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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멀쩡한 사람을 패배자로 만들 수 있을까? 간단하다. 말도 안되는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다. 성적이나 연봉이나 아파트 평수라는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된다. 이러한 터무니 없는 기준은 사회 안의 비공식 계급이다. 또한 모두가 믿도록 강요당하는 훌륭한 사이비 종교가 된다.

 

삶이 지금보다 더 단순했던 산업화 시대의 가치를 생각없는 사람들이 지금 복잡다양한 정보화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여 강요하고 있다. 이로써 전국민이 높은 성적과 연봉과 아파트 평수를 얻지 못해 불행해지는 이상한 사회가 된 것이다.

 

멀쩡한 사람이 자동으로 패배자가 된다

 

이 안에서는 극소수 성적이 높거나 연봉이 억대인 사람들 만이 군림하고 대접받는다. 나머지 멀쩡한 사람들은 자동으로 패배자가 되며 높은 성적, 높은 연봉, 넓은 아파트 평수라는 허상을 좆아 가짜 상류층이 되려고 바쁘게 뛰어다닌다. 이른바 스펙이 대학생들의 종교가 되고, 불안한 사회에서 몇안되는 안정된 직장으로 환경미화원이 경쟁률 상위권에 드는 직업이 되었다.

 

구경미의 소설 <게으름을 죽여라>는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작가는 <노는 인간>, <미안해, 벤자민>을 낸 바 있다.  총 아홉 편의 단편이 실린 이번 소설집에서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곳의 사회적 현실을 아무런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응시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백수들, 그리고 백수와 다를 바 없는 무력감과 패배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 소설집에는 단편소설 아홉 편이 담겨 있다. 뮤즈가 좋아, 독평사, 일주일, 게으름을 죽여라, 새로운 삶, 은자와 함께, 잠자는 고양이, 거짓말, 2005년 6월, 귀덕과 애월 사이 등이다.

 

요즘 세상은 패배자가 주류이다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모두 주류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이들은 주류이다. 요즘 세상은 패배자가 주류이다. 이것이 바로 생지옥이다. 패배자 아닌 사람을 찾기란 지극히 힘들다. 패배자의 세상으로 온 것을 환영한다!

 

<뮤즈가 좋아>의 주인공은 아버지와 결별까지 하면서 로커가 되겠다는 큰 꿈을 품지만 결국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먹은 채로 학원가를 전전한다. 노량진의 수많은 젊은이들은 이러한 잉여 인력들로 넘쳐난다.

 

<일주일>의 주인공은 창업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 디자이너에서 판매원으로 연봉과 대우가 강등되는 것까지 감수하지만 실은 창업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누구나 똑같은 로보트가 되는 전체주의 사회

 

<게으름을 죽여라>의 주인공은 하루에 열 통도 넘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쓰지만 단 한 번도 합격 통보를 받지 못한 채 '다 큰 게 방 안에서 뒹굴거린다'는 타박을 듣는다.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자의든 타의든 '다 큰 게 방안에서 뒹굴거리는' 게으른 존재가 되었다. 평범하다는 것은 모두가 똑같은 로보트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머리 속의 사고방식도 모두가 똑같으며 옷차림 같은 겉모습도 모두가 똑같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이 전체주의 사회의 특징이다. 자식이 평범한 월급쟁이가 되기를 바라는 그 어머니도 자신이 평범한 주부로 살도록 강요받았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그들의 탓인 것만은 아니다. 작가는 그들이 이처럼 '바보같이 살' 수밖에 없는 사회적 상황들을 곳곳에 흩뿌려놓는다.

 

평범해지기 위해 누구나 패배자가 된다

 

'평범해지기' 위해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까다로운 기준들을 모두 통과해야 하고, 그 선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누구나 '패배자'가 되는 현실. 이 '평범한' 기준은 누가 만들어놓은 것인가? 삶이 단순했던 초기산업화시대의 캐캐묵은 낡은 유물이다.

 

이로써 양산된 무수한 패배자들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들은 우리의 부모들이고 친구들이고 자식들이며, 어쩌면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패배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하지만 패배자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무조건 아프고 슬프기만 한 건 아니다. 작가는 오히려 그런 상황에 당당히 맞서는 인물들을 담담하게, 때로는 익살스럽게 그려낸다. 그들은 자신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고민하고, 그 상황을 어떻게든 헤쳐나가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한다.

 

<게으름을 죽여라>에서 이들은 삶의 의미는 아랑곳없이 사람의 가치를 오직 '성적'이나 '연봉'으로 결정짓는 세상에 대해 반항이나 무시의 제스처를 취한다. 그리고 <2005년 6월, 귀덕과 애월 사이>의 인물은 무인도로 도피해버린다.

 

 

패배자를 승리자로 전환할 때

 

하지만 그러면서도 <뮤즈가 좋아>의 젊은이는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지쳐 쓰러지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는 땀의 열기를 가지고 있으며, <일주일>에서는 언젠가는 화려하게 부활해 날아오를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총체적 난국에도 불구하고 힘차게 건배를 외칠 수 있는 것이다. 패배의 쓴잔을 높이 들면서! 평범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가짜로 평범해지지 못해 패배자가 되고 바보로 사는 이들의 이야기. 진짜로 평범한 사람의 행복을 앗아가는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누가 멀쩡한 사람을 패배자로 만드는가? 이제 멀쩡한 사람을 패배자로 만드는 늙은 바보들을 추적할 때이다.

 

20억 짜리 집을 사기 위해 "대박 나세요"를 인사말로 주고 받는 사회는 결코 모두가 행복해지는 사회가 아니다. 한국 정부는 국민들이 인간답게 안정되게 살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회복할때 패배자는 승리자가 될 것이다.

 

패배자에게는 희망이 없을까? 모두가 똑같다는 평범함이라는 허상을 버릴 때, 토익점수 900점 이상이라는 허상을 버릴 때, 시험 점수로 전국에서 1등부터 꼴등까지 하나로 줄 세워 놓는 것을 버릴 때, 누구나 세상에 도움이 되는 승리자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세상에 도움이 되는 달란트를 가지고 있다. 온 사회가 당신의 달란트를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가짜 평범함은 버리고 이 달란트를 축하하자. 우리는 누구나 승리자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게으름을 죽여라

구경미 지음, 문학동네(2009)


태그:#패배자, #구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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