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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일요일 아침 볕 잘 드는 조계사 앞마당에 도착했다. 볕은 든다지만 올 들어 가장 추운 영하 5도가 말해주듯 모두 웅크리고 옹기종기 천막의 난로 주변으로 모여 있었다. 20대 초반의 앳된 여인들과 아주머니, 아저씨, 그리고 아이들이 분주하게 나르고 싣고 붓고 쌓고를 하고 있었다. 마당 한켠에 서 있던 동자승의 미소가 마당을 환하게 밝혀 주는 듯했다.

 

'진실 다단계'에서 '사랑 다단계'로 업그레이드하다

 

김장 5000포기(15톤)을 담그는 '제1회, 바보들 사랑을 담그다'는 진실을 알리는 시민, 여성삼국연합(소울드레서, 쌍코, 화장발), 여성시민광장, 촛불나누기 네티즌들이 의기투합해 수차례의 사전모임을 통해 이뤄낸 '도발'이다.

 

4대강 삽질, 종부세 폐지, 부자감세정책도 모자라 경기도의 배고픈 초등학생 45만명의 점심값 650억원 전액 삭감에 이르기까지 주리고 가난하고 어디에 하소연할 데 없는 사람들의 생활이 무너지고 있는 데 따른 우려와 걱정, 분노를 몸으로 표현하기로 하고 겨울철에 맞게 '김장김치'를 아이템으로 잡았다. 원래 김장이나 기부 같은 행위는 보수의 전유물이었지만 모금에서 재료구입, 김치 담그기, 포장하기, 배달처 조달에 이르기까지 지역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동원에 의한 요식행위 기부행사와는 근본적인 성격 자체가 다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당시 주간지 3사(시사IN, 위클리경향, 한겨레21)와 지역 촛불들이 추모특별판을 배포하던 시점부터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던 운동방식에서 이웃, 친구, 친척, 단골 등 주변에 가까운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명 '진실다단계'의 운동방식을 채택했는데, 이번 김장캠페인 역시 지역촛불을 중심으로 주변의 이웃들을 챙겨간다는 점에서 '다단계' 방식을 계승했다. 이를 '사랑다단계'라고 부를 만하다.

 

세상에 바보가 참 많더라

 

그 나라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친구와의 경쟁보다는... 화해와 협력을 배웁니다.

그 나라의 모든 철거민들은 새 터전을 선택할 권리를 가지며

그 나라의 국민들은 함께 모여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는 한 뼘의 광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지배자의 부를 위하여

자연과 전통을 멋대로 훼손하지 않으며

인간과 자연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화해와... 공존을... 모색합니다.

- 진실을 알리는 시민, <바보 선언문> 중에서

 

'바보'는 언제부턴가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되었다. 그 바보들이 생돈 들이고 발품 팔아서 김장 담그고 나누는 행사를 제안했는데, 이에 호응하는 바보들이 참 많았다. 한겨레, 경향, 시사IN, 미디어오늘은 취재지원뿐만 아니라 거액의 후원금을 쾌척함으로써 누리꾼들로부터 '바보 언론사'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언론노조는 최상재 위원장과 언론노조 식구들이 모두 참여해 하루 종일 김장을 담다 갔다. 공공운수연맹은 하루 종일 뒤치닥거리를 해줄 뿐만 아니라 서울과 경기 전역의 김장 배달을 전담했다. 2.5톤과 3.5톤 트럭을 후원해 주었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기사역할을 자임해 주었다. 소울드레서, 여성시민광장의 '엣지' 있는 여인들과 부산, 천안, 안양, 대구 등 전국의 지역촛불들이 KTX를 타고 조계사로 모여들었다.

 

애초에는 200개의 일회용 모자와 고무장갑을 준비했는데, 3시간 만에 다 차고도 100여명이 더 와서 조계사 마당은 일대 성황을 이뤘다. 스님들은 손수 팔을 걷어붙여 김장을 도와주었고 몰래 떡을 쪄다가 나눠주기도 했다. 이렇게 세상에 바보가 많을 줄이야. 이런 바보들이라면 세상살이가 그렇게 고단하지는 않겠어.

 

'바보김치' 들고 독거노인 박순자 할머니를 찾아가는 길

 

김장은 예정된 시간인 오후 5시보다 두 시간도 더 일찍 끝났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김장 고수들이 김장라인 곳곳에 포진돼 말없이 작업을 주도했다. 김장을 처음 담아본 여성삼국의 개념녀들은 옆자리의 언니를 보면서 신기한 듯 따라 담갔다. 앞치마에 고춧가루 범벅이고, 고무장갑을 넘어서 옷에까지 빨갛게 되었지만 이보다 더 아름다운 패션은 없을 것 같았다.

 

김장을 다 만들었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박스 포장을 하고 스티커를 붙이고 배송주소를 확인하고 화물차량에 싣는 작업이 끝나고 나면 전국 각지로 배달이 시작된다. 나는 경기 북부 지역을 맡았다. 포천과 양주 일대에 200박스(10kg들이 총 2톤)의 임무를 맡았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데만 한 시간 가까이 소요가 되었고, 경기 지역이지만 길이 험해서 찾아가는 데 애를 많이 먹었다. 하지만 김치를 받는 분들의 밝은 표정을 보면서 피로가 눈처럼 녹았다. 한 성당의 집사 할아버지와 손자는 '인증샷'의 모델이 되어달라는 무리한 부탁을 몇 번이나 들어주면서 현장을 빛내 주었다.

 

그 다음에는 양주의 주공아파트. 매주 아침마다 신문을 들고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진알시 진역팀 회원(닉네임 '신비아')의 집으로 난생 처음 방문했는데, 아파트 내에 독거노인을 전담제로 돌봐주고 있었다. 신비아님이 돌봐드리는 분이 바로 박순자 할머니다. 할머니는 요즘 병을 앓으셔서 거동이 불편한데 하루에 몇 번씩은 전화와 방문을 통해 건강을 확인해야 할 정도였다.  

 

10kg 들이 김치박스를 들기도 힘겨워 보였다. 박순자 할머니는 "이번 겨울에는 유난히 괴롭다"며 고단한 일상을 호소했다. 사실 김치 10kg 정도로 겨울의 고단함이 어떻게 위로가 되겠느냐마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괜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배달을 다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니 밤 10시 반. 다음 날 업무를 위해 저녁밥도 대접하지 못하고 자원봉사 기사 아저씨(화물연대)를 돌려보냈다. 경기도에 살고 있지만, 서울까지 직접 내려주고 다시 먼 길을 떠나는 트럭을 보면서 나는 진짜 '바보'를 본 것 같았다.

 

5000포기 김장을 계획했을 때 누구를 줄까, 혹시 남으면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막상 풀어놓자 며칠 만에 수취인이 마감될 정도로 올겨울 도움을 필요하는 손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 이렇게 어려운 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정치 하시는 분들이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잠이 안 올 지경이다. 4대강 사업 한다며 복지예산을 삭감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고, 삭감된 예산을 계산기의 숫자로밖에 보지 않는 안면수심의 냄새가 구리게 난다. 갓 담근 김치를 뒤집어써서 냄새를 없애야겠다.

덧붙이는 글 | 블로그에도 올렸습니다. 제1회 <바보들 사랑을 담그다>에 후원으로도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006002-04- 081719 박혜영)


태그:#바보들 사랑을 담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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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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