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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소중함, 이름대로 산다는 것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름이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이나 만물에도, 보이지 않는 감정에도 이름이 있다. 구름, 꽃, 하늘, 사랑, 만남 등등. 만약 이름이 없다면? 뭐라 불러야할까?

 

'강경순', 내 이름이다. 나도 언젠가는 삶을 마감할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는 나를 슬퍼해주며 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은 아마도 '아버지!', '경순아!', '경순 형님(오빠)!', 이렇게 부르면서 울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름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엉엉~~~! 아무개야~~~! 엉엉~~~!", "엉엉~~~! 야~~~! 엉엉!" 이렇게 울어야 할까? 이름이 없는 삶은 그와 같은 허탈함과 어이없음을 동반한다.

 

이름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 그 속에는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과 살아가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람은 자신의 이름대로 산다는 말도 여기에서 나왔다 할 것이다. 특히 우리 조상들은 이름 짓기에 온갖 공을 들였다. 물론 사람의 이름은 더할 나위가 없다. 하물며 한 나라를 다스리는 중심지인 궁궐의 전각들의 이름이다. 어떻게 소홀할 수가 있겠는가?

 

궁궐 건물들에 달린 수많은 현판들은 그 건물의 얼굴이자 심장이다. 그래서 그 이름 짓기에 매우 큰 공을 들였음은 물론 그 글씨를 최고의 서예가가 지극히 아름다운 필치로 썼으며, 온갖 길상의 문양들을 새겨 넣었다. 물론 그 상징과 의미를 지극히 부여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내가 답사를 다니면서 만난 수많은 건물들의 현판 가운데 우리의 정치와 문화 수준을 되돌아볼 수 있는 것과 관련된 현판을 살펴보는 것에 한정지어 이야기하고자 한다. 현판에 관해 풀어가야 할 이야기는 몇 개의 글로도 쉬이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문의 현판을 보며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생각하다

 

정문은 궁궐의 얼굴이다. 그 이름을 소홀하게 지었을 리 없다. 궁궐의 정문들은 모두 가운데에 '화'가 들어간다. 경복궁의 광화문(光化門), 창덕궁의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의 홍화문(弘化門), 경희궁의 흥화문(興化門)이 그러하다. 경운궁(덕수궁)의 정문은 지금은 대한문(大漢門)이지만 원래 인화문(仁化門)이 정문이었다.

 

'화'는 유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리학에서 강조하고 있는 '민본'(民本)의 구체화된 면모가 바로 편민(便民)과 교화(敎化)였다. 성리학의 이념을 표방하고 그 중심지 역할을 자처했던 궁궐의 정문을 위와 같이 지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게 여겨진다.

 

대한문은 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으나, 경운궁 중건 당시 대한문으로 바뀌었는데, 가운데 '한'자가 들어가는 것을 두고 구구한 속설이 나돌았다. '안'이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인 배정자를 상징한다 하여 '한'으로 고쳤느니, '한'은 '오랑캐'를 뜻하기 때문에 이것을 고쳐야 된다느니 하는 등등. 이것들은 모두 쓸데없는 요설이며 낭설이다. 여기서의 '한'은 '하늘'을 뜻한다. 다시 말하자면 '대한'은 '큰 하늘'을 말한다.

 

정전과 편전을 보며 바른 정치의 참뜻을 되새기다

 

궁궐의 정전과 편전의 이름에는 모두 정(政)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의 법전은 근정전(勤政殿), 편전은 사정전(思政殿)과 수정전(修政殿)이며, 창덕궁의 법전은 인정전(仁政殿), 편전은 선정전(宣政殿)과 희정당(熙政堂)이다. 흔히 희정당을 국왕의 침전이라 소개하는 책이나 글들이 있는데, 정이 들어가는 것이나 최근의 연구 성과에서 보듯 편전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경운궁의 경우는 법전이 중화전(中和殿)으로 예외인데, 이는 대한제국의 성립이라는 큰 틀에서 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들 모두는 정치를 똑바로 하라는 준엄한 경고임을 알 수 있다. 일례로, 경복궁의 편전인 사정전을 보자. 편전은 국왕과 신하들이 정무를 보는 공간이다. 그 곳의 이름을 정도전(鄭道傳)은 사정전, 곧 언제나 정사를 생각하는 전각이라는 뜻으로 지었다. (<태조실록> 권 8 태조 4년 10월 7일 정유) 이 얼마나 기막히고 아름다운 이름인가? '청기와집'인 청와대, '하얀 벽돌집'인 백악관이란 이름과는 비교 자체를 거부한다.

 

정치란 무엇인가? 그에 관한 수많은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의 출발은 백성(국민)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려 읽는 것이 아닐까 싶다. 황제의 나라였으며, 세계에 코리아의 이름을 드높였던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王建)은 신라를 방문했을 때 신라의 경순왕이 절을 한 것에 대해 답하여 절했다. (<고려사> 권 2 세가 제 2 태조 2 신묘 14년(931) 봄 2월) 이 충격적인 사실은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패배자에게조차 기꺼이 머리를 숙이고 절을 했던 그는 결국 역사서에 그 이름을 남기고 우리 역사상 최초의 태조로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반면 왕건과 더불어 후삼국을 이끈 걸출한 영웅이었던 궁예(弓裔)는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볼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고려사> 권 1 세가 제 1 태조 1 갑술년(914)) 그는 백성들의 마음을 잘못 읽었고, 결국 역사상의 폭군으로 낙인찍혔다. 이 두 사람의 사례에서 우리는 정치가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엿볼 수 있다.

 

마음을 제대로 헤아려 읽는 것, 그 출발은 철저한 자기반성과 수양이다.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고 남을 제대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법전이나 편전의 이름은 바로 위정자 자신들을 향한 것이다. 정치를 똑바로 하라는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이다.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나날이 더해지고 있는 요즘이다. 우리의 위정자들도 궁궐을 한 번씩 찾아 이 이름들을 보며 자신의 정치를 반성해봄이 어떨까?

 

숭례문의 현판을 보며 우리의 정치와 문화수준을 돌이켜보다

 

현판의 참뜻을 되새겨본다는 점에서 나는 숭례문(崇禮門)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어느덧 숭례문이 불에 탄 지도 2년이 다 되어간다. 숭례문이 불에 탔을 당시 별 해괴한 행동들이 많이 보였다. 그러나 숭례문의 참뜻과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 속에서 나온 행동들이었기에 참으로 부끄럽고 화끈거렸다.

 

그나마 그때 현판을 건진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현판은 건물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살렸다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 이름이 담긴 참뜻과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숭례문 현판은 양녕대군이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 이 현판은 세로로 쓰여 있다. 대부분의 궁궐 관련 책이나 글들은 이것을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그렇게 썼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정말 그럴까? 물론 현판의 의미를 되새겨본다면 이 또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광화문 앞의 해태가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만들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이야기하고만 넘어가기에는 그 이름을 지은 우리 조상들에게는 분명히 예가 아닐 것이다.

 

우리 전통문화에서 음양오행(陰陽五行)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음양오행이라는 것도 어떤 사상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오행에 오상(五常), 곧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연계시킨 것을 보자. 조선은 성리학(性理學)을 국시(國是)로 하는 나라였다. 따라서 이 오상은 일반적인 유학적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바로 조선의 국시였던 성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풍수지리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은 부수적인 것일 따름이다.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이를 바라봐야 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본다면 사대문과 사소문의 이름이 지어진 것과 그 현판의 생김새, 건물의 위치 등 여러 가지를 오로지 풍수지리설로만 설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물론 세로로 썼다는 것이 풍수설의 영향이라는 것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유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요, 무조건 정확하다고 이야기하기도 어렵다.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운 것을 성리학을 국시로 한 조선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예를 지극히 숭상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도성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대개 숭례문으로 출입한다. 사람들은 출입하면서 숭례문 현판을 한 번씩 보게 될 것이고, 그러면서 예를 지극히 숭상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숭례문 현판은 그러한 무언의 가르침을 주는 셈이다. 지방에 올라오는 사람들이, 유학자들이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한 따위의 이유로 세로로 세웠다는 것을 알리도 만무하며, 그런 이야기를 허무맹랑하다고 치부해버릴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애써 관악산을 모독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아무튼 위와 같은 지극한 의미를 담고 있던 숭례문이 그 누구의 손도 아닌 우리의 손에 불에 탔다.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루었음에도 끊임없이 타락해가는 정치판의 모습에 준엄한 경고를 내리기 위해 숭례문이 그렇게 온 몸을 불살랐던 것은 아닐까?

 

역사에 대한 외경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했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그만큼 이름은 소중한 것이다. 왜 이름은 소중한가? 그것은 역사에 대한 외경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역사를 지극히 소중히 여기고 또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인 우리 자신은 어떤가? 특히 정치판의 모습은 어떤가? 걸핏하면 "역사가 나를 알아줄 것이다.", "후세의 역사가 나를 평가해줄 것이다." 라고 서슴없이 내뱉는다. 과연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가? 우리는 지금의 현실을 냉철히 보며 판단해야 할 것이다. 진정 역사를 두려워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 참 고 문 헌 ♧

고전연구실 편찬, 신서원 편집부 편집, <북역 고려사> 제1책, 신서원, 1991.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영인본 제 44책 및 제47책), 탐구당(보급), 1955~1958.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역사> (전면개정판), 경세원, 2003.
허균, <고궁산책>, 교보문고, 1997.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인터넷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태조실록> 부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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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2009년 11월 5일~6일 다시 궁궐을 답사하면서 여기에 여러 참고문헌을 바탕으로 제 생각을 담아 새로 쓴 글입니다. 


태그:#현판, #정치, #이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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