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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찬바람이 스산하게 불기 시작하는 11월이 되면 연예계에 잔인한 기억들이 점철되어 나타난다. 심지어 괴담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매해 시기적으로 이쯤만 되면 연예계에 슬프고도 안타까운 굵직한 사건사고들이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이후 대중의 관심이 이쪽으로 쏠리기 때문에 그렇지 않겠느냐는 억지스런 분석 따위는 무색해질 정도로, 이 시기에 대중들과 대중 예술인들은 그토록 무거운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음악인들 사이에서 11월 1일은 매우 비극적인 날로 기억된다. 그 날은 대한민국의 거대한 두 뮤지션이 사고와 병으로 각각 삶을 마감한 날이기 때문일 게다. 그리고 그 흐릿한 눈 속에 바로 한국 대중음악의 전설로 남아있는 김현식과 유재하라는 커다란 두 거인의 모습이 맺혀져 있다.

 

음반의 재발견⑨: 김현식 3집 <비처럼 음악처럼>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경향신문과 가슴네트워크에서 발표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13위를 차지한 김현식 3집 <비처럼 음악처럼>의 가치는 굉장히 각별하다.

 

수록곡들의 면면을 보자면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과 전태관, '빛과 소금'의 장기호와 박성식, 그리고 유재하의 주옥같은 곡들이 그들의 멤버이자 우상이었던 김현식을 향해 헌정되어졌으며, 또한 그 아름다운 울림은 김현식의 예의 깊고도 빈 목소리를 통해 강렬하고도 잔잔하게 퍼져 나간다.

 

참고로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팀명은, 김현식 1집에서 첫 번째 트랙에 담겨 있는 곡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가수 이장희가 주선해 제작된 그의 1집은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지만 펑키한 사운드로 지금도 회자되는 그룹 '사랑과 평화'가 백밴드로 참여한 명반이다. 그의 후기음반에 실린 병색이 완연했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매끄러운 초기 음성과 록 사운드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음반으로 평가된다. 사랑과 평화는 2000년 김현식 추모 10주년 기념음반을 통해 김현식 6집 <내 사랑 내 곁에>에 실린 겨울바다(최이철 작곡)를 재연했지만, 그 감동은 1집에 미치지 못했다.

 

김현식의 음악은 86년 이후에 '신촌블루스'란 팀과 여러 차례 융합되고 그들과 함께 같이 음악을 해 나갔다. 그의 블루스적 감성과 쓸쓸함이 대중들에겐 꽤 깊이 각인되어 있겠지만, 그의 소리를 그렇게 좁게 규정짓기엔 그의 음악 영역은 상당히 넓었다. 그 중심에는 역시 3집 <비처럼 음악처럼>이 있는데, 돌이켜 보면 당시 이렇게 유능한 음악인들을 어떻게 한 밴드로 구성할 수 있었나 의문이 들 정도로 이들 멤버들의 면면과 음악성은 지금 들어도 가히 압도적이다. 

 

초기 장기호, 김종진, 전태관, 유재하 라인으로 이어지는 이 드림팀은 밴드 결성이후 물 만난 고기처럼 자신들의 새로운 창작력을 김현식에게 바치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들의 진취적인 사운드에 대중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음반발매 직전, 유재하가 탈퇴하고 박성식이 들어오면서 여러 가지 억측을 낳았었다. 당시 유재하의 탈퇴에 대해 김현식이 1990년 스포츠 신문을 통해 밝힌 바는 음악 스타일과 견해 차이였는데, 사실 그 이유만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이 없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음악 견해 차이로만 유추해보자면, 1988년 김종진, 전태관이 중심이 되어 따로 발매한 봄여름가을겨울 1집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에 실린 퓨전재즈와 팝 사운드가 더욱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히 봄여름가을겨울에 실린 그 세련된 사운드들은, 87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김현식이 잠시 자리를 비운 그 시기를 메울 만큼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 이후 김현식이 정착한 곳이 블루스였다는 것을 상기하면 김현식 3집에서 그들 밴드가 찾았던 일련의 음악적 접점은 조금은 위태로운 행보가 아니었나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사실 봄여름가을겨울 1집에 실린 이들의 사운드는 외려 정원영, 김광민, 한상원, 한충완으로 이어지는 버클리 음대 유학 1세대 음악들과 맞닿아 있었다. 특히 김현식 3집에 실려 있던 김종진의 곡 '쓸쓸한 오후'는 그의 2집 <사랑했어요>로 각인된 기존 김현식 음악 스타일과도 꽤 구분되는 사운드였다. 이런 점을 고려하자면 유재하의 탈퇴는 팬들 사이에서 여러 억측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내막은 유재하가 바친 그의 1집 <사랑하기 때문에> 전곡 중 김현식이 '가리워진 길'이라는 한 곡만을 취사선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얼마 전 TV 프로그램에서 김종진과 전태관을 통해 알려졌다. 당시 김현식이라는 뮤지션이 가진 가공할 영향력을 새삼 절감하게 만든다. 이쯤 되면 도대체 그들에게 김현식이란 존재는 어떠한 존재였는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어진다. 1987년 11월 1일 유재하의 사망 이후, 고인의 곡인 '그대 내 품에'가 김현식 4집 7번째 트랙으로 다시 한번 실리게 된다. 김현식, 그는 과연 이 노래를 부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3집<비처럼 음악처럼>에서의 정점, 그리고 이별

 

그러한 일련의 사건 이후 발매된 1988년 4집은 당시 '페이퍼모드'라는 밴드 멤버로 있었던 윤상의 '여름밤의 꿈'과, 장기호의 '사랑할 수 없어'를 담은 것 외에도 다시 한 번 재기를 꿈꾸는 그의 의지를 가득 담고 있었다. 하지만 3집에서 함께 했던 멤버들은 이미 각자의 길을 향한 다음이었고, 따라서 그만큼의 힘을 싣기에는 시간과 변화의 한계가 상당히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이는 3집에서 폭발했던 그 황금 멤버들의 조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음악팬들이 기대했던 그들의 진취적인 사운드를 충족시키는데 부합하지 못하 고 그 자리를 후배들에게 일정 부분 양보해야 했다. 또한 가족 간의 불화와 일련의 개인적인 사건으로 인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1989년 '비오는 날의 수채화', 1990년 함춘호, 배수연, 황수권, 최태완과 함께 5집 <넋두리>를 연이어 발표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유작인 6집 <내 사랑 내 곁에>를 병마와 싸우며 동시에 진행한다.

 

우리에겐 이승환과 함께 한 '이오공감'의 멤버로 잘 알려진 오태호의 '내 사랑 내 곁에'라는 곡은 그러한 힘겨움 속에서 완성되었다. 덕분에 그의 목소리와 노래는 그렇게 해마다 이맘때 쯤이면 그의 인생처럼 초대받지 않은 손님마냥 우리에게 다가와 진득한 슬픔만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다.

 

그를 다시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게 만든 그 잔인한 11월에 어느 날은 그래서 그토록 쓸쓸하고 먹먹하다. 아쉬움에 그가 남긴 음악과 그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조우하려 할 때면 그래서 귀보다 가슴이 먼저 아파오는가 보다. 원치 않았던 이별이기에 더욱 처절하게 말이다.


태그:#음반의 재발견, #김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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