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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블로그(blog.naver.com/sixyellow)에 한무제와 관련한 글들의 조회수가 다시 올라가네요. 케이블TV에서 중국의 정통사극 한무제 방영을 다시 시작한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중국 전한의 효경황제가 친딸인 남궁공주를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보내는 에피소드를 봤습니다. 당시 중국은 흉노의 군사력에 눌려 있었습니다. 많은 물품 뿐만 아니라 황제의 딸을 흉노의 대추장인 선우에게 시집 보내는 일은 개국 황제인 고조 때부터 있던 일입니다.

 

그러나 종친의 딸이나 궁녀를 황제의 딸인 것처럼 공주라 칭호를 내려서 시집을 보냈던 것이지 경제처럼 자신의 진짜 친 딸을 흉노에게 보낸 적은 이전에는 없었습니다. 드라마에서는 흉노로 가는 남궁공주가 다음 황제가 되는 한무제와 같은 어머니 소생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한무제와 동복남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황제의 진짜 딸인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에도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한나라는 특히 심해진 흉노의 침략에 몸살을 앓고 있어서,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화친정책을 쓴다고 해서 진짜 공주를 시집보냈고 그 결과로 30년의 평화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 30년 동안 한나라는 군사력을 길러서 흉노를 정벌하는 준비기간으로 삼았습니다.

 

드라마에서는 남궁공주의 마차가 북방 흉노의 땅으로 출발할 때, 어린 황자 유철(후일의 한무제)이 부황 앞에 엎드려 울면서 누이를 보내지 말라고 애걸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통일 왕조가 막대한 조공품과 황제의 친딸을 바쳐야 할 정도로 당시 흉노의 군사력은 막강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막강한 흉노의 최초 피해자는 중국인들이 아닌 우리 한민족의 조상들이라고 합니다.

 

흉노가 처음부터 강했던 것은 아닙니다. 사마천은 흉노열전에서 처음에는 동호(東胡)가 흉노보다 더 강성했다고 소개합니다. 동호의 임금이 말을 요구하면 흉노의 묵돌 선우는 천리마를 바쳤고, 선우의 아내들(연지) 가운데 하나를 요구하는 것도 수용했습니다.

 

방심한 동호가 이번엔 황무지를 요구하자 묵돌은 대대적인 기습공격을 감행해 동호의 임금을 죽이고 아시아 동북방의 패자로 떠올랐다는 게 사기 흉노열전에 있는 내용입니다. 동호라는 이름은 정확한 국가나 부족의 이름이기 보다는 사마천이 '동쪽의 이민족'이란 뜻으로 쓴 것처럼 보입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이 동호를 우리 민족의 신조선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단재 선생의 신조선은 성이 해씨(解氏)인 나라로서 다른 상고사에서 전하는 해모수의 북부여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얘기들을 모두 종합해 보겠습니다.

 

B.C. 3~4 세기 무렵, 아시아 동북방 초원에서 고조선을 대신해 새로운 패권국가로 떠오른 것이 해모수의 북부여(또는 신조선)입니다. 사마천이 동호라고 표현한 북부여의 위세에 흉노 또한 굴복해 말도 바치고 심지어 선우의 아내들 가운데 하나까지 바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흉노 특유의 궁기병 중심 군사력에다 북부여의 방심이 더해져 일거에 패권은 흉노의 묵돌선우에게 넘어갔습니다. 사기에 '동호의 임금을 죽였다'고 했는데 이 문장의 사실 여부를 떠나 북부여 뿐만 아니라 우리 한민족 전체에게 심각한 존립의 위기를 몰고 온 것이라고 봐야 겠습니다. 만약 묵돌 선우가 지속적으로 한반도 방향으로 공격을 계속해 왔다면 우리 민족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 됐을 듯 합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흉노의 표적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막 중국을 통일한 한(漢)나라를 겨냥하기 시작한 겁니다. 덕택에 우리 조상들이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습니다.

 

북부여를 격퇴한 묵돌이 그 다음 거둔 혁혁한 승리가 바로 한고조 유방을 평성에 7일간 가둬놓은 것입니다. 한고조는 묵돌에게 황제의 딸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고 포위에서 풀려났습니다. 한나라 여인들이 대를 이어 흉노로 시집가야 되는 일이 시작됐습니다.

 

아비를 죽일 정도로 잔혹하기는 하지만 국가 운영면에서 묵돌은 매우 유능한 군주였음이 분명합니다. 뛰어난 군사전략을 앞세워 그는 아시아 북방의 모든 유목민족을 통합한 최강자로 군림했습니다. 흉노의 위세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한나라 조정은 그 유명한 망언 편지를 받고도 꼼짝 못하는 처지가 됐습니다.

 

한 고조가 죽은 후, 그의 황후인 여씨가 사실상 모든 권력을 차지했을 때의 일입니다. 묵돌은 여태후에게 "나도 혼자고 그대도 혼자이니 내 가진 것으로 그대의 빈 곳을 채우자"는 국서를 보냈다고 합니다.

 

여태후는 펄펄 뛰면서 정벌하겠다고 큰 소리쳤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하니 진평 등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아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묵돌은 뛰어난 전략가는 돼도 뛰어난 개국 임금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으면서 정기적으로 한나라의 값비싼 물품과 여인을 받아들이는 것에 그쳤을 뿐 흉노의 자손들이 대대로 번창해갈 터전을 마련해 놓지 않았습니다.

 

묵돌 이후에도 흉노의 우세는 수십 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흉노의 선우들은 한나라에서 보내온 물품이 부족하면 변경을 침략해 새로운 화친조약과 조공물품을 이끌어냈습니다. 한나라의 대비태세를 떠본다는 목적으로 한나라 황실의 공주도 끌고 왔습니다.

 

그동안 한나라는 효문 효경 효무 3대 황제를 거치면서 전 대륙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흉노를 향해 집중할 수 있는 준비를 갖췄습니다. 흉노의 선우들이 한나라 비단과 한나라 공주의 품안에 취해 있던 긴긴 세월은 흉노가 조금씩 죽어가는 과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나라의 환관 출신으로 흉노에 망명한 중행렬이란 인물이 남긴 말입니다.

 

"지금 선우께서 풍습을 바꾸어 한나라 물자를 좋아하시게 되면 한나라에서 소비하는 물자의 10분의 2를 흉노에게 쓰기도 전에 흉노는 모두 한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한나라의 비단과 무명을 손에 넣으시게 되거든 그것을 입으시고 풀과 가시밭 사이를 헤치고 돌아다니십시오. 옷과 바지가 모두 찢어져 못 쓰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단과 무명이 털로 짠 옷이나 가죽옷만큼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나 조금씩 중원의 명품에 중독돼가는 흉노의 상류층을 중행렬 혼자 막기는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후일에 가서는 중행렬 마저 한나라의 사신들에게 "여러 말이 필요없다. 한나라에서 보내오는 비단, 무명, 쌀, 누룩을 수량만큼 좋은 것으로만 보내라"고 강조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흉노와 똑같은 혈통의 기마민족의 후예라고들 합니다. 강인하고 용맹한 기마민족의 후예였지만 세월이 흘러 겁 많고 농사나 짓는 민족이 됐습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의 그런 선택은 묵돌의 후예들이 걸어간 조금씩 죽어가는 길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걸 입증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라고 하겠습니다.


#한무제#흉노#북부여#해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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