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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추운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이 맘 때면 누구보다 몸과 마음이 시린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홀로 지내는 어르신들입니다. 이 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몸 누일 방도 필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이야기 나눌 사람입니다. 긴 세월 이어온 그 분들 생엔 한 시대가 고스란히 스며 있습니다.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과 함께 그 분들을 찾아나섭니다.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요즘도 딸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시다는 박막순 할머니
 요즘도 딸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시다는 박막순 할머니
ⓒ 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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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년 전쯤일 거예요. 할머니 집 도배를 해 드리러 갔던 날이었나? 할머니가 저를 부르시더니 다락에 좀 올라가 보라는 거예요. 다락 구석에 보자기가 하나 있을테니 들고 내려와 보라구요. 어두컴컴한 다락을 더듬거려 보자기를 찾았는데 서류가 들었는지 편지가 들었는지 제법 묵직하더라구요. 그걸 들고 내려와 풀어보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몰라요. 글쎄 그게 다 돈이더라구요. 천 원짜리부터 만 원짜리까지... 얼마나 오래 전부터 모아두었는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화폐도 많이 끼어 있더라구요."

할머니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며 쌀도 전달해 드리고, 도배도 해드리며 아들처럼 이야기 상대도 되어 드린다는 자원봉사자 정창길씨는 할머니 다락에서 돈벼락이 쏟아지던 날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할머니와 마주앉아 세어보니 정확히 1180만 원이었어요. 모아 놓은 돈이 얼마인지 세어보지도 않고 생기면 갖다 넣고 생기면 갖다 넣고 그러셨던 거예요. 은행에도 갈 줄 모르고 그냥 버는 대로 넣어두기만 한 거예요. 그걸 저에게 맡기시면서 방을 구해달라고 하시대요. 그때 사시던 월세방값에 그 돈을 보태서 지금 이 방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지요."

지난 30년간 고물을 팔아서 생활을 하셨다는 할머니.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헌병이나 폐지, 고철 등을 주어다 팔아 천 만 원이 넘는 돈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아오셨을까.

"전라도 남원이 고향인데 워낙 가난한 농사꾼집이다 보니 우리 부모님은 나를 가르치지도 못했어. 고향에서 부모님 농사일을 도우며 살다가 열여덟에 이웃집 행랑어멈 중매로 시집을 갔네. 근데 그게 영 잘못된 거야."

남원에서도 들어간 시골마을에서 살던 할머니는 18세 어린나이에 서울로 시집을 온다.

"속아서 결혼을 했지 뭐. 처녀로 시집을 갔는데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은 전실 자식까지 있더라구. 그래도 어떡해. 갔으니 살아야지. 나도 살아보려고 했어. 그런데 이 남편이 정말 너무 하는 거야. 한 번에 기생을 셋씩 데려다 아랫집, 윗집, 옆집에 방을 얻어 살림을 차리더니 나중엔 노름까지 해서 그 많던 재산을 다 날리더라니까."
사십대 중반의 박막순 할머니. 고운 당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확대해서 방에 걸어 두고 싶다고 하신다.
 사십대 중반의 박막순 할머니. 고운 당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확대해서 방에 걸어 두고 싶다고 하신다.
ⓒ 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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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질에 노름에 폭력까지 휘두르던 남편. 결국 할머니는 결혼 생활 30년만인 마흔 여덟에 기생과 살림을 차린 남편과 이혼을 하게 된다. 날아온 돌이 박힌 돌을 빼버린 것이다. 딸의 손을 잡고 집을 나온 할머니. 수중에는 남편이 위자료라고 준 돈 17만 원이 전부였다.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이를 악물고 살아 온 세월. 살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다.

"여자가 똥지게 지는 거 봤어? 나 똥지게도 져 본 여자야."

곤고하고 구차했지만 열심히 살아왔던 당신의 삶을 '똥지게'라는 한단어로 압축해 버리시는 할머니. 곱게 자란 요즘 사람들이 어찌 당신의 삶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느냐며 말씀을 이으신다.  

"이혼하고 나와서 뭐 할 일이 있어야지. 그래도 딸하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 무조건 품을 팔았지. 그땐 몸도 좋아서 얼마나 일을 잘 했다구. 밭을 매면 500원 주고, 골을 타면(논이나 밭에 물이 흐르도록 물골을 파는 일) 700원을 줬어. 날품도 팔고, 달품도 팔고..."

그렇게 품을 팔다가 장사를 해 볼 욕심이 생겼다는 할머니. 장사를 하면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받는 품삯보다는 좀 더 많이 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생선을 떼어다 팔아 볼 작정을 했다.

"장사도 아무거나 하면 안되겠더라구. 갈치를 한 다라이 무겁게 받아서 머리에 이었는데 비린내가 난다고 버스를 안태워주네. 처음이라 그런지 물건도 시원찮아서 가느다란 것만 가지고 다니니 뭐가 팔려야지. "생선 사세요~" 하고 소리를 쳐야 하는데 영 그 소리가 목구멍에서 나오지를 않아. 답답했는지 여섯 살 먹은 딸이 "생선 사세요~, 생선 사세요~" 소리를 치는 거야."

아침 일찍 생선을 받아다 팔아보겠다는 할머니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하루 종일 팔리지 않는 생선을 가지고 돌아다니다 집근처 어느 가게 앞에 도착하니 어느새 시간은 저녁 다섯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알고 지내던 가게 주인이 안돼 보였는지 팔아 줄 테니 두고 가라더라구. 그래서 그냥 주고 와버렸는데 버렸는지 먹었는지 갈치 값은 영 못 받았어. 그때 딱 한 번 장사라는 거 해보고 지금까지 노동일만 했어. 그래도 그게 나한테는 제일 맞더라구. 남의 집 파출부도 한 1년 넘게 해봤는데 잘 했네, 못 했네 말들이 많고. 노동판에 나가 품을 파는 게 힘은 들어도 마음은 편했다니까."

"농사일도 힘은 들지. 모내기철이 되면 일산으로 일을 다니는데 새벽 4시에 일어나서 5시에 모래내에서 버스를 타면 수색에 내려. 거기 가면 차가 아줌마들을 태우러 오거든. 그 차를 타고 가서 하루 종일 모를 내고 오는 거지. 한참 일을 하다보면 논 둑에 우리 딸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게 보여. 일 나올 때 집에 두고 오는데 어떻게 찾아오는지 꼭 내 뒤를 따라와서 논둑에 쪼그리고 앉아 있거든. 저도 외로워서 애미를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가봐."

농사일을 다니던 어느 날 당시에는 논밭과 기름 탱크만 있던 황량한 상암동에 도로공사가 시작되었다. 농사일보다 높은 품삯을 주는 도로 공사 일을 할 땐 달품으로 제법 돈도 만져 보았다.

"박정희 때인데 그쪽으로 길을 내는 도로공사를 하는 거야. 거기서 돌도 나르고 흙도 나르니 천오백 원을 줘. 농사일 품삯에 댈게 아니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공사장으로 돌았어. 공사장 함바집에서 밥도 엄청 해보고, 고물장사 하기 전까지는 주로 집 짓는데 나가 허드렛일을 했지.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손이 이렇게 병신이 됐어. 구부러지더니 펴지질 않아."

노동의 후유증으로 망가진 할머니 손. 이 손으로 안 해 본 일이 없다.
 노동의 후유증으로 망가진 할머니 손. 이 손으로 안 해 본 일이 없다.
ⓒ 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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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일이든 여자일이든 당신 앞에 떨어진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열심히 했다는 할머니. 동네사람들도 "세상사람 다 놀아도 미자 엄마는 절대 안 놀아"라며 일거리가 있으면 소개를 시켜주었을 정도란다.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 가혹한 세상, 특히나 아이까지 딸린 이혼녀로 살기에 너무나 버거웠던 지난 세월들. 할머니는 살기 위해 강해지고, 강해지고 또 강해져야만 했다.

"나, 돈만 벌 수 있다면 안 해 본 일 없는 사람이야. 논일, 밭일, 파출부에 노가다까지. 벽돌도 져보고 시멘트도 져보고, 고물장사 하면서는 남자들하고 싸움도 많이 해 봤네. 똥지게도 그래. 셋방 사는 사람들에게 주인이 변소 푸는 값을 내라는데 너무 많이 달라잖아. 그래서 실랑이를 하다 내가 똥지게를 가져다 직접 퍼다 버렸어. 돈도 아깝고 화도 나고 그래서 말이야. 그랬더니 소문이 났는지 어느 날 우리 집에 누가 찾아왔더라구. 여기 똥 푸는 아줌마네 집이냐구. 하하하."

벽돌도 지고, 나무도 나르고, 못질도 하고 청소도 하고... 일이란 일은 닥치는대로 뭐든 했다는 할머니. 육신이 고되고 힘들어도 딸을 잘 키우겠다는 욕심에 몸이 부서지도록 일을 했지만 자식은 여전히 마음을 아프게 하는 단 하나의 걱정이다.

"자식은 맘처럼 안 되대. 노가다를 나가든 고물장사를 하든 우리 딸 만큼은 뒷바라지 해서 잘 키워보고 싶었는데... 하긴 내 형편이 그러니 뭐 잘되길 바라지도 못하지만 말이야. 애들 잘 가르치지 못했어. 막내도 중학교 겨우 나와 지금까지 결혼도 못하고 힘들게 사는데 그거(딸)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여든을 넘긴 노모가 마흔 된 딸을 걱정한다. 이제 어른이 다 된 딸을 뭐 그리 걱정하느냐고 물으니 할머니 마음에는 여전히 그 딸이 그 옛날 논두렁, 밭두렁에서 앉아 일하는 엄마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앉았던 애처로운 여섯 살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딸을 생각하면 늘 애잔하고 가슴언저리가 아려온다고. 

젊은 시절 힘도 좋고 건강도 좋아 남자와 비교해도 지지 않을 만큼 일을 했다는 할머니. 여자 혼자 자식을 키우며 살다 보니 성격도 괄괄해지고 입도 거칠어져 한때는 욕쟁이 할머니로도 유명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다 옛날일이다.

과도한 노동의 후유증과 낙상사고로 척추가 내려앉고 관절들이 약해져 일은커녕 방안에서 조차 거동이 어려운 상황. 노동으로 지친 몸과 마음에 위로가 되어주었던 술도 이제는 더 이상 마실 수 없을 만큼 건강이 급속하게 나빠지셨다.

"난 이제 꼼짝을 못해. 일어나 걸어 다니질 못하니 하루종인 방구석에만 앉아 있는 거지. 공연히 나갔다가 언덕이나 계단에서 넘어지기라도 하는 날엔 큰일이잖아."

자동차가 올라가기도 쉽지 않은 급경사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할머니 집. 눈이라도 내리면 젊은 사람들도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은 곳이라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바깥세상을 만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인다.

김장김치를 나누어 드리러 다음날 다시 찾아오겠다는 정창길씨의 말에도 잡은 손을 쉽게 놓지 못하시는 할머니. 또 다시 아무도 없는 빈방에 홀로 남겨져 긴 외로움과 씨름을 하실 것을 생각하니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박막순 할머니는?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 언덕빼기 빌라 반지하방에 전세로 살고 계심. 기초생활수급자로 매달 30만원의 정부지원금을 받아 생활하고 계시나 약값이나 생활비로 쓰기엔 빠듯한 상황. 거동이 어려워 혼자 외출은 불가능하며 생활보조 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가끔 병원에 다니는 것 외엔 거의 집안에서 홀로 지내고 계심.  

덧붙이는 글 | * 어르신들 친구가 돼주세요. 이 글을 읽고 어르신들에게 답글을 보내주세요.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60-1, 02-324-0455)으로 후원을 보내주세요. 편지, 이메일을 보내주시면 어르신들에게 전해드리겠습니다. 한 끼 식사보다, 하루 잠자리보다 더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더불어 우양에도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태그:#박막순할머니, #독거노인, #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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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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