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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서클이 줄넘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내려왔다. 이제 점점 체력의 한계를 느낀다. 벌써 몇 달째,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혹시나 그 아이의 소식이 있지 않을까 찾아본다. 그 아이는 잘 살고 있을까. 오늘 아니 내일이라도 돌아오지는 않을까. 아니야. 상처가 아물려면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몰라. 하루에도 몇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마음이 덜컹하고 내려앉았다, 괜찮아졌다 한다. 그리움이 커질 때면 예전의 영상과 사진들을 '복습'한다. 그리고 외친다.

"이건 음모야! 음모!"

그 날 아침 내가 컴퓨터를 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무심코 인터넷 기사를 클릭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생각도 든다. 이 모든 게 나를 10년 만의 '폐인질' 아니 '팬질'로 인도하려는 알 수 없는 세력(?)의 '음모'는 아니었을까.

나, 나름 '시크한 누나팬'이었다

이건 음모야! 음모!
 이건 음모야! 음모!
ⓒ <떴다! 그녀>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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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 날짜도 기억한다. 생일과 모 언론사의 필기시험이라는 나름 '거사'를 하루 앞둔 날. 아침저녁으로 영상 하나씩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소박한 팬질'과 영원히 '빠이 빠이'하게 된 날.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지금의 이 '한맺힌 팬질'을 시작하게 된 날. 동시에 내 인생에는 본의 아니게 '보이콧'을 선언한 날. 

솔직히 그날 이야기를 다시 꺼낸다는 게 조심스럽다. 재범이가 시애틀로 떠난 지 3개월이 다 돼 가지만, 그저 '잘 팔리는 아이템'이 돼버린 그 아이에 관한 기사는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벌써 몇 달째 연예뉴스 상위권에는 그 아이의 이름이 보인다. 내가 쓰고 있는 이 글 역시 '잘 팔리는' 재범이를 소재로 한 '차고 넘치는' 기사들 중 하나가 될까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한맺힌 팬질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날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 두루마리 휴지 하나씩 준비하시라.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이 정도는 아니었다. 솔직히 '빠순이질'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니고… 나, 나름 시크한 팬이었다. 그냥 취업준비로 우울할 때마다 영상이나 사진 찾아보는 정도? 인터넷에 기사 뜨면 일일이 클릭해 보는 정도? 같이 스터디하는 동생이 "2PM 때문에 외장하드 샀다"고 말할 때 "나도 요즘 걔네들 좋더라"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정도? 그 정도야 다른 연예인들에게 잠시 잠깐 빠졌을 때도 다 했던 것들이고, 이번에도 마찬가지 일줄 알았다.

아니, 뒷북도 이런 뒷북이 있나 

언니들 마음, 저는 이해해요
 언니들 마음, 저는 이해해요
ⓒ MBC every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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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날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9월 5일 아침, 인터넷에 뜬 재범이 기사를 본 후 나는 내 블로그에
'2PM 박재범을 위한 변호'라는 글을 올렸다. 당장 다음 날이 시험인데, 지금 생각하면 '미쳤다' 싶지만 그때는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날, 내가 쓴 글에는 무려 2000여개의 댓글이 달렸다. 악플이 주를 이뤘다. 친구들은 "욕 많이 먹어서 오래 살겠다"며 "생일선물 제대로 받았다"며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해줬다. 

2PM을 좋아하긴 했지만 '팬심'만으로 그렇게 많은 욕을 들으면서까지 '변호' 혹은 '변명'을 할 정도로(그것도 시험 바로 전 날) '열혈팬'은 아니었다. 재범이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그가 한국을 떠나고 난 후에야 알았으니까. 다만, 어떤 사건이 하나 터지면 그야말로 죽일 듯이 달려드는 그때 그 분위기에서 누군가는 '이 상황이 잘못됐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9월 8일 오후, 재범이는 결국 시애틀로 떠났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 아니, 뒷북도 이런 뒷북이 있나. 나는 본격적으로 2PM이 나온 거의 모든 자료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특히 재범이의 자료는 더욱 더 심혈을 기울여 보고 또 봤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당분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거.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거.

얼굴 한 번 직접 본 적 없지만, 지난 1년간의 활동을 통해 본 2PM의 '리드자(리더)' 재범이는 박진영의 말처럼 솔직하고 가식이 없었다. 그는 장염에 걸려서 설사를 한다는 등의, 기존의 아이돌은 결코 할 수 없는 말들을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방송에서 했다. 그러다가도 무대에 올라가 춤을 추고 노래할 때면 카리스마가 넘쳤다.

애도 안 낳아본 내가 '엄마 마음'을 이해하다니

김신영의 '엄마 미소', 너희를 보는 누나의 미소
 김신영의 '엄마 미소', 너희를 보는 누나의 미소
ⓒ <무한도전>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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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재범이의 매력을 알면 알 수록 이건 뭐, '사귄 적도 없는데 차인 기분'이라고 해야하나. '견우를 기다리는 직녀가 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그런데 견우는 날 몰라). 내 팬질은 점점 '신파'가 되어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재범이 생각이 나서, 재범이와 다른 여섯 멤버가 처한 상황이 안타까워서 때로는 청승맞게 눈물이 나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 그야말로 '개고생'하고 있는 친동생(재범이와 동갑)보다도 재범이 걱정을 더 많이 한 것같다(뭐지, 이 피보다 진한 팬심은…). 시험에서 번번이 떨어져도 '그래, 내가 힘들어봤자 재범이보다 힘들겠어'라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빠순이'었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오빠들'은 남자친구같은 존재였다. 어떻게든 가까이서 보고 싶고, 어떻게든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공연장 속 수많은 팬들 중 1인일 뿐인데도, 오빠는 손톱만한 크기로 보이는데도 그 공간에 왠지 나와 오빠만 있는 느낌, 연애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병세가 깊었구나). 그런데 지금의 팬질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 직접 보고 싶은 생각? 솔직히 별로 안 든다(물론 직접 본다면 좋겠지만). 어차피 연예인이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것도 아닌데 직접 봐서 뭐하겠나. 다 부질없다. 

그래, 이건 '엄마 마음'이다. '동생들'을 보고 있으면 내 자식이 예쁘니까 좋고 내 자식이 힘들어하니까 불쌍한, 그런 마음이 든다. 애도 안 낳아본 내가 엄마 마음을 이해하다니… 도대체 뭐지. 그렇다고 해서 때가 전혀 안 묻었다는 건 아니다. 보면 좋고, 또 보고 싶고. 복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설렌다(이거 호적이 좀 꼬이는데). 여기에 또 '기자 지망생'으로서 가지고 있는 '정의감'은 어떻고. 지난 4~5년 동안 죽도록 고생한 그 아이를 꼭 한국에 데리고 오고 싶고, 제자리에 돌려놓고 싶고, 그걸 봐야 이 한맺힌 팬질이 끝날 것만 같다(내가 뭘 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단순히 팬과 가수가 아니라, 이제 재범이는 내게 '아픈 손가락'같은 존재가 돼버렸다. 

아이돌 팬질, 원래 이렇게 힘든 건가요

착한 누나 나쁜 맘 먹게하네요
 착한 누나 나쁜 맘 먹게하네요
ⓒ 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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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범이가 돌아올 것인가, 말 것인가. 돌아온다면 언제 돌아올 것인가'를 두고 언론과 소속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모호한 소식'을 쏟아내면서 팬질은 점점 다이내믹해졌다. 아, 나는 아이돌 팬질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10년 전에는 '오빠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로가 그리 많지 않았다. 매일 아침 스포츠신문을 사보거나, TV 연예정보프로그램은 챙겨보는 정도? 거의 실시간으로 좋아하는 연예인의 소식을 알 수 있게 된 지금과는 다르다.

하지만 너무도 깊고 넓어져 버린 '인터넷의 바다'에는 사실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정보들이 떠다닌다. 팩트(Fact)에 기초해야 하는 기사조차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고 보면 차라리 10년 전이 속은 더 편했다는 생각도 든다.

새앨범 마케팅만 해도 그렇다. 예전에는 앨범이 나오기 전에 시내 대형 레코드 가게와 동네 레코드 가게에 'H.O.T ○집 예약'이라는 문구가 붙었다. 그럼 일단 CD와 테이프를 예약을 한다. 집에 CDP가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음반판매율을 올려줘야 하니까 둘 다 산다. 음반이 나오기 전까지는 음반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알 수 없다. 나와봐야 안다.

음반이 나오는 날, 발빠른 아이들은 '자체 지각'을 하고 시내 대형 레코드 가게에 갔다가 학교에 온다. 아니면 점심시간이나 체육시간에 "잠깐 밖에 나갔다 오겠다"며 동네 레코드 가게에 갔다 온다. 그렇게 '공수'된 음반은 점심시간에 스피커를 통해 방송된다. 그 때부터 한참 동안 점심시간, 청소시간에는 H.O.T의 음악이 울려퍼진다. 

2주 동안의 '밀고 당기기'. 요즘 팬질 왜 이렇게 힘드니.
 2주 동안의 '밀고 당기기'. 요즘 팬질 왜 이렇게 힘드니.
ⓒ 2PM 공식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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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음반이 나오기 1~2주 전부터 티저(Teaser)가 하나씩, 하나씩 공개되면서 팬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앨범 콘셉트와 관련된 온갖 정보들이 떠돌아다니기도 한다. 10월 31일 0시, 2PM 공식홈페이지에 두근두근 대는 심장 플래시와 함께 카운트다운이 시작될 때부터 11월 12일 첫무대를 가질 때까지 약 2주간 '혹시 재범이가 오는 게 아닐까', '이번 앨범 콘셉트는 어떨까' 궁금해하면서 계속 가슴 졸였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예전이 더 속 편했다.

이건 뭐 팬들이랑 '밀고 당기기'하는 것도 아니고 하루는 일부 음원이 공개되고, 다음 날에는 전체 음원이 스트리밍 사이트에 올라오고, 티저 사진·티저 영상이 하나 하나씩 공개되고, 그 와중에도 재범이와 관련된 기사는 끊임없이 나오고… 정신이 없었다.   

재범아, 너만이 누나를 고칠 수 있어

재범아, 너 없는 2PM은 1시 59분
 재범아, 너 없는 2PM은 1시 59분
ⓒ 2PM 공식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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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훌륭한 '마케팅'임에는 틀림없다. 온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재범'이라는 이슈가 있었으니 더욱 그렇다. 덕분에 선공개된 <기다리다 지친다>와 <너에게 미쳤었다>는 음반이 발매되기 전부터 음원챠트에서 상위권에 랭크되기도 했다. 타이틀곡 <Heartbeat>는 각종 방송과 음원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나 역시 '파블로프의 개' 마냥 매일 오후 2시가 되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새로운 '티저'를 기다렸다. 광고에 나오는 '비비디 바비디 부'도 "세뇌당하기 싫다"며 안 보고 안 듣는 내가 말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새 앨범을 기다리는 마음은 같지만 요즘에는 그 '순수한 마음'이 상업적으로 이용당하는 것 같아 왠지 씁쓸하다.

재범이가 없는 2PM이 컴백하고 나서 '엄마병'은 더 심해졌다. 괜히 재범이 빈자리가 계속 눈에 밟히고  6명만 있는 게 마음이 아프고 <Heartbeat>는 슬프게만 들린다. 유난히 사이가 좋았던 멤버들이 왁자지껄하게 노는 걸 보지 못하니 속상하기도 하다. 얼마 전 MAMA 시상식에서 2PM이 '올해의 가수상'을 받을 때는 또 제대로 감정이입을 했다. 이놈의 청승. 어쨌든 누나의 이 한맺힌 팬질이 끝나려면 재범이가 돌아와야 할 텐데… 듣고 있니, 재범아?  


태그:#누나팬 , #2PM, #박재범, #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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