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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나도 맑아지는 것 같다. 그리고 그와 헤어지고 다음에 만나는 그 날이 가까이 오면 은근히 기다려진다. 가르치러 가는 성인장애야학교에 중도에 들어온 미국인학생이 있었다. 40세였지만 30세로 보일 만큼 너무나도 해맑았고 지적장애인이긴 했지만 붓을 잡는 일은 특별한 관찰력이 있어 잘 따라했다.

 

푸른 눈의 그를 가르치는 시간에 그의 옆에서 함께 있으면 세상에 때묻은 나의 속이 마치 맑은 옹달샘에 비쳐지는 것처럼 잘 보였고, 내 영혼이 씻어지는 것 같은 느낌도 더러 받았다. 그와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문장들은 딸에게 물어 모두 핸드폰에 저장해놓고 그때 그때 꺼내어 보여주고 소통했다. 영문글씨나 가을국화체본을 그대로 잘 따라해서 좋다고 등을 두드려주면 너무 좋아했던 그였다.

 

그가 올해 한국에 온 계기는 그의 형이 이곳에 있어서다. 그의 형은 미국에서 웬만한 공부를 다했고 거기서 한국 여자 유학생을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한국어를 배웠고 사랑하는 여자의 나라인 한국에 와서 살게 되고 한국을 사랑하면서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형은 시름시름 병이 들어 투병을 하게 되었다. 병간호와 함께 직장생활도 하는 형수가 열심히 형을 뒷바라지하면서, 돌봐줄 사람이 없는 미국 시동생도 한국에 오게 하여 성인장애야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한 것이다.

 

비록 국제결혼이지만 남편과 남편의 동생을 위해 삶을 알알이 잘 쪼개어 살아가는 그를 보면서 가끔은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지?' 하는 존경심도 들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지난 토요일 야학교 교장의 결혼식장이다. 그 많은 하객속에서 나를 발견한 그는 천진무구하게 미국인 특유의 빛나는 푸른 눈을 반짝이며 인사하고 가슴으로 포옹을 했다. 그런데 어제 수업에서 그가 오지 못했다. 12월 초에 교육발표를 할 마지막 작품을 다듬는 날이라 그가 안 보여 많이 아쉬웠지만 다음 주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새벽 갑자기 문자메시지가 왔다. 그가 하늘나라로 갑자기 떠났다는 것이다. 그냥 놀라워서 눈물도 나오지 않고 아무 생각없이 그저 황망했다. 아무에게도 상처주지 않고 선하고 맑게만 산 영혼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떠났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너무도 맑아서 탁한 사람들 사이에 있기보다 하늘의 천사자리가 더 알맞았을지도 모른다고 야학교장선생님이과 이야기를 주고 받았지만 가슴이 많이 아프다. 나름대로 그가 좋았고, 그의 맑은 영혼에 다른 사람들도 맑아지게 하고 싶어서 오마이뉴스에 사진을 내기도 했던 터였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 맑아지는 그 순간이 참 좋았다. 그래서 누군가와 헤어지면 다음 만날날이 기다려졌지만, 이제 그 누군가와 만날 날이 없어지면 그와 함께 있었던 지난 시간이 모두 추억이 되어 뒤돌아보게 된다. 절로 단순해져서 좋았던 그와의 짧았지만 길게 여운이 남는 만남이었다. 

 

안개가 많이 낀 오전이다. 이제 두 발에 제한받지 않고 천사의 날개를 단 그의 영혼은 안개 낀 이 나라와 그의 부모가 묻힌 미국의 땅의 경계도 자유롭게 넘나들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죽어서도 변함없이 처음보는 사람들에게도 맑고 푸른 깊은 눈으로 정겹게 인사를 할 것이다.

 

천진한 유치원아이처럼 칭찬해주면 크게 함박 웃던 그를 추모하며 좀 더 많이 안아주고 좀 더 칭찬해주지 못해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글을 쓴다.


태그:#하늘로 떠난 미국성인장애야학생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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