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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9일 헌법재판소가 신문법·방송법 등 미디어법을 두고 처리 과정의 위헌·위법성은 인정하면서도 민주당 등 야당 의원들의 무효확인 청구는 기각하면서 혼란이 적지 않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논란이 적지 않고 야당과 학계, 시민사회에서는 국회에서 재논의를 거쳐야 한다는 주장이 높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 1일 방송법을 공포하고 방송통신위원회가 시행령을 제정하는 등 본격적인 시행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진보적 중견 언론인들의 모임인 <언론광장>은 '언론법 재논의하라' 연재를 통해 헌법재판소의 미디어법 판결의 의미를 따져보고 향후 방향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견제' 없는 사회적 집단은 없다

 

가정에서 주도권을 누가 갖든 상관할 일이 아니다. 텔레비전 채널을 어디에 맞출 것인지, 이사를 갈 것인지 말 것인지 등 가족의 대소사를 누가 독단적으로 결정한다고 타인이 끼어들 일은 아니다. 가부장이 어딘가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지만 어머니가 전권을 행사하는 가정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가정을 벗어나면 사람이 모인 곳에서 견제의 원리는 거의 필수적이다. 절친한 친구들 간의 소규모 모임이 아닌 한, 단체의 조직과 운영에는 견제 장치가 있기 마련이다. 오늘날 가장 흔한 사회적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주식회사를 보라. 주식회사의 경우 소규모 회사를 제외하면 주주총회, 이사회, 감사, 대표이사 등이 필요하다. 주주총회는 최고의사결정 기관으로서 이사, 감사를 선임하는 역할을 한다. 이사회는 주주총회 결의사항을 제외한 일상적인 의사결정기구로서 역할하면서 집행기관인 대표이사를 견제한다. 감사 역시 이사 및 이사회를 견제하여 이사들이 주주들의 이익을 배반하지 않도록 한다. 이러한 복수의 견제장치를 통해 주식회사는 주주들의 이익을 보호한다.

 

사회적 집단과 가정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러한 견제구조의 유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견제구조는 민주적 통제의 표현이다. 이를 근거로 가정에는 법이 침투하지 않는다거나 가정에는 민주주의 원리가 적용될 수 없다고도 표현한다.

 

국가 차원에서는 어떨까. 국민을 주주로 본다면 국민투표는 주주총회, 대통령은 대표이사, 행정부 또는 국무회의는 이사회, 사법부는 감사로 비유될 수 있고, 국회는 약식 주주총회 정도로 위치지울 수 있다. 근대 민주주의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국가권력을 입법권, 집행권, 사법권 등 3가지로 나누고 이를 별개의 기관에 귀속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삼권 분립은 나치즘 등의 등장에서 보듯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는데 심각한 약점을 드러냈다. 이에 오늘날 민주국가는 삼권분립에 그치지 않고 헌법재판, 복수정당제, 지방자치제, 직업공무원제, 사회여론 등 다층적 권력통제장치를 마련해 두고 있다.

 

12년 전에도 국회로부터 무시당했던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가 신문법ㆍ방송법의 국회 통과 절차상 의원들의 심의표결권을 침해하는 등 국회법과 헌법 제49조 위반이 있었다고 판시한 것과 관련하여 재심의 여부가 여·야간 쟁점이 되고 있다. 여당은 헌법재판소가 위 법률안의 가결 선포 행위를 무효라고 선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재심의 불가 입장이고, 야당은 헌법재판소의 결정 내용이 법률안 가결절차의 위법성 내지 위헌성을 인정하면서 그 처리를 국회의 자율에 맡긴 것일 뿐으로 재심의를 요구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똑같은 풍경은 이미 1997년 7월에도 펼쳐졌던 것이다. 이른바 노동법 날치기 파동에 대하여 헌법재판소가 1997년 7월 16일 사법적 판단을 내놓자 올해와 똑같은 재심의 논란이 일어났다. 차이라면 당시에는 신한국당 의원 155명이 1996년 12월 26일 새벽 6시 야음을 틈타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통과시켰다가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한 국민적 저항에 부딪쳐 헌법재판소 판단 전에 문제의 노동법을 폐기한 점이다. 그러나 안기부법은 날치기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남아 헌법재판소 판단 직후 재개정 문제가 여ㆍ야간 공방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신한국당은 헌법재판소 판시가 안기부법의 유효성을 인정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야당의 재개정 요구를 묵살했고, 결국 안기부법은 손질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한나라당은 헌법재판소 결정이 신문법ㆍ방송법의 유효성을 인정한 것이라고 강변하다가 헌법재판소의 진의는 재심의를 요구한 것이라는 헌법재판소 사무처장의 반론에 부딪혔지만 세종시 정국을 틈타 이를 유야무야로 마무리하려는 모습이다.

 

아쉬운 것은 헌법재판소가 12년 전 국회의 자율권을 존중하여 위법은 있었으나 무효는 아니라고 판시하였다가 국회로부터 그 뜻을 무시당하고서도 여전히 그에 상응한 방책을 강구하지 않은 점이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9인 중 3인이 "가결선포행위의 국회의원 심의·표결권 침해를 확인하면서도 그 위헌성·위법성을 시정하는 문제는 국회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 타당하다는 이유 등을 들어 가결선포행위의 무효확인이나 취소 선언을 회피하는 것은 모든 국가작용이 합헌적으로 행사되도록 통제하여야 할 헌법재판소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소수의견을 밝힌 것만으로는 헌법재판소 위상의 실추를 막기 어렵다.

 

헌법재판소는 또한 위 소수의견을 통해 "가결선포행위의 무효확인 청구를 기각하는 경우에는 헌법재판소법 제67조에 규정된 결정의 효력과 관련하여 또 다른 분쟁을 촉발시킬 것이 우려된다"고 밝혀 12년 전 안기부법의 재개정을 놓고 벌어졌던 여야간 공방이 이번에도 재연될 것임을 예측했다. 그럼에도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다수의 의견으로 법률통과 절차상의 위헌성ㆍ위법성 시정을 국회의 자율에 맡긴 것은 국회의 준법의식을 과대평가하였거나 헌법재판소의 사명을 포기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헌법재판소가 제 역할 못하면 국민이 나설 수밖에

 

헌법재판은 실질적 법치주의의 제도적 표현이다. 악법도 법이라는 명제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독배로 희생되는 소크라테스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사명이다.

 

헌법재판소가 자신의 사명을 포기하고 권력통제장치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면 이제는 국민이 헌법의 수호자로 나설 차례다. 국가기관이 헌법을 지키지 않을 때 최후의 보루는 국민이다. 국회법과 헌법 위반 등 절차상 하자를 가진 법률을 헌법재판소가 차단하지 않고, 국회가 날치기 법률을 끼고 돈다면 주권자가 나서서 헌법을 지킬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야음을 틈타 통과된 법률, 심의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법률, 일사부재의 원칙을 어긴 법률 등 태어나서는 안 될 법률이 활개 치는 세상을 참고 견뎌야 하는가. 국민은 이미 12년 전 날치기로 통과된 노동법을 절명시킨 빛나는 전통을 갖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강병국 기자는 현재 변호사입니다. 

이 연재는 '언론광장' 기획으로 <프레시안>과 <오마이뉴스>, <대자보>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언론법, #미디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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