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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소배출권 거래' 문제로 막말 논쟁을 벌인 전현직 야당 당수들을 보도한 호주 신문 웹사이트.
'탄소배출권 거래' 문제로 막말 논쟁을 벌인 전현직 야당 당수들을 보도한 호주 신문 웹사이트. ⓒ 데일리텔레그래프

"국정 현안을 진지하게 논의하는 게 정치의 본질이지만, 정치인은 득표 가능성부터 먼저 계산하는 습관이 있다."

호주의 저명한 정치평론가 로리 오크가 최근 '탄소배출권 거래(Emissions Trading Scheme, 이하 ETS)' 법안 통과 여부를 놓고 큰 혼란에 빠진 호주 정치계를 비판하면서 한 발언이다. 그러나 그게 어디 호주 정치계에만 국한되는 현상이겠는가.

세종시 계획안 수정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한국 정치인들도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득표 가능성을 계산하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세종시와 연계된 지역구도에 초점을 맞추는 한국과는 달리, 호주에서는 환경정책과 맞물린 이념적 노선투쟁에 돌입한 형국이다.

언뜻 보기엔 환경문제와 이념적 갈등이 별개의 사안으로 보이지만, 거기에다 득표 가능성이라는 변수를 적용시키면 어렵지 않게 로리 오크의 비판에 동의하게 된다. 지지그룹의 이념적 성향에 따라 환경문제와 얽힌 이해관계가 극명하게 갈리기 때문이다.

탄소배출권 거래 법안은 '세금 폭탄'인가?

7일,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에서 제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당사국 총회가 개막됐다. 호주 노동당 정부는 이번 총회 이전에 ETS 법안의 의회 통과를 위해 야당과 끈질긴 협상을 벌여왔다.

그러나 친 기업 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야당은 "ETS 법안이 '세금 폭탄'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강하게 반발했다. 그 결과 야당 의원 절반 정도는 법안의 폐지를 주장하고, 나머지는 수정안을 내놓고 노동당 정부와 협상을 벌이자는 쪽으로 갈렸다.

한편, 최근에 당권투쟁을 통해서 선출된 자유당 토니 애보트 신임 당수는 "탄소배출권 거래 법안은 1200억 호주 달러(약 120조 원)나 소요되는 엄청난 '세금 폭탄'이다. 가뜩이나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들에게 부담이 너무 크다"면서 법안 통과를 반대했다.

극우파(far right)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애보트 당수는 취임연설을 통해 "보수정당인 자유당은 시장의 자유와 국가 이익을 우선으로 꼽는다. 그런데 ETS 법안은 호주의 가정과 기업에 감당하기 어려운 세금고지서를 발부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같은 자유당 소속이지만 중도우파(right-wing)에 속하는 의원들은 "세금 부담을 염려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호주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지켜야할 의무이고, 하나밖에 없는 지구를 건강한 상태로 후손들에게 물려줄 의무를 외면할 수 없다"면서 ETS 법안 지지를 천명했다.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양한 호주 의회

이렇듯 호주에서는 같은 당 소속이라고 해서 이념의 디테일까지 같은 건 아니다. 정치적 스펙트럼이 워낙 다양해서 구분이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러다보니 중도우파와 중도좌파(left-wing)를 한데 묶어서 중도파(center)로 분류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최근에 불거진 자유당 당권경쟁도 그런 이유로 발생했다. 노동당이 제출한 ETS 법안 통과 여부를 놓고 자유당 내의 중도우파와 극우파가 충돌한 것. 결국 극우파가 간발의 차이로 승리했지만, 그에 따른 후폭풍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쯤에서 호주 의회의 정치적 스펙트럼을 간략하게 소개해보면, 농민을 지지기반으로 삼는 국민당 소속 의원들과 자유당 소속 의원 일부가 극우파 그룹을 형성하고, 자유당 소속 중도우파와 노동당 소속 의원 대부분이 중도파로 분류된다.

거기에 2000년대 이후 제3정당으로 급성장한 녹색당이 극좌파(far left)로 자리매김 됐다. 물론 노동당 소속 의원들 상당수가 극좌파 성향을 지녔지만, 캐빈 러드 총리가 중도좌파에 속하기 때문에 별도의 목소리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대기권 이산화탄소 농도를 350ppm까지 줄이자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대기권 이산화탄소 농도를 350ppm까지 줄이자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 abc-TV

좌우파의 격돌로 이어진 '탄소배출권 거래' 법안

최근 호주 정치계가 거대한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시계 제로, 한 치 앞이 안 보일 정도다. ETS 법안이 부결됐기 때문이다. 노동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하원에서는 통과됐는데, 의석 분포가 다양한 상원에서 부결된 것.

기업의 세금 부담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반대한 극우파 상원의원들과, 아직도 지구온난화가 '인간이 만든 재앙'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일부 상원의원들이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특히 농촌을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는 '국민당' 소속 의원들은 "지구온난화가 인간이 만든 재앙이라는 과학적 근거가 취약하다. 좌파 성향의 환경운동가들이 소란스럽게 떠들어대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위의 상원의원들이 극우파에 해당된다면, 역시 반대표를 던진 녹색당 상원의원들은 극좌파에 속한다. 녹색당 입장에서 보면 ETS 법안이 너무 약하다는 것. 그런 연유로, 페니 웡 기후변화 장관은 법안이 부결된 후에 "호주 상원의 극단적인 그룹이 (상반된 이유로) 국가 이익과 미래세대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녹색당과 자유당을 싸잡아서 공박했다.

환경문제 대처하는 호주의 두 얼굴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온실가스는 국경이 없다. 그야말로 지구는 하나. 이웃국가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너무 많아 대기 중 가스의 농도가 짙어져도, 하늘에다 만리장성을 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막아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환경친화적인 국가로 알려진 호주가 뜻밖에도 1인당 탄소가스 배출량 1위 국가로 밝혀졌다. 게다가 석유와 더불어 온실가스 발생의 주된 요인이 되는 석탄수출 1위 국가 또한 호주다.

그뿐 아니다.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지구의 재난을 막기 위해서 1997년에 출범한 교토의정서에 서명하지 않는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과 호주였다. 노동당 정부가 출범되면서 서명을 마쳤지만, 그 전까만 해도 호주가 정말 친환경국가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호주가 국내에서 시행하는 환경보호정책은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환경 올림픽(Green Olympic)'의 기치를 내걸었던 2000년 시드니올림픽도 호주가 친환경국가라는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실제로 정원의 나뭇가지 하나를 자르고 싶어도 해당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할 정도로 국내 환경정책을 꼼꼼하게 챙기는 호주이지만, 국제무대에 나가면 환경문제로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비일비재다. 환경문제에 대처하는 호주의 두 얼굴이 그려지는 대목이다.

 호주 내륙 브로큰힐 지역의 모래 폭풍
호주 내륙 브로큰힐 지역의 모래 폭풍 ⓒ abc-TV

가뭄·홍수·산불·먼지폭풍에 시달리는 호주

이산화탄소가 증가하면 태양복사열이 대기권 밖으로 방출되지 못하여 지구의 기온이 올라간다. 바로 그 온실효과가 지구온난화의 주된 원인이 된다. 거기에서 파생되는 대표적인 피해사례가 가뭄, 홍수, 산불, 먼지폭풍, 해수면 상승 등이다.

호주는 2009년 내내 자연재해에 시달렸다. 극우파 정치인 존 하워드 전 총리가 12년 동안 장기 집권하면서 온실가스배출 감축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임으로서 발생한 '부메랑 효과'를 고스란히 당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시드니모닝헤럴드>가 실시한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면 호주 국민들의 환경 의식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설문에 응답한 약 91%가 기후변화를 인간이 만든 재앙이라고 답했고, 63%의 응답자는 필요한 경우 환경세금을 납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뿐 아니다. 약 70%의 응답자가 "환경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정당에 투표하겠다"고 답변해서 정치인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그런 연유로 노동당 정부는  ETS 법안이 한 번 더 부결되면 상하양원 해산과 조기총선이 불가피하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코펜하겐으로 가는 먼 길

UN총회 연설을 통해서 "코펜하겐 기후회의를 활용해서 더 이상의 탁상공론이 아닌 실질적 구속력이 있는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는 캐빈 러드 총리는 요즘 실망스런 표정이 역력하다.

일부 EU국가를 제외하면 자국 의회에서 '탄소배출권 거래' 법안을 통과시킨 나라가 없는 상황에서 호주가 솔선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데, 정작 빈손으로 코펜하겐으로 가게 됐으니. 그러나 그가 야당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면서 행한 다음과 같은 발언은 21세기를 사는 인류의 공통 과제를 상기하게 만들었다.

"전 지구인의 재앙으로 닥쳐온 기후변화 문제를 호주 동화에 나오는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매직 푸딩' 식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산업 선진국들은 산업혁명 이후 알게 모르게 환경오염의 잘못을 저질러왔다. 지금은 그 빚을 구체적으로 갚아야할 때다."

 반기문 총장에게 교토의정서를 제출하는 캐빈 러드 호주 총리.
반기문 총장에게 교토의정서를 제출하는 캐빈 러드 호주 총리. ⓒ abc-TV


#유엔기후변화협약#탄소배출권#캐빈 러드#코펜하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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