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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3월 30일, 63세의 젊은 나이로 훌쩍 우리 곁을 떠난 시조시인 설엽 서우승 선생은 통영이 낳은 또 한 명의 위대한 예술가이다. 그는 대한민국 전체에서도 손에 꼽히는 시조 분야의 대가이지만 여지껏 제대로 된 조명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비운의 시인이기도 하다.

 

중앙문단에서 활동하지 않고 평생 고향에서 외로움과 가난을 벗삼아 살아온 그의 삶이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워낙 걸출한 예술가가 많이 배출된 통영에서 그야말로 한국시조문학의 대문호 초정 김상옥 선생의 뒤에 서 있었던 점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작품은 여전히 책 속에서 빛나고 있지 않은가. 선생은 비록 잠들었지만 선생의 분신을 언제까지나 만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선생은 위대한 예술가로 길이 남게 된 것이다.

 

서우승 시인이 걸어 온 길

 

서우승 선생은 1946년 통영시 산양읍 남평리에 위치한 야소골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4남 4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문학을 비롯한 성악, 웅변 등 다방면의 예능 분야에서 소질을 나타냈지만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가세가 기울어 학비를 벌어 학교에 다닐 정도로 어려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것도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기에 선생의 학력은 중학교까지가 전부이지만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선생의 학문이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 서우승 선생은 불타는 향학열로 주경야독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특히 습작과 한문공부에 힘써 1967년부터 여러 잡지를 통해 시와 시조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통영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박재두 선생을 만나 시작법을 사사받고 시조시인에 성큼 다가서게 된다. 이듬해부터 줄곧 문인들의 정통등단경로인 중앙지 신춘문예에 도전한 선생에게 감격의 당선소식이 들려온 것은 1972년이었다.

 

당시로서도 엄청난 경쟁률을 자랑하던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선생의 '카메라 탐방'이 당선작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때 심사위원을 맡았던 초정 김상옥 선생과의 일화는 퍽 유명하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초정 선생이 서우승씨 작품을 뽑아 놓고선 작자의 주소지가 어디냐고 묻길래 충무라고 말씀 드렸더니 전광석화처럼 "안 돼" 하며 최종심에 함께 올라온 다른 사람의 작품들을 다시 보자고 하시더란다. 여러 편을 숙독하듯 읽어 내고선 쯧쯧 혀를 차더니 독백인 듯 "나도 토영눔인데 토영눔 뽑아 줬다 뒷말이 많아도 하는 수 없제. 수준이 낮은 작품을 내세울 순 없잖나" 하시며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서우승 선생 수필 中 )

 

이렇게 등단한 선생의 첫 시조집 '카메라 탐방'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인 1982년에 나왔다. '카메라 탐방'은 연작시조집으로서, 이후로도 같은 제목의 시가 꾸준히 발표되어 선생의 대표작으로 우뚝 선 작품이다. 서정을 배제하고 풍자와 해학을 통해 당시의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이 초반 시풍을 구성하고 있으며, 서서히 현실참여시에서 서정적인 삶의 노래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편찬위원, 통영군지 상임편찬위원 등을 역임하며 시집 '당신 하나로 하여', 시조선집 '카메라 탐방', 시조집 '생각도 단풍들면' 등을 펴냈고, 제30회 경상남도 문화상, 제6회 이호우 시조문학상, 제4회 청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서우승 선생의 30년지기 제자면서 통영시공무원문학회 편집장을 맡고 있는 김순철 통영시청 문화예술과 계장은 "선생님께서는 시인이면서도 교정·교열에 능하셔서 글씨 한 자를 빼거나 넣음으로써 글의 맵시를 완전히 달라지게 만드셨다. 습작을 보여드릴 때마다 정확히 짚어내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도 아쉬운 것은 대부분의 문인이 그렇듯 완숙한 글을 쏟아 낼 60대에, 너무 빨리 돌아가셨다는 점이다. 주무시다가 정말 거짓말같이 돌아가셨다"며 고인을 추억했다.

 

특히 김순철 계장은 민간단체 '설엽 서우승을 사랑하는 사람들(이하 설엽사랑)'의 사무국장이기도 한데 '설엽사랑'은 지난 3월 28일 시민들의 후원금으로 건립한 시비 제막식과 함께 1주기 추모제를 성대하게 개최했다. 또한 추모제를 전후해 경남지역 화가 30명의 시화를 기증받아 '시와 그림 특별전'을 개최, 추모열기를 높였다.

 

지난 10월 발간된 통영시공무원문학회 '깃발' 동인지에서는 특집 '설엽 서우승 선생이 보고 싶다'가 수록돼 선생의 대표작품과 선생에게 바치는 추모시 10편이 실린 바 있다.

 

형의 재능을 이어받아 통영시청 집필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서순승(51) 씨는 "타계 1주기에 시비를 만드는 경우가 매우 드문데 많은 시민들이 관심과 애정을 보내 주셔서 유족으로서 정말 감사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현재 팔순 노모가 살고 있는 야소골의 선생 생가는 훗날 서우승 기념관으로 새단장된다. 이곳은 인근의 박경리 기념관과 연계되어 문학의 거리가 탄생될 예정이며, '설엽사랑'에서는 이외에 서우승 시조 백일장도 계획하고 있다.   

 

카메라 탐방(探訪)    -서우승-

 

  필름 Ⅰ

나비는 온실 밖에 은싸라길 흩고 있고

꽃은 향을 뿜어 한 생각에 하늘댄다

맞대고 갈라 선 透明, 朱黃 타는 저 유리벽.

 

  필름 Ⅱ

살점 죄 배로 가고 가죽만 뼈를 덮은

갈데 없는 눈먼 양(羊)의 씨 모르는 만삭(滿朔)이다

누구냐 빼곰히 넘보는 어둠 속의 저 눈망울.

 

  필름 Ⅲ

통금이 쓸어논 거리를 바람이 핥고간 뒤

흔들리던 전신주에 어룽진 저 선지피

어딘가 발을 못뻗는 잠꼬대도 있겠다.

 

  필름 Ⅳ

미친 파도로 하여 지금 나온 어항고기

유리알에 꿰비치는 세상 하나 도마 같아

이끼로 빛을 가리고 다시 앓는 바다의 꿈.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려투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서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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