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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MBC 황금어장의 <라디오 스타>를 꼽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라디오 같은 세트에서 DJ같은 MC들이 게스트를 불러놓고 음악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누군가는 <무릎팍 도사>에 묻혀 가는 프로그램, <무릎팍 도사> 끝나고 20분 정도 하는 프로그램 정도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라디오스타의 오프닝에서는 종종 무릎팍 도사의 출연자에 따라 편성 시간이 고무줄처럼 되고 때로는 5분이 된다는 식의 자학적이지만 사실적인 멘트가 나온 적도 있다. 개편 때에는 무릎팍 도사 덕분에 살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시청률이나 인지도 측면에서 따지자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라디오스타의 팬이라면 다 안다. 황금어장의 간판 코너는 <라디오 스타>라는 것을. <라디오 스타>는 몇 번의 개편이 와도 사라지지 않을, 아니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라디오스타가 무슨 음악 프로그램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당당하게 음악 프로그램임이 분명하다고 대꾸해줄 것이다. 동의할 수 없다면, 방송을 꾸준히 보라는 말도. 그게 힘들다면 11월 11일 방송된 이승철, 봄여름가을겨울 편만이라도 보라고 해주고 싶다.

고품격 음악방송 <라디오 스타>

김구라, 김국진, 신정환, 윤종신 등 이 네 명의 MC는 각자의 캐릭터대로 매회 자기 역할을 잘 소화해내며 찰떡 호흡을 자랑하고 있다. 게스트에 따라 보고 안 보고 결정하는 여타의 토크 프로그램과는 다르게 <라디오스타>만은 '닥본사(닥치고 본방 사수)' 하는 이유도 바로 어떤 게스트가 나와도 기본 이상은 할 거라는 믿음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좋아하는 게스트가 나오지 않은 11일 방송도 당연히 기대감을 안고 시청을 했다. 사실 나는 故김현식의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는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김현식의 노래 몇 곡 정도는 알고 있다. 비처럼 음악처럼, 내사랑 내곁에 등은 너무도 유명하니까.

들을 때마다 조금은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 노래였기에 그 곡을 부른 김현식 또한 어두운 사람일 거라고 자연스럽게, 아니 내 멋대로 생각해 왔다(어쩌면 스물 즈음에 꽂혀있던 '서른 즈음에'를 부른 김광석과 비슷하게 느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현식은 그렇게 가난하진 않았고, 가요계에서 '원펀치' 였다는 놀라운 얘기를 이승철과 봄여름가을겨울은 들려주었다.

그들이 추억하는 김현식과 그 시절의 이야기는 80년대 생인 내게도 애틋함으로 다가왔다. 좋아하는 음악을 즐겁게 하면서 말 그대로 예술처럼 살았던 그들의 이야기는 가을밤 촉촉하게 내 감성을 자극했다.

김현식이 봄여름가을겨울과 밴드를 하고서 그들을 집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차를 사고, 며칠 만에 빙빙 둘러가며 데려다 주는 게 힘겨워서 그냥 차를 주었다는 일화는 김현식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후배들이 그와 함께 작업하고 싶어 하고 그를 존중해 곡을 선물했다는 얘기들, 유재하가 그에게 열 곡을 바쳤다가 그 중에서 한 곡만 선택받자 삐쳐서 나갔다는 일화까지, 미니홈피 음악에서나 존재하던 이름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져 깊은 밤 마음까지 훈훈해졌다.

2류를 자처하는 1류 MC들

MC들은 스스로를 깎아 내리며 때로는 이류라고 자처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은 일류다. 깐족대는 신정환도 노래할 때는 진지해지고, 예능늦둥이라며 주워 먹는 개그에 바쁜 윤종신도 자신의 음악관에 있어서는 고집을 꺾지 않으며, 비록 얕기는 해도 다양한 지식을 갖고 있는 김구라나 조용히 있다가도 좋아하는 음악은 흥겹게 부르기까지 하는 김국진까지, 네 명의 MC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음악을 사랑하고 프로그램을 사랑하면서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

물론 막말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방송 전후로 기사에 오르내릴 만큼 화제가 되고, 욕을 먹고 사과하기도 하는 일들이 여전히 라디오 스타에겐 꽤 흔한 일이다. 하지만 방송을 꾸준히 보는 시청자라면, 어떤 면에서는 그들에게 하는 욕이 과한 처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MC들은 게스트에게 결코 막 대하는 게 아니다. 그저 MC 서로에게 대하는 것처럼 평등하게, 똑같이 대할 뿐이다. 때로 근황을 전하며 게스트에게 짓궂게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게스트의 과거사나 치부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것마저 사실은 게스트를 띄워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끔 MC끼리 편을 먹고 게스트와 싸우려는 것처럼 대치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MC들 서로 싸우기 바쁘다. 그러는 와중에 다른 데에서는 말하지 않았던 지난 일의 진실을, 또는 말하지 못했던 게스트의 진심이 터져 나오곤 한다.

들리는 TV <라디오 스타>

20여 년을 백밴드 이미지를 벗기 위해 반주를 하지 않았다는 봄여름가을겨울이 반주를 하고 이승철이 부르는 '비처럼 음악처럼' 은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부른 '쓸쓸한 오후' 또한 처음 듣는 곡임에도 도입부부터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 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더없이 쓸쓸해졌다. 어쩌면 라디오 스타는 가요계가 불황이라는 요즘에 유일하게 음악 얘기를 제대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일지도 모른다. 항상 마지막에 신정환이 음악이란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편집 센스 역시 뛰어나다. 천둥번개에 비가 오고, 합성까지 화려한 CG는 두말 할 것이 없고 자막까지 매번 감탄하고는 한다. 말 없는 출연자와 MC들의 속마음을 넣는 말 주머니는 누구를 흉보지도 않으면서 그들의 마음을 십분 대변해 주는 듯하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출연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가볍게 흉을 보았다면 말없이 웃는 장면에서 '미안' 이라는 자막이 들어가는 식이다. 정말로 사소한 것이지만 그런 편집에서마저 제작진의 섬세함과 배려를 느낀다면 내가 팬이라서 '오버'하는 걸까.

예능과 음악 사이에서 진화하는 <라디오 스타>

제작진과 MC 그리고 출연하는 게스트의 음악 사랑을 난 느낀다. 예능에 몸담고 있지만 마음엔 음악이 가득하다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김현식을 추모한다는 것이, 그것도 다름 아닌 라디오 스타 같은(?) 프로그램에서 한다는 것이 어쩌면 고인을 욕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도 했다. 하지만 출연 게스트가 출연 소감을 말했듯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라디오스타는, 아마 故 김현식이 보았대도 모르긴 몰라도 껄걸 웃으며 보았을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라디오 스타는 3류 예능 프로그램이 아니다. 발전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정말로 고품격 음악방송인 <라디오 스타>가 예능과 음악 사이에서 줄타기를 균형 있게 잘하며, 앞으로도 쭉쭉 더 진화해 나갈 것이란 걸 믿고 또한 기대해 본다.  


태그:#라디오스타, #김현식, #신정환, #이승철, #봄여름가을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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