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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한명숙'이란 이름을 1면톱으로 걸고 수뢰설을 보도한 지 거의 10일이 다 돼 간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내용면에서 얼마나 많은 진전들이 있었을까.

지난 4일 최초 보도 이후, 조선일보 지면에 한명숙 전 총리의 이름이 들어가거나 수뢰설과 관련된 기사는 모두 8개에 이른다(사설 두 편은 제외).

- "한명숙 前총리에 수만弗" (12.04, A1)
- 한명숙 前총리 내주 소환 (12.05, A8)
- '대한통운 비자금' 청와대 前인사비서관 소환 (12.08, A10)
- "한명숙 前총리 준 돈은 인사청탁 자금이었다" (12.09, A10)
- 한명숙 前총리 소환절차 착수 "총리 공관서 돈 받아" (12.10, A10)
- 한명숙 前총리 검찰소환 거부 (12.11, A1)
- 검찰, 한 前총리에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 (12.11, A10)


양적으로만 따지면 결코 적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수에 비해 내용은 빈곤하기 짝이 없다. 처음 보도한 것을 고장난 테이프마냥 재탕 삼탕 사탕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8개 기사 중에 큰따옴표 붙은 것이 절반이나 된다. 사실 확인이 아니라 검찰에서 흘린 소리를 그대로 전달하는 데 주력했단 얘기다.

 

 <조선일보>는 12월 4일자 1면톱으로 한명숙 수뢰설을 보도하고(좌), 
이어 5일자 만평으로 한 전 총리 측의 법적 대응을 비웃었다(우).
<조선일보>는 12월 4일자 1면톱으로 한명숙 수뢰설을 보도하고(좌), 이어 5일자 만평으로 한 전 총리 측의 법적 대응을 비웃었다(우). ⓒ 조선일보

그러면 조선일보가 '한명숙' 이름 석자를 1면 머리기사로 올릴 만큼 나름대로 자신한 그의 혐의는 무엇일까? 한 마디로, 검찰이 비자금 조성 혐의로 구속기소된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한명숙 전 국무총리에게 2007년 무렵 수만달러를 건넸다"는 진술을 확보, 대가성 여부를 수사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는 거다. 이게 4일자 보도 골자다.

앞에 나열한 대로 그 후에 여러 기사들이 더해졌지만, 그러나 새롭게 추가된 내용은 거의 없다. "수만 달러를 건넸다"(4일) > "J고 동문들을 통해 정치권에 로비했을 가능성 있다"(5일) > "한 총리에게 건넨 돈은 5만 달러"(8일) > "5만달러는 인사청탁 자금이었고 직접 건넸다"(9일) > "삼청동 총리 공관에서 줬다"(10일) > "곽 씨의 뇌물진술이 탄탄하다"(11일) 등등, 깃털만 몇 개 보탠 게 전부다.

조선일보가 목 매다시피 한 검찰의 수사 상황도 민망하긴 마찬가지. "대가성 여부를 수사 중인 것으로 확인"(4일) > "돈이 인출됐는지 확인되면 한 전 총리를 소환한다는 방침"(5일) > "빠르면 이번 주 중 소환통보 한다는 방침"(8일) > "사장 임명 과정에 한 전 총리가 어떤 역할 했는지 보강조사 중"(9일) > "한 전 총리에 대한 소환 조사 절차 착수"(10일) > "사법처리 절차 본격 착수"(11일) 등등, 소리만 요란하지 실속은 별로 없다.

이쯤에서 조선일보가 보도한 '한명숙 수뢰설'을 잠깐 정리해 보자. 검찰이 현재까지 확보한 유일한 소득은 "2007년 4월깨 한명숙 전 국무총리에게 인사청탁 자금으로 5만달러를 삼청동 총리 공관에서 직접 건넸다"는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의 진술밖에 없다.

검찰 수사 또한 여기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팩트 자체가 불분명한 한 사람의 일방적 진술만을 토대로 한 전 총리를 소환하네 마네 할뿐.

만약 이런 일이 '이명박 검찰'이 아니고 '김대중 검찰'이나'노무현 검찰'에서 일어났으면 조선일보가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 난리가 나도 단단히 났을 것이다. 괜한 상상이 아니다. 조선일보의 지난 행적이 고스란히 기억돼 있는 데이타베이스를 뒤지면 당장 다음과 같은 호통소리를 들을 수 있다.

"특정 사건에 관해 얘기할 때 구체적인 혐의가 드러남으로써 기소요건을 갖추었을 경우에 한해 언급하는 것이 바른 태도다...형법은 제1백26조에서 검찰과 경찰이 범죄수사 중 지득한 피의사실을 공판청구 전에는 공표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사설, <검찰총장의 「피의사실」언급>, 1998.07.15) 

"이 사건에 대한 검찰수사가 끝나기 전에는 이렇다 저렇다 예단하는 언급을 삼가하는 것이 바른 태도이며 설령 언급을 하더라도 확실한 사실 이외에는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사설, <「총풍」이총재와 관련 없다면>, 1998.10.22)

"발표내용을 국민이 믿을 수 있게 하려면 관련 증거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어떤 경우건 검찰은 증거를 갖고 얘기해야 한다"(사설, <이것이 검찰의 한계인가>, 1998.10.28)

"총선이 다가오면서 갑작스레 정치인 다수가 병역비리에 연루된 혐의가 있다면서 총선 전 수사매듭 방침을 밝히고 나온 그 과정과 정황을 살펴보면 검찰이 아무리 순수성을 강조한들 믿을 사람은 없다...설사 혐의가 있는 피의자라도 법원 확정판결을 받을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는 법정신을 존중해야 한다."(사설, <검찰, 이성 잃었다>, 2000.03.24)

"살아있는 권력, 미래의 권력에는 한없이 약하고, 지나간 권력에는 갑자기 강해지는 우리 검찰의 반복되는 수사 역사는 우연치고는 정말 기막힌 우연이랄 수밖에 없다..."(사설, <검찰의 舊주류 수사, 우연이겠지만…>, 2003.05.17)


"피의사실 공표는 불법" "검찰은 오직 증거를 갖고 얘기해야" "법원 확정판결 전까지는 무죄 추정 원칙을 존중하라" 등등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이명박정권·검찰·수구언론의 정치공작분쇄 및 정치검찰 개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한명숙 공대위)에서나 들을 법한 소리들이 조선일보 지면에서 마구 튀어나오는 모습이 참으로 기이하고 놀랍지 않은가.

이게 다가 아니다. 작금의 검찰수사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한 전 총리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 문제와 관련해 조선일보는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세칭 '장자연 리스트'로 조선일보가 곤혹을 치를 때 작성된 2009년 4월 13일자 칼럼에서다.   

"한 달이 넘도록 경찰은 무엇 하나 밝혀낸 것이 없다...매체들은 알아맞히기 게임이라도 하듯 '조선일보 인사'의 주변을 맴도는 기사를 계속해서 반복한 것이 전부라면 전부다...확인도 안된, 근거없는 말들을 뱉어내고 매체들은 이들의 발언을 기다렸다는 듯이 지면과 방송에 옮기는, 짜고 치는 듯한 게임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언론은 이 사건을 겪으면서 한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것은...입증되지 않는 어느 '주장'만으로 많은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았는지 언론 종사자 스스로 반성하고 더는 그런 추정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김대중 칼럼, <조선일보의 명예와 도덕성의 문제>)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조선일보는 이 사건으로부터 어떤 교훈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의 명예와 도덕성'만 중요하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조선일보가 12월 9일자 사설에서 한 전 총리에게 "대책위를 구성하는 식의 정치적 공방전으로 끌고 가기보다 검찰에 나가 '단돈 1원도 받은 적이 없다'는 자신의 말을 증거와 행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옳다"고 등 떠밀고, 12일자 사설에서 "검찰이 불구속 기소 원칙을 분명히 하는데도 한 전 총리가 계속 검찰 수사에 응하지 않으면 그 때는 한 전 총리의 행동이 정말 이상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여론을 호도하는 걸 어떻게 이해할까. 

 

 ‘한명숙 의혹’을 주제로 다룬 12월 9일자 사설(좌)과 12월 12일자 사설(우)
‘한명숙 의혹’을 주제로 다룬 12월 9일자 사설(좌)과 12월 12일자 사설(우) ⓒ 조선일보

 

한 전 총리더러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라고 하는 것은 저열한 정치공세에 다름 아니다. 범죄사실을 입증해야 할 책임이 검찰에 있다는 건 초등학생도 다 아는 상식 아닌가. 그러라고 검찰이 존재하는 것 아닌가.

'한명숙 공대위'는 11일 피의사실 공표 혐의로 검찰을 고발하고, 또한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 혐의로 조선일보를 상대로 거액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누가 이길까. 건곤일척의 대회 전에 걸린 것은 한 전 총리의 인생만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법치와 민주주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미래도 거기 함께 걸렸다.


#조선일보의 '한명숙 죽이기'#이명박 검찰과 조선일보#한명숙 수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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