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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솜보 부둣가에 도착한 시간은 정오 즈음, 초대 대통령 콰미 은크루마 시절에 건설되었다는 아코솜보 댐을 살짝 스쳐지나 볼타 지역(Volta Region, 우리나라의 도에 해당)에 속한 크라치 웨스트 군(District)으로 가기 위해 부둣가에 도착했다.

허기가 졌다. 삶은 계란을 팔고 있는 아줌마가 배를 기다리는 인파들 사이로 느린 걸음으로 오가고 있었다. 30페스웨스(300원)짜리 삶은 달걀 세 개와 바나나 다섯 송이를 사고 풀 위에 털썩 주저앉아 정신없이 허기를 달래고 나니 그제야 호숫가 풍경이 시야로 들어왔다.

이곳 아코솜보 부두에서 북향하여 볼타지역으로 가려면, 주 일회 있는 배를 타고 열여덟 시간,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하면 거의 하루가 걸린다. 이 호숫길 외에 크라치 웨스트 군으로 가는 다른 방법이 있는데, 비포장 찻길을 따라 열두 시간 이상 차를 타고 달리는 것이다.

울퉁불퉁 거리는 차 위에서 곡예를 하듯 한 나절을 달리는 것에 비하면, 시속 30km의 게으른 배 위에서 호수를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을 마시며, 낯선 사람들의 땀 냄새에 섞여 하루를 보내는 것도 꽤 괜찮은 여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섯 송이 바나나의 달콤함이 입속에서 채 가시기 전, 드디어 북쪽에서 하루 전에 출발한 배가 아주 느린 몸짓으로 아코솜보 부두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 먼저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고 배표를 제시하기가 무섭게 머리에 잔뜩 짐을 인 채 뱃머리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한 소년이 시장에서 산 새끼 돼지를 머리에 이고 걸어갔다. 어린 아이의 얼굴에서 삶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음료수 한 병을 사고 소년에게 건네주지만, 그 삶의 고단함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한 소년이 새끼 돼지를 사고 배를 타러 갑니다. 음료수 한 잔을 건네주었지만, 고단한 표정은 가시지 않습니다.
▲ 새로 산 새끼 돼지 한 소년이 새끼 돼지를 사고 배를 타러 갑니다. 음료수 한 잔을 건네주었지만, 고단한 표정은 가시지 않습니다.
ⓒ 차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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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3층으로 되어 있었다. 1층은 짐을 실을 수 있는 넓은 공간인데 주로 농작물과 차량들로 채워진다. 배 후미 1층과 2층은 2등석인데 의자와 탁자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일찍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의자들 사이를 헤집고 바닥에 주저앉아 가는데, 저녁이 되면 의자와 탁자 모든 것이 침대로 변해 난민수용소를 방불케 한다.

농작물과 차량으로 가득 찬 배가 볼타 호수 위를 지납니다.(돌아오는 배안에서)
▲ 볼타 호수 위의 배 농작물과 차량으로 가득 찬 배가 볼타 호수 위를 지납니다.(돌아오는 배안에서)
ⓒ 차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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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구석을 가득 메운 농작물, ‘얌’입니다.
▲ 배 위의 얌 1층 구석을 가득 메운 농작물, ‘얌’입니다.
ⓒ 차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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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무료한 시간, 부대로 복귀하는 군인이 말을 걸었습니다.
▲ 배 위의 대화 길고 무료한 시간, 부대로 복귀하는 군인이 말을 걸었습니다.
ⓒ 차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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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은 1등석이 있고 기관실이 있다. 2층 한 구석에서는 숯불을 지피고 계란 프라이와 수프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에 나는 몇 번이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배 안과 밖의 모습에 정신을 빼앗겼다. 오늘 밤 나의 숙소는, 나와 동행하는 자동차 뒷자석이다.

호수 위 게으른 배위에서 낮잠을 자기도 합니다.
▲ 배 위의 낮잠 호수 위 게으른 배위에서 낮잠을 자기도 합니다.
ⓒ 차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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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해하는 아이들이 내 차 주위를 서성거렸다. 노트북을 꺼내 트렁크 위에 펼쳐 놓고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여주니 여기 저기 사람들이 몰려와 북적거린다. 노트북 전원이 다 해 더 이상 보여줄 게 없는데도 아이들은 내 차 주위를 떠나지 못한다. 저녁도 먹을 겸 해서 아이들을 차 위로 불렀다. 배를 타기 전 식량으로 장만한 삶은 달걀과 바나나, 그리고 빵을 꺼내 먹으며 몇 가지 놀이를 가르치다 보니 어느새 호수는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노트북에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상영했습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노트북 전원이 다한 이후에도 떠나질 않습니다.
▲ 영화 관람 노트북에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상영했습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노트북 전원이 다한 이후에도 떠나질 않습니다.
ⓒ 차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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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고 있는 곳, 크라치 웨스트 군, 한국이 지원하는 월드비전 가나의 사업장 중 하나이다. 2007년에 사업장을 열고 월드비전 스페인이 지원을 하던 중 스페인의 후원상황이 여의치 못하여 월드비전 한국이 2008년에 인수를 했다. 그리고 바로 식수 특별 사업으로 열 세 개의 우물 관정 사업을 시작했다.

세계 최대의 인공호수라고 하는 볼타 호수와 연해 있는 지역인데 식수가 부족한 지역이라니, 도무지 어떻게 된 연유일까? 하룻밤을 지나도 사방이 온통 물로 가득한 이곳인데 물이 없어  고생을 한다는 것이 잘 믿겨지지가 않았다. 날이 밝으면 그 실체를 곧 알 수 있으리란 생각에 뒷자석에서 보낸 하룻밤이 길기만 했다.

뒤척거리는 호수 위의 밤을 더 싱숭생숭하게 한 건 칠흑같이 어두운 밤, 호수 위 낡은 배 안에서 소변을 볼 화장실을 찾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심야에 별안간 몰아치는 강한 빗줄기가 심하게도 배를 두드렸다. 비가 고인 바닥 위를 깜깜한 밤중에 살금살금 걷는데, 적막한 호수의 밤풍경이 주는 공포란, 차를 타고 가야 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볼타 호수의 귀신이 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고 밤을 보내고 있으려니, 배 위의 하루도 결코 느슨한 여정은 아니구나 싶었다.

우물이 없는 지역에서 이렇게 고인 빗물을 그대로 마시기도 하고 밥을 짓는데 쓰기도 합니다. 물속을 들여다보니 별별 생물들이 물 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 식수로 사용하는 빗물 우물이 없는 지역에서 이렇게 고인 빗물을 그대로 마시기도 하고 밥을 짓는데 쓰기도 합니다. 물속을 들여다보니 별별 생물들이 물 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 차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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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치 웨스트 중심가 케테 크라치에 도착한 것은 아침 열시 경, 그러니까 계산대로 거의 열 여덟시간이 소요되고서다. 부둣가에 사업지부장 프란시스 멘사가 나와 있다. 월드비전 스페인의 사정으로 한 때 사라질 뻔한 사업장이라 더욱 그렇기도 하겠지만, 190cm가 넘는 이 장신의 사업지부장이 그동안에 보여준 열정은 가나에서 아주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시간이 충분치 않아 우리는 서둘러 우물 관정을 마친 마을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첫 번 째로 간 곳은, '올드 오스라마네' 마을이다. 마을 어귀에 차를 세우자 수십명 아이들이 달려와서 환호성을 질렀다. 한 아이의 손을 잡고 간 곳은 마을 중심가, 바로 그곳에 아주 깔끔하고 산뜻한 색깔로 페인트칠을 한 우물이 있었다. 마을 주민들과 아이들이 우물 주변으로 모여들고 누군가 한 명이 펌핑을 하자 아주 맑고 깨끗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물 관정이 완료된 지 아직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런지 주민들은 우물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듯 했다.

올드 오스라마네 마을에서 아이들이 우물물로 세수를 하고 있습니다.
▲ 세수하는 아이들 올드 오스라마네 마을에서 아이들이 우물물로 세수를 하고 있습니다.
ⓒ 차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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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은 지하 30m에서 60m까지 내려간다. 우물 하나를 관정하는 데 미화로 약 8000불에서 1만불 가량이 필요하다. 컴퓨터 촬영 등을 통해서 우선 지질 조사를 끝내고, 다음으로 지하 깊은 곳까지 파이프를 심어 시추를 실시하고 그런 다음 수질 검사를 실시한다. 생물학적 위험요소와 아울러 그 물을 장기간 마셨을 때의 위험성까지 알아내기 위해 중금속 성분조사를 실시한다.

지하에 충분한 양의 물이 흐르고 안전하다고 판명이 나면 마지막으로 뚜껑작업(capping 및 platform)을 실시한다. 외부 오염원이 우물 속으로 역류해 들어가면, 적지 않은 파장을 가져오기 때문에 이런 오염물질들이 우물 내부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차단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고액을 들여 우물을 관정한 만큼, 건기와 우기를 막론하고 연중 내내 안전하게 물을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우물을 한국 시민들이 정성을 모아, 이곳 가나 볼타 지역에 열세 개를 관정했다. 자동차를 사려고 적금을 붓던 중 갑자기 아프리카 아이들이 떠올라 적금을 해지하고 현금을 들고 월드비전 사무실로 직접 찾아 온 한 방송국 PD, 아들에게 나눔의 문화를 가르치며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우물을 짓는데 보태기로 하여 아들 이름으로 우물사업비를 보탠 한 시민, 달력을 팔아 모은 수익금을 통째로 보내온 어느 기업 직원들, 그리고 그 사연을 알 길이 없지만 세계시민으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데에 동참한 여러 시민들, 이렇게 다양한 후원자분들이 모여서 우물 열세 개 관정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깨끗한 물이 터져나오는 것을 보며 기뻐하는 보모덴 마을의 주민들과 아이들입니다.
▲ 환호하는 주민들 깨끗한 물이 터져나오는 것을 보며 기뻐하는 보모덴 마을의 주민들과 아이들입니다.
ⓒ 차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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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빠트릴 수 없는 분이 있는데, 이 분은 자신의 딸 결혼식 축의금을 모두 모은 후 자신의 개인경비까지 더하여 우물 다섯 개를 관정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예전에 어떤 분이 결혼식 축의금을 쌀 가마니로 대신 받은 후 이를 독거노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긴 하지만, 이 우물사업은 내가 직접 사업수행을 진행하다보니 그 감동이 특히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그 분은 그것도 모자라 가나의 어린이들이 축구를 좋아한다는 소식을 접한 후, 축구공과 신발 등 천만 원어치를 구입하여 이곳 크라치 웨스트 아이들에게 보냈고 지금 그 선물을 실은 배가 태평양을 건너 가나로 오고 있다.

사실 식수와 관련된 사업은 주민들 생명과 바로 직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업보다 더 긴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더러운 물을 마시고 온갖 질병에 감염이 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건강과 바로 연결되는 것은 기본이고, 아이들은 십리도 더 되는 먼 곳까지 물을 길으러 가기 위해 수업을 빠뜨려야 하는 경우도 잦다. 또한 특히 여성들 역시 물을 길으러 오가는 여정이 가뜩이나 힘든 가사노동을 더 힘들게만 하고 있다. 물을 길으러 가는 여러 행렬 중에 왜 성인 남자는 없고 여성들과 작은 체구의 아이들만 가득한 건지도 좀 더 두고 보아야할 일인 듯하다.

가나의 식수사업에 대해서 빠뜨리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질병이 있으니 바로 기니아 웜이라는 기생충이다. 1980년대만 해도 가나 내에서 이 기니아 웜에 감염된 주민들이 100만명이 넘었다 한다. 성충의 경우 1m도 더 넘는다는 이 기생충은 더러운 물을 통해 사람 몸 속에 들어가 점점 길이를 더해 결국 사람 살을 뚫고 밖으로 나온다 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끔찍할지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하다.

기니아 웜이 감염자의 몸에서 나오는 모습입니다.
▲ 기니아 웜 기니아 웜이 감염자의 몸에서 나오는 모습입니다.
ⓒ http://www.wvko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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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카터 전 미대통령이 가나를 방문했는데, 수도 아크라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마을에서 바로 이 기니아 웜에 감염된 아이를 만나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가나에서 대대적으로 기니아 웜 발본원색 사업에 돌입했는데 가나 전역에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는 우물 관정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카터의 업적은 실로 대단했다. 그와 그 동료의 노력 덕에 천억 원이 훨씬 넘는 돈이 우물을 관정하는 데 보태졌고, 가나에서만 한 해에 100만 명이 넘게 기니아 웜으로 고생했던 심각한 위험은 다행히 이제 상당부분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대규모 사업이 주로 가나 북부 지역에 집중되면서, 사업에서 소외된 북부 인접 지역이 여전히 안전하지 못한 식수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있으니 크라치 웨스트 지역이 그 대표적인 지역 중 하나이다.

기니아 웜은 이제 지구상에서 거의 박멸된 질병 중 하나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나를 비롯, 수단, 이디오피아, 나이제리아(자료에 따라 수단 및 가나 2개국만 거론되기도 함) 등 6개국에서는 여전히 기니아 웜 감염환자들이 발생하고 있다. 가나의 경우 한 해 평균 약 3천 건의 기니아 웜 환자들이 보고되고 있는데, 그 주요 발생지가 바로 이곳, 크라치 웨스트인 것이다. 

더러운 물을 마시고 걸릴만한 병이 기니아 웜같은 끔찍한 질병 말고도 실은 아주 많다. 크라치 웨스트 군 중심지라고 하는 케테크라치에서조차 하루에 차 몇 대 지나는 게 고작인 이 외딴 지역에서, 보고되지 않는 환자들의 사례는 또 얼마나 많을까 짐작해보면 우물사업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절박한 지원대상 사업 중 하나이다.  

우물은 관정도 중요하지만 관정 이후의 관리도 중요하다. 우물을 관정한 모든 마을에서 우물관리 전담모임을 만들어 마을별로 관리비 조로 300세디(30만원)를 자체적으로 모아 은행에 예치시켰다. 우물 관리까지 외부인의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는 법, 자체적으로 이렇게 모인 돈을 통해 우물 고장 시 부품도 교체하고 정기적으로 우물 검사도 실시하여 오래도록 우물이 튼튼하게 잘 작동할 수 있도록 마을 주민들이 노력하기로 결의했다.

깨끗한 물이 근처에 있어 아이들은 마음 놓고 학교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에게서 힘겨운 노동을 덜어주고, 새로운 정보교류의 장이 될 것입니다.
▲ 보모덴 마을의 우물 깨끗한 물이 근처에 있어 아이들은 마음 놓고 학교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에게서 힘겨운 노동을 덜어주고, 새로운 정보교류의 장이 될 것입니다.
ⓒ 차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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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오스라마네'마을과 '보모덴'마을 그리고 몇 개의 마을을 더 방문해서 마을 주민들도 만나고 우물펌프가 잘 작동되는지 둘러보았다. 깨끗한 물이 우물을 통해서 쏟아졌다. 아이들은 물을 길으러 가는 대신 학교로 갈 수 있고, 여성들은 무거운 물통을 들고 십리 밖을 나가는 대신 이제 우물가로 마실을 나와 이웃집 아주머니들과 옹기종기 모여 동네 이야기며아이들의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롭게 정겨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모든 주민들이 3분 거리 안에서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을 때까지, 우리 사업은 지속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가나 크라치웨스트 지역 우물 관정 사업에 큰 정성을 보여주신 안태복 님, 온해선 님, 이선준 님, 이재준 님, 경신숙 님, 허진호 님, 허유진 님, 허윤지 님, 정순이 님, 이경은 님, 이현래 님과 (주)텐바이텐 및 (주)무코타 직원분들 모두에게 지면을 빌어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태그:#가나, #우물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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