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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엽모자를 쓰고 있는 어린 잣나무
낙엽모자를 쓰고 있는 어린 잣나무 ⓒ 이승철

"아얏! 엄나무 가시에 또 찔렸네, 오늘 산행은 쉬울 줄 알았는데, 이게 웬 생고생이야."
길도 없는 산을 오르며 일행들이 푸념을 한다. 낙엽이 수북한 잡목들 사이를 비집고 가파른 산을 올라가기가 정말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고생은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사람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됐다.

11월24일 가평에 있는 주발봉을 찾아 나섰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청량리에서 1330-2번 버스를 타고 가평으로 가는 길에 빗고개에서 내리면 주발봉으로 이어진 등산로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운전기사에게 물으니 빗고개엔 정류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빗고개 전 정류장에서 내려 골짜기를 타고 오르기로 했다. 마침 같은 방향으로 가는 현지 주민 아주머니에게 물으니 골짜기 안쪽 끝에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골짜기를 타고 오르는 길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히야! 이곳에 숨겨진 별천지가 있었네. 이 골짜기에 이렇게 엄청난 건축물과 시설물이 있을 줄이야!"

일행들이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다. 골짜기에 가득한 건축물과 시설들 때문이었다. 골짜기에 세워져 있는 건축물들은 그 규모나 면적이 정말 어마어마했다. 아파트와 예배당, 골프연습장은 물론 잔디축구장에 놀이시설까지, 골짜기 입구에서부터 안쪽 끝까지 건축물과 시설들이 가득했다.

 산골짜기를 까뭉개고 축구장까지 갖춘 어느 종교단체의 시설물
산골짜기를 까뭉개고 축구장까지 갖춘 어느 종교단체의 시설물 ⓒ 이승철

아름다운 골짜기를 파헤쳐 세운 어느 특정종교단체의 건물과 시설물들

"어느 종교단체인지 정말 대단하구먼, 그런데 산골짜기에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과 시설을 만들어도 괜찮은 거야? 산과 골짜기를 까뭉개고 이렇게 엄청난 종교시설을 만들어 놓다니?"

"그러게 말이야, 어느 종교단체인지 모르지만 종교단체도 그렇고, 이런 시설을 허가해준 가평군청은 자연보호나 환경개념이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네?"

일행들이 끌끌 혀를 찬다. 산골짜기 하나를 파헤쳐 어느 특정 종교단체가 완전히 차지해버린 모습이 너무나 볼썽사납고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으로 한참을 올라 푸른 잔디가 가지런한 잔디축구장 근처 양지쪽에 앉아 간식을 먹고 있을 때 노인 한사람이 나타났다.

노인은 바로 골짜기에 있는 종교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 노인에게 산으로 오르는 길을 물으니 등산로 입구가 공사 중이어서 길이 막혔다는 것이었다. 길을 물으니 축구장 옆 산을 가리킨다. 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산이 그리 높지 않고 별로 험해 보이지 않아 길 없는 산을 오르게 된 것이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산길을 오르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산길을 오르다 ⓒ 이승철

나뭇가지에 긁히고 찔리며 어렵사리 능선에 오르니 좋은 등산로가 나타난다. 길옆에는 왼편 방향으로 빗고개, 오른편 방향으로 주발봉이라는 표지판이 서있다. 주발봉을 향하여 능선길을 따라 잠깐 올라가자 골짜기 안쪽에 자리 잡은 종교단체의 시설물과 만나는 지점이다. 골짜기를 따라 올라오면 바로 이 길을 통하여 주발봉으로 오를 수 있는 길이었다.

"아니, 아까 그 노인네 때문에 생고생을 했잖아? 자기네 시설 공사한다고 길을 막아 놓아서 길 없는 산을 오르며 우리들만 가시에 찔리고, 힘들게 고생시키고 말이야"

좋은 길이 있는 곳을 발견한 일행들이 화난 목소리로 투덜거린다. 조금 전 길도 없는 산을 오르느라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바라본 종교시설물들은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일행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산행 길로 나섰다.

잣나무가 유난히 많은 산, 가랑잎 모자를 쓴 어린 잣나무 모습도 귀엽고

조금 더 올라가자 경사가 가파르다. 더구나 가파른 산길에 수북이 쌓인 낙엽들이 밟을 때마다 자꾸 미끄러져 오르기가 매우 힘들었다. 일행들은 몇 번인가 미끄러져 내리며 어렵사리 작은 봉우리에 올랐다. 주발봉은 이 봉우리에서 오른편으로 꺾인 능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 산엔 잣나무가 유난히 많은 것 같네, 소나무는 별로 보이지 않고 대부분 잣나무들이야"

일행의 말을 듣고 살펴보니 주변에 보이는 잎이 푸른 나무들은 거의 대부분 잣나무들이다. 다른 산에서는 흔하디흔한 소나무가 이 산에선 아주 귀한 모습이었다. 가지가 앙상한 잿빛 잡목들 사이로 선명하게 푸른 색깔로 서있는 잣나무들이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산자락 어느곳에서나 쉽게 눈에 띄는 어린 잣나무들
산자락 어느곳에서나 쉽게 눈에 띄는 어린 잣나무들 ⓒ 이승철

등산로 옆 수북하게 쌓여 있는 가랑잎 사이사이에도 수많은 어린 잣나무들이 수줍은 듯 살포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다.

"여기 이 어린 잣나무 좀 봐? 가랑잎 모자를 쓰고 있네, 이 녀석 정말 귀여운 걸,  허허허"

일행이 가리키는 길가엔 아주 작은 어린 잣나무는 정말 모자라도 쓰고 있는 것처럼 머리 위에 넓적한 가랑잎 하나가 올려져있었다. 가랑잎 모자를 쓴 어린 잣나무는 정말 귀여운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산행에서 처음 만난 분들이네요, 반갑습니다."
능선길 앞쪽에서 다가온 등산객 다섯 명이 꾸벅 인사하며 비껴지나간다. 그들은 호명산쪽에서 등산을 시작하여 우리들과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산행 중에 우리들을 처음 만났다며 반가운 표정들이다. 인근 호명산과 달리 많이 알려진 산이 아니어서 등산객이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공청안테나 철탑에 매달아 놓은 주발봉표지판
공청안테나 철탑에 매달아 놓은 주발봉표지판 ⓒ 이승철

"아니 주발봉에 밥주발과 국주발은 어디로 갔는지 안보이고 억새풀뿐이잖아?"
조금 더 올라가자 주발봉이다. 이 산봉우리는 봉우리 모양이 밥주발을 엎어 놓은 것 같다하여 주발봉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주발 같은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넓지도 높지도 않은 봉우리엔 마른 억새풀만 널브러져 있었다. 봉우리 한쪽에는 산행 안내판과 함께 누가 세웠는지 모를 공청안테나 철탑에 '주발봉 489,2m'라고 쓴 초라한 송판 한 개가 매달려 있었다.

세계인들에게 한국소나무로 이름 붙여진 잣나무

시간은 어느새 오후 1시가 지나고 있었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날씨가 포근하여 산봉우리에 둘러 앉아 도시락을 먹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점심도시락을 먹으며 정상주를 한 잔씩 곁들인 일행들 기분이 매우 좋아진 표정이다. 산은 거의 흙산이어서 느낌이 매우 포근하고 아늑했다.

점심을 먹고 잠시 쉬었다가 호명산이 있는 큰골쪽으로 향했다. 능선길은 여전히 평탄하고 좋았다. 능선길 양쪽은 경사가 급한 비탈이었지만 한쪽은 잣나무 숲이 빽빽하고 다른 한쪽엔 잡목들이 우거져있었다. 길가엔 여기저기 어린 잣나무들이 낙엽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햇볕을 즐기는 표정들이다.

"겨울철인데도 잣나무 숲 향기가 느껴지는구먼. 잣나무는 소나무만큼 모양이 멋지진 않지만 열매와 목재가 쓸모 있는 나무지."

이곳 가평은 잣나무 고장이다. 전국에서 잣나무가 가장 많고 잣 생산량이 전국 생산량의 40%나 차지하는 잣 특산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소나무 과에 속하는 잣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우리나라의 역사와 함께해 온 가장 오래된 수종 중의 하나다. 잣나무는 목질도 단단하고 무늬가 고와 목재로서의 가치도 높은 편이다.

 수북이 쌓인 낙엽사이로 살포시 얼굴을 내민 어린 잣나무
수북이 쌓인 낙엽사이로 살포시 얼굴을 내민 어린 잣나무 ⓒ 이승철

 싱그럽고 아름다운 잣나무 숲
싱그럽고 아름다운 잣나무 숲 ⓒ 이승철

잣나무는 옛날부터 백자목(柏子木), 해송(海松), 유송(油松), 오엽송(五葉松), 홍송(紅松) 신라송(新羅松)등으로 불리어 왔으며, 학명이 한국소나무(Pinus koraiensis) 라고 불린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소나무다. 그러나 소나무의 학명은 안타깝게도 일본소나무(Japenese Pine)다.

지난 36년 동안의 일제 강점기 시절을 거치는 동안 우리나라 전국의 많은 동식물들 명칭이 대부분 일본인 학자에 의해 세계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인들에게 소나무는 일본나무로 알려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잣나무는 일본지역에 흔치 않은 편이어서 그들의 명칭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소나무는 잣나무인 셈이다.

잣나무는 우리 한국을 비롯하여 동북아시아에서부터 시베리아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는 나무다. 그 중에서도 식용인 잣나무 씨앗은 우리한국을 포함한 극동 지역의 잣이 품질 좋기로 정평이 나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잣' 하면 바로 가평 잣을 손꼽는다. 생산량도 가장 많고 품질도 좋기 때문일 것이다.

 큰골 골짜기에 있는 낚시터 풍경
큰골 골짜기에 있는 낚시터 풍경 ⓒ 이승철

 개울바닥에 피어있는 빛바랜 억새와 갈대꽃
개울바닥에 피어있는 빛바랜 억새와 갈대꽃 ⓒ 이승철

"이 주발봉을 비롯하여 가평에 있는 산들은 지금도 온통 잣나무들이지만 앞으로도 잣나무가 주종을 이루겠구먼, 저 어린 잣나무들을 보면 말이야."
정말 그랬다, 산행을 시작한 이래 호명산 경계지역인 큰골에 이를 때까지 능선길에서 만난 어린 나무들은 하나같이 잣나무들이었기 때문이다.

스산하지만 정겨운 초겨울 풍경들

"해가 너무 짧아, 호명산은 안되겠는 걸, 이곳에서 내려가야지."
어린 잣나무들과 잣나무 숲 향기에 취해 능선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큰골이다. 큰골은 호명산과 주발봉 사이를 가로질러 넘는 고갯길이자 골짜기였다. 큰골에 도착하니 호명산 위에 걸린 태양이 한 뼘 높이에 떠있다. 겨울 해가 짧아 호명산을 넘기엔 무리일 것 같아 하산길로 나섰다.

날씨가 포근하다고는 해도 구불구불 돌고 돌아 내려오는 길가에는 초겨울의 한기가 서리서리 맴돌고 있는 풍경이었다. 길가의 텅 빈 밭두렁엔 사위질빵 나무 하얀 꽃들이 산그늘 추위에 호호 손을 불며 휘날리고, 수많은 자리가 빙 둘러 앉아 있는 낚시터도 낚시꾼 한 사람 없이 텅 빈 모습이었다.

상천리 마을을 지나 경춘선 철길을 건너자 흐르는 수량이 적어 실개울이 된 제법 넓은 하천바닥에 빛바랜 억새꽃들이 지천이다. 경춘가도가 저만큼 바라보이는 마을 밖 작은 밭두렁에선 늙은 농부가 도리깨를 휘두르며 콩마당질을 하는 모습이 정겹다. 일손이 부족하여 늦은 콩수확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도리깨를 휘두르며 콩마당질하는 농부
도리깨를 휘두르며 콩마당질하는 농부 ⓒ 이승철

우리나라 잣 주산지인 가평에 있는 주발봉에 오르고 내려오는 길에서는 아름다운 산골짜기를 파헤쳐 특정종교단지를 만들어 놓은 안타까운 모습과 함께, 어린 잣나무들이 낙엽을 뚫고 자라는 곱고 예쁜 모습, 그리고 스산한 초겨울 풍경 속에 때늦은 콩마당질 하는 농부의 모습이 한없이 정겨운 풍경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주발봉#낙엽모자#잣나무#이승철#콩마당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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