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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을 남파로 오르는 들머리에는 '長白山' 세 글자가 선명하다. '長白山' 세 글자는 보는이에게 여기가 중국땅이라는 실감을 펑펑 안겨준다. 만약 이곳이 북한이거나, 통일 조국의 영토 안이라면 틀림없이 '백두산', 아니면 최소한 '白頭山'이라 적혀 있으리라.

 

매표소도 자못 거창하다. '백두산 오르는 길에 누가 기념품 따위를 살까. 중국 사람들 장삿속은 해도 너무하군.' 그러나 가만 보니 그게 아니다. 하산한 사람들은 모르겠으나 이제 막 천지를 향해 등정하려는 사람들은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꾸고' 있다. 우리돈으로 1만원씩 내고 두툼한 겨울 파카를 빌리고 있다.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상의 하나를 잠깐 빌려입는 삯으로, 우리돈과 중국돈의 교환가치를 생각할 때 그 돈이면 그 옷을 사고도 남을 액수인, 1만원을 지불하는 것이다. 지금이 비록 시기적으로는 한여름이지만 백두산 천지 일대에 올라가면 갑자기 눈이 내리기도 하고, 엄동설한의 한풍이 몰아치기도 하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서 한겨울 옷을 준비해야 한단다. '엥, 무슨 소리! 순진한 한국인 관광객들 돈 쓰게 하려고 별 말씀을 다 하시네!' 나는 그냥 버스에 올랐다.

 

작은 버스는 가파른 산길을 휘청휘청 오르기 시작한다. 길은 말 그대로 S라인이다. 세상에 이처럼 혹독한 S라인은 처음 본다. 백두산은 왜 이리 굶었을까. 화산이 폭발하면서 먹을것들이 다 날아가버린 겐가. 백두산은 본디 정상이 한없이 날카로운 험산이었지만, 화산이 폭발하면서 머리 부분이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거의 정상에 이르기까지도 편편하기 짝이 없는 지형이 되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소형 버스에 실려가면서 느끼는 기분은 그와는 정반대일 뿐이다. 소형버스는 도대체 앞으로는 전진할 줄조차 모르는 기세이다.

 

그저 왼쪽으로 가다가 급히 오른쪽으로 돌고, 그런가 하면 곧장 다시 왼쪽으로 가파르게 꺾는다. 사람들은 아무도 말이 없다. 짙은 안개에 가려 아무런 경치도 보이지 않으니 애당초 감탄할 일도  없지만, 그 때문이 아니다. 흘낏흘낏 차창 밖을 내다본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안개뿐이고, 아차 하면 절벽으로 추락할 듯 길섶 바짝 붙어 구르는 차바퀴 끝으로는 지금 안개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천길 낭떠러지라고 하니, '이제 오늘, 여기서 인생이 끝나나?' 싶은 불안감에 마음을 떨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이고 한국인이고 모두들 아무도 말이 없지만, 표정은 그 누구도 숨기지 못하고 있다.

 

이윽고 소형버스가 멈춰선다. 사람들이 앞다투어 내린다. '天池' 두 글자가 뚜렷하게 음각된 바위가 사람의 앞을 턱 가로막는다. 여기가 바로 천지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중국이나 북한에서는 흔히 바위에 붉은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게 보통인데, 남파로 오른 천지 입구에 있는 '天池' 두 글자는 어쩐 영문인지 녹색으로 새겨져 있다.  여기도 '녹색 성장'의 계절풍(?)이 불었나 하는  생각도 언뜻 들었지만 그게 아닌 것은 자명한 일이고, 어디 물어볼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지나치기는 하지만 어쨌든 신기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녹색 글자 '天池'가 새겨진 비석을 손으로 쓰다듬어 본다. 손이 금세 굳는다. 아까 남파 매표소 앞에서 느끼던 그런 날씨가 아니다. 여기는 말이 8월이지 그냥 12월일뿐이다. 영하인 것도 틀림없지만, 세차게 불어대는 찬바람 때문에 체감 온도는 그보다도 한없이 춥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은 한결같이 손을 옷 안으로 집어넣는다. 그러나 사진을 찍어야 하는 나는 그럴 수도 없다. 게다가, 손도 손이지만 얇은 여름옷만 입었으니 지독한 한겨울 추위 앞에서 오금이 저려 몸을 움직이기가 불편할 지경이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아까 만원을 주고 겨울파카를 빌려입지 않은 것이 정말 후회스럽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래도...... 춥다고 천지를 향해 걸어가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

 

바로 앞, 멀어도 불과 10m 정도 앞서가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세찬 바람에 흩날리는 빗자락, 거기에 짙은 안개까지 자욱하니 이만하면 거의 최악의 관광 날씨이다. 안내원은 처음부터 버스에서 내리지도 않은 모양이다. 안내원은 버스에서 내리는 우리 일행의 뒤통수를 향해 "국경선을 넘어가면 안 됩니다. 총격을 가하는 일도 있어요."하고 말하고는 그냥 차량 안에 남아버린 것이다. "웃기는 놈이야." 일행 중 누군가가 비난을 했지만, 그렇다고 달려올 안내원도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안내원에게 신경을 쓸 겨를도 없다. 모두들 조심조심 걷는 데에만 온통 관심을 집중하고 있을 따름이다. 백두산의 흙은 본디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긴 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푸석푸석하여 바람이 불면 흩날리고, 마른 날씨에도 그렇지만 비가 내린 날은 특히 미끄러우니, 천지에 빠지지 않으려면 조심하라고 거듭 경고를 한 안내원의 말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궂은 날씨에 몸을 아끼느라 버스에 제 임의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결과만 말하면 안내원은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있는 셈이다.

 

조심조심 걷다가 우리는 문득 저절로 발걸음이 멈춰지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이 무엇인가. <禁止越境>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월경 금지'이다. 국경을 넘지 말라는 경고가 붉게 새겨진 팻말이 좁은 길가에 세워져 있다. 자세히 보니 팻말은 가느다란 노끈에 매달린 채 땅에 박혀 있다. 이 노끈이 결국은 국경선을 나타내는 표식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국경이야." 누군가가 탄식처럼 말한다. 땅만 보고 걷던 눈을 들어보니, 노끈은 가느랗게 이어져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그렇게 국경은 끝이 없다. 보이지 않지만 엄연한 것, 마음속에 지워버리고 싶지만 현실에는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 그것이 바로 국경이다. 손으로 <禁止越境> 팻말을 쓰다듬어 본다. 안개와 비에 젖은 나무팻말은 촉촉하다. '금지'와 '월경'으로 된 무서운 팻말이지만 안개와 는개에 속절없이 부드러워져 있다. 나무팻말이 어찌나 연해져 있는지 어쩌면 금세 녹아 없어질 양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가 휴전선이라면 우리는 지금 이 팻말이 녹아없어지기를 하염없이 바라리라. 그러나 이곳은 중국과 삼천리 한반도 사이의 국경이므로, 우리는 이 노끈과 팻말이 좀 더 튼튼하게 살아있기를 바란다. 팻말과 노끈아, 부디 강고하게 지켜다오.

 

조금 더 나아가니 본격적인 국경 포지석이 서 있다. 비석의 상단에서 중간 부분까지에는 <中國 4>라는 붉은 고딕체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아랫부분에는 그것을 1990년에 세웠다는 연도 표시도 되어 있다. 내가 발을 딛고 선 이곳이 중국땅이니, 그렇다면 비석의 반대편에는 <朝鮮 4>가 역시 붉은 색으로 쓰여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만 하다가, 슬그머니 주위를 돌아본 다음, 비석 위로 머리를 숙여 뒷면에 새겨진 글자를 확인해본다. 북한의 병사가 지키고 있다니 비석 뒤로 넘어가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글자를 확인하는 사이에, 소심한 나를 내놓기 비웃는 양 관광객들의 상당수가 <越境>을 하여 북한 지역으로 들어가 있다. 저들이 중국 사람이라면 국경을 함부로 넘은 죄가 적용될 것이고, 만약 한국인이라면 국가보안법의 처단을 받을 일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중국이든 북한이든 경비 중인 군인은 없는 낌새이다. 비와 안개가 그들을 격리시켜 놓은 것 같다. 그래도 혹시나 싶은 조마조마한 기분에 나는 사로잡힌다. 본디 경계병은 남의 시야에 드러나지 않게 존재하는 법이니까.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는 채로 나는 국경을 넘어간 사람들을 아슬아슬하게 응시한다.

 

사람들은 흡사 춤을 추는 듯 보인다. 그들은 지금 자연이 위력을 떨치니 인위적인 국경이 없어져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모습이 안개 속에 묻혀 한없이 흐릿하게 보이는 탓에, 과연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분명하게 확인이 되지를 않는다. 아무리 농무에 갇혔지만 천지의 공기는 한없이 맑고 깨끗할 터, 그래서 사람들은 두 팔을 치켜들고 심호흡을 하고 있는 듯 여겨지기도 한다. 아니면, 만세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스라이 보이는 실루엣으로 미루어보면 서로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듯도 하고, 더러는 돌을 줍는 자세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그들을 찍는다. 그들은 아무도 내가 자신들을 찍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사진은 특이하다. 짙은 안개와 연한 회색빛 사람들, 그리고 국경 표식만 사진에 잡힌다. 눈부신 천지도 없고, 백두산의 위용도 없다. 그러나 추위 속에서 나는 흐뭇하다. 한국을 떠나 이곳으로 달려올 때, 본디 아름다운 천지를 보는 것 자체가 최고의 목표는 아니었다. 국경을 보는 것, 그것이 지금 제대로 달성되고 있는 것이다. 백두산의 웅자와 천지의 명정이 지금 생생하다면, 국경을 나타내는 저 초라한 비석과 나무팻말들이 어찌 뚜렷하게 보일 것인가. 그 아름다운 경치 앞에서 국경의 표식들은 그저 존재를 알리는 데에 급급한 사정에 처하고 말았을 터이다. 그러나 지금 안개가 눈부신 풍광을 다 덮어버렸으니 국경은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인들이 저처럼 국경을 넘어 온몸으로 분단을 체험하고 있지 아니한가.

 

천지의 물 한 방울 못 구경한 채 하산했다. 아래로 내려오니 압록강 최상류의 물줄기가 콸콸 흐르고 있다. 강폭이 좁은 곳은 1m도 채 안 되니 그냥 계곡의 도랑이라고 하면 되겠다. 펄쩍 뛰어도 충분히 건널 수 있을 만큼 도랑은 좁다. 문득 버스가 선다. 화산이 폭발할 때 순식간에 불에 탄 채 깊숙이 묻혔다가 근래 땅위로 노출된 나무 화석들을 구경하기 위해 잠시 정차한다고 한다. 사람들 중에는 더러 그것보다는 흐르는 물에 손을 한번 씻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모양이다. 나도 그렇다. 우리는 '압록강 발원지'라는 작은 깃발들이 나부끼는 개울가로 다가간다. 아,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깃발들은 철조망에 매달려 있다. 이 철조망은 무엇인가. 북한 사람들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중국측에서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국경 표식이라는 말이다. 여기도 국경이! 본래 국경은 저 멀리 만주 벌판 너머, 광개토대왕의 말발굽이 치달리던 그곳까지가 아니었나. 푸르게, 맑게, 콸콸 흘러서 내려가는 압록강 최상류 좁은 도랑 앞에서 나는 홀연 답답해진다.

 

 


태그:#백두산, #압록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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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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