 전념했다. 당초문(唐草文)을 조선시대보다 한층 더 발전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1994년 타계, 경기도 일산의 응암교회에 묘소가 마련됐다. 

 강원 원주로 떠나기 직전 제자들과 함께 한 기념사진. 첫째 줄 가운데가 김봉룡 선생.
 강원 원주로 떠나기 직전 제자들과 함께 한 기념사진. 첫째 줄 가운데가 김봉룡 선생.
ⓒ 이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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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뿌린 씨앗은 열매를 맺고

김봉룡 선생이 통영에서 수년간 몸담은 경남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는 현재의 장인들을 잉태하는 모태가 됐다.

통영옻칠미술관 김성수 관장이 1기 졸업생이며, 동서공예사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이문찬 선생은 2기 졸업생이다. 동서공예사 김종량 대표는 6~70년대 당시의 유명 공방이었던 동방공예사에서 이문찬 선생에게 사사했으니 이를테면 김봉룡 선생의 손자뻘되는 장인이다.

송방웅 선생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2명밖에 없는 중요무형문화재 나전장 이형만 선생 역시 양성소를 통해 나전칠기에 입문했으며, 김봉룡 선생의 전승자로 모든 기술을 사사한 통영출신 장인이다. 이밖에도 통영을 비롯 전국의 내로라하는 나전칠기 장인들이 상당수 경남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에서 배출됐거나 또는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경남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2기 졸업생 이문찬 선생은 "김봉룡 선생님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분이었지만 제품이 잘 팔린다고 해서 제품 수를 남발하지 않았다. 장인으로서의 고집이 대단했고 한 개의 제품을 아주 독특하게, 몇 달의 시간을 투자해 정성껏 만들어내곤 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엄격한 선생님 아래서 배웠더니 지금도 기계 대신 수공으로 하는 버릇을 못 버리고 있다"며 웃음을 보였다.

또한 최근 통영시는 항남동에 위치한 옛 경남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건물을 구입해 '김봉룡·유강렬·장윤성·이중섭 기념관' 및 '나전칠기 전시관'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경남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는 일반 양성소를 넘어 피난시절 전국의 유명 예술인이 모여들어 예술적 교감을 나누었던 까닭에 기릴 예술인 또한 많은 곳이다.

김봉룡 선생의 장남 김옥환씨는 "아버지의 평생 소원이 나전칠기학교를 건립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경남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에 애착이 크셨다"며 "기념관이 생긴다면 내가 소장하고 있는 아버지 유품을 다수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경남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2기 졸업식
 경남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2기 졸업식
ⓒ 이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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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려투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봉룡#나전칠기#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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