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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구워낸 군밤. 가스 난로에 밤을 구워먹으며 사는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주고받던 8년 전 손님의 우수에 찬 얼굴이 떠오르는 군밤입니다.
 방금 구워낸 군밤. 가스 난로에 밤을 구워먹으며 사는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주고받던 8년 전 손님의 우수에 찬 얼굴이 떠오르는 군밤입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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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떨어져 살던 2001년 12월 이맘때쯤이었다. 그해 10월부터 이듬해 3월 초까지 떨어져 지냈는데, 그날도 시장에 갔다가 국내산 밤이 싸고 좋기에 구입해서 가스 난로에 굽고 있었다. 가게에 혼자 있기 심심해서 무료함을 달래려고 밤 굽는데 재미를 붙이고 소일거리로 삼고 있었는데 손님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이게 무슨 냄새랴? 이상허게 나는디."

손님은 이상한 냄새라고 했지만, 창피하지 않았다. 냄새 주인공은 음식물 썩는 고약한 냄새가 아니고, 하수구에서 나오는 악취도 아니고 어린이에서 노인까지 좋아하는 알밤이 익는 구수한 냄새였기 때문이었다.

"핫따! 그놈들 씨알도 크고 좋고 만요."

손님은 난로 위에서 '찌지~직'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밤을 보니까 정겹고 애틋한 추억들이 떠오르는 모양인지 흐뭇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예, 밤을 구워 먹느라구요. 시장에 갔다가 국내산이라서 조금 사왔습니다."

떳떳한 일을 하는데 옆에서 뭐하느냐고 의심하며 물었을 때의 심정이라고 할까. 웃으며 대답했지만 말 속에는 무슨 잘못이라도 했느냐는 반항심도 섞여 있었다. '고소한 군밤 냄새인데'라며 속말까지 했는데 혼자 지내는 데서 오는 히스테리였는지도 모른다.

손님은 국내산이든 중국산이든 산지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듯 난로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호주머니에서 손목시계를 하나 꺼내 배터리를 교환해달라고 하면서도 시선은 군밤을 향하고 있었다. 난로 위에서 익어가는 밤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밤 구는 거 몇십 년 만에 보는 것 같네, 우리 어릴 쩍이는 말요, 밤 궈 먹는다고 산불도 내고, 남 논밭 두렁 다 태 먹기도 혔어요 하하···."

손님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밤에 얽힌 이야기부터 꺼냈다.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허물부터 말하는 걸 보니까 밤에 얽힌 추억들이 무척 그리운 모양이었다.

"아저씨도 하나 잡숴보세요. 의사가 말하는데 밤이 정력에도 좋답니다."
"하하. 정력요? 이 나이에 정력 있으믄 머 헌다고···."
"아닙니다. 단단한 껍질 속에 있는 열매들은 모두 몸에 좋답니다. 호두, 잣, 이런 거요. 밤도 껍질이 단단하잖아요. 꿀도 밤꽃에서 따는 꿀이 정력에 좋대요."
"글씨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디~ 그르믄 하나만 먹어 보까."

여러 개 중에 알밤을 골라 권했더니 괜찮다며 잠시 사양하더니 웃으며 받았다. 손님은 밤을 먹기보다 굽는 모습에 호기심이 더하는 모양이었다. 나이가 한참 위 손님이지만, 친구가 찾아온 것처럼 친밀감 있게 느껴졌다. 해서 밤을 까먹으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나누다 천천히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저씨는 어디 사셔요? 어디서 많이 뵌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처음 만나면 가장 많이 하는 말 인사라고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얼굴이 눈에 익었다. 그러나 자꾸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얼굴 피부와 손등에서 초로에 접어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말이나 표정은 촌스러웠지만, 나름대로 경우도 있고, 품위도 있어 보였다.

"여기가 고향이니께 길이서 한 번이나 봤겄지요, 나이 먹으니께 집사람 기일 장보기도 힘드능구만. 구시장도 옛날보다 많이 변혀버려가꼬."
"기일이라뇨? 그럼 혼자 사세요?"

입에 발린 말 인사를 했다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격이었다. 나이는 들어 보였지만 혼자라는 말에 다시 바라보았다. 조금 전 밤이 정력에 좋다는 말을 괜히 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미안하기도 하고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처음 볼 때보다 더 늙게 보여 마음이 짠했다. 

"예- 이번이 네 번째 기일입니다. 암으로 죽었어요. 첨이는 머시 먼지 몰르 것드니, 요새는 혼자 사는 티도 나고, 혼자 살기 어려운 것도 쪼꼼 알 것 같습디다."

밤을 까는 손님의 거친 손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창피한 줄 모르고 친구에게 한탄하듯 자기의 자그마한 사생활까지 거침없이 털어놓는데, 답변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갑자기 삭신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그럼 아저씨 혼자 제사 지내세요?"
"아뇨, 메누리가 둘이나 되는디요. 기일 하루나 이틀 전이믄 꼭 안 빠지고 아들허고 애들 데리고 옵니다. 그러니까 내가 미리 장을 봐다 놔야 갸들이 와서 음식을 맹글죠. 밤 하나 더 먹어도 되죠? 고것 먹을시락 맛이 괜찮은디."

손님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난로 위의 밤을 하나 골라 집었는데, 며느리 자랑인지 탄식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손가락 마디가 소나무 그루터기처럼 투박하고 두터워서 어지간한 난로 불에는 델 것 같지도 않았다. 

계산해 보니까 50대 중반쯤 아내와 사별한 것 같았는데, 50대에 홀아비가 된 손님이 쓸쓸하고 외롭게 보였다. 마음 한구석이 찡해왔고, 배터리 값을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와는 무관한 가게 손님인데 왜, 내 머리가 복잡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밤은 한 군디다가 놔두믄 타버려요. 타믄 맛도 없고, 내가 애들 때 고구마랑 밤이랑 아궁지 잿속이다 뒀다가 깜빡 잊어뻐리고 아침이 봉게 재가 돼버렸더라고요. 그려서 하나도 못 먹고 말었어요."

옛 추억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는데, 어렸을 때 작은 실수까지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손님에게 더욱 정감이 갔다. 몇 마디 주고받은 사이에 어려워하던 표정이 사라지고 친구처럼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손님은 골고루 익어야 맛있다며 검버섯이 피기 시작한 손으로 난로 위 밤들을 이리저리 옮겨놓으며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으나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됐습니다. 이천 원만 주세요."
"이거 너무 싸게 받는 거 아뇨? 지난번에 삼천 원 준 것 같은디, 거기다 밤까지 얻어먹었는디 미안혀서 어쩐댜···."

손님은 의자에서 어렵게 일어나 연거푸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나가면서 다시 오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듬해 3월 부산으로 이사하였고, 손님은 그때까지 오지 않았다. 아마 한 번쯤 들렀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셔터가 내려져 있는 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건강은 어떠하며 올해도 아내 제사를 잘 지내는지도.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군밤, #아내,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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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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