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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여행! 현대를 사는 누구나 목메는 주제입니다. 그리고 루틴한 생활 탓에 푸석푸석해지기 쉬운 마음에 촉촉한 윤기를 주기위해서라도 여행은 필수입니다. 그러나 팍팍한 현실에서 늘 오매불망 그리는 그 여행이 짝사랑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제게도 그런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혹은 며칠간 집을 떠나 있는 사정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습니다. 처와 상의해서 처의 월차를 모으거나 딸들의 방학과 휴일을 활용해서 저의 빈자리를 메워주도록 오래전부터 구걸에 가까운 사정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가족들에게 시간을 동냥할 수 있다는 것을 행운으로 여깁니다.

또한 그 시간을 시주받기가 불가능할 때라도 저 혼자 여행을 즐기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지난 화요일에도 서울에 꼭 나가야할 일이 있었습니다.

"27일 화요일 소소파티 드레스코드
보낸사람 : 소소커뮤니케이션디자인연구소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하지만 다음 주 화요일까지는 절대 아프지도, 바쁘지도 않으셔야 합니다. ^^

드디어 일주일 후, 오늘입니다.
2009. 10. 27. 화요일 저녁 8시.

뷔페는 8시부터 10시까지이고 술과 음료도 마음껏 드실 수 있습니다.
드레스코드는 블랙입니다. 타이에 어울릴 수 있는 색상의 셔츠만 입으셔야 합니다.
타이는 오시는 남성분들께 선물로 제공됩니다.
베스트 드레서 시상이 있습니다. 고가의 특별한 선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럼, 그 날 뵙겠습니다.
소소"

그날까지 '절대 아프지도, 바쁘지도 않으셔야 한다'는 e-invitation card와 함께 보내온 짧은 사연은 차라리 애교 섞인 협박이었습니다.

영국의 Architectural Association School of Architecture(이론보다 현장과 실기에 역점을 두는 소수 정예교육으로 명성 높은, 1847년에 설립된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사립대학으로 건축하는 사람들에겐 통상 AA라 불립니다)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들어와 지난 6년간 일에만 묻혀 지낸 인테리어디자이너이자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손솔잎의 소소커뮤니케이션디자인연구소(SOSO COMMUNICATION DESIGN LAB)가 이사해서 새로운 사무실에 온기를 불어넣는 오피스 워밍 파티(Office Warming Party)의 초대였습니다.

초대된 사람들의 바쁜 스케줄을 고려해서 부러 평일의 저녁시간을 초대시간으로 잡은 배려에도 불구하고 그 밤에도 초대시간을 맞출 수 없었습니다. 6시부터 있는 헤이리 솔마을의 주민행사때문이었습니다.

소원의 소원을 빌다

9시에 소엽선생님과 함께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짬짬이 헤이리 주변 들판을 헤매는 일이 호사로운 여행인 제게 서울까지 가는 일은 비교적 장거리여행에 속하는 일입니다.

자유로 노상에서 소엽선생님께 지난 10월 24일에 있었던 강원도 인제의 '2009 방태산 산신제'와 '산사음악회'에 다녀오신 여행이야기를 청했습니다. 그곳에서 1박2일 동안 있었던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 중에서도 손복길선생님에 대한 얘기가 저의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손선생님은 저와도 3년 전에 모티프원에서 상면한 이래 두어 차례 인사를 나누고 말을 섞은 분입니다.

이 분을 남들이 부르길 '석수石手'라고 하지만 정확하지 않은 지칭입니다. 석수는 돌을 깨어서 어떤 형상을 만드는 일이지만 손선생님은 돌을 쌓는 일이 전부입니다. 이 분이 돌을 쌓을 때 지키는 원칙이 두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석을 깨지 않고 그대로 쌓는다는 것과 돌을 옮길 때도 미리 돌을 세운 뒤 오랫동안 그 돌 아래를 터 삼았던 여러 미물들이 안전하게 옮겨갈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한다는 것입니다.

전국의 하천을 보수하는 일이나 건축현장의 축대나 담장을 쌓는 하루하루의 품을 제공하고  살아가는 손 선생님에게 시간이 돈일 수 있는 상황에서 온갖 미물을 배려하고 아무리 무생물이지만 돌을 깨어서 원 모양을 손상하는 대신 먼저 놓인 돌에 맞는 돌의 생김새를 찾아 조화를 이루는 정성이 감복이었습니다.

땅이 얼어서 돌 일을 할 수 없을 때는 방태산에 들어가 약초를 연구하며 겨울을 보냅니다. 이번 방태산 산신제에서 제단 앞에서 각자의 소원을 기원하는 순서가 있었답니다. 그날 밤 노변방담으로 낮에 서로가 무엇을 소원했는지를 말하게 되었답니다. 두루 아들의 대학 합격과 본인의 승진과 지병의 완쾌를 기원한 내용들이 주가 되는 고백들이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손선생님의 순서가 되었고 과묵한 그 분도 어쩔 수 없이 그 내용을 말해야했습니다.

"이번 산신제에서 다른 분들이 소원한 모든 내용들이 다 이루어질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최고의 자리는 남에게

한강에 비친 야경을 음미하며 텅빈 자유로를 달려서 서울로 입성하는 일도 제게 황홀한 야간여행이었습니다.

10시 30분, 소소 사무실에 들어서자 손솔잎실장의 사회로 파티의 마지막 순서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GS건설의 CTO(Chief Technology Officer, 최고기술경영자)인 이영남부사장과 현대국립미술관 2008 올해의 작가인 장연순교수님 등 참석자들이 '소소'와의 '일과 사랑'에 관한 소소한 일화를 공개하고 덕담을 덧붙였습니다.

소소커뮤니케이션디자인연구소의 Office Warming Party
 소소커뮤니케이션디자인연구소의 Office Warming Party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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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늦게 제 차례가 되었고 손솔잎실장이 제 소개를 했습니다.

"영국에서 귀국 후 일을 시작한 뒤 지난 6년 동안 단 하루의 저를 위한 휴가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박성호대표께 부탁해 하루를 승낙 받고 제가 처음 맞는 휴가를 보낼 한국 최고의 펜션을 찾아달라고 직원들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발견해낸 곳이 헤이리의 모티프원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머리를 비우는 휴식뿐만 아니라 이안수대표님을 얻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소소의 전 식구들과 함께하는 두 번째의 휴식도 그곳에서 가졌습니다."

손솔잎실장이 박희경연구원과 모티프원에서 함께한 6년만의 휴가
 손솔잎실장이 박희경연구원과 모티프원에서 함께한 6년만의 휴가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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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두 번째의 만남에서 이곳에 있을 수 있었던 사연을 덧붙였습니다.

"5척 단구의 손솔잎이 어떻게 우리나라 최고 호텔의 실내디자인을 요리하는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저는 두 번에 걸쳐 도합 10시간쯤 함께 술을 마셨고 '6년만의 첫 휴가'란 말속에 그 정답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실무경력도 한국에서의 기반도 없는 젊은 그가 클라이언트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열정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열정이 얼마나 큰 무기인지를 손실장을 통해서 실감하게 되었지요. 가난한 유학생으로서는 영국에서 한 번도 스스로 사서는 먹을 수 없었던 봄베이사파이어를 마시며 우리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습니다."

저는 사무실 구석구석을 살폈습니다. 장연순교수님의 소소로고작품을 입구에 설치하고 손실장은 자신의 방을 건물의 내력 기둥이 지나가는 가장 구석진 곳에 배치했습니다. 기둥에 가리고 침침한 복도 때문에 허드레를 숨기는 창고가 적격일 법한 그 공간을 세련된 작업공간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내력벽에 간접조명을 설치하고 복도는 벽장을 덧붙여 세련미와 실용성을 함께 추구했습니다.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는 내력벽을 없애거나 옮길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하는 지혜를 통해 그녀의 감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30평 남짓한 사무실의 인테리어에 사용된 대부분의 자재는 다른 공사후 조금씩 남아 팔 수도 없는 자투리를 기증받아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파티션된 공간마다 그 소재가 다른 이유입니다. 모든 일은 제약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것이 공간일 수도, 재료일 수도, 예산일 수도, 시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창의력을 가진 사람에게 그 제약들은 상상력의 방해물이 아니라 재미있는 도전거리이지요.

섬유예술가 장연순선생님의 소소로고 작품
 섬유예술가 장연순선생님의 소소로고 작품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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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솔잎실장은 큰 기둥과 좁은 통로, 구석진 위치 때문에 창고로나 쓰일 법한 곳을 직접 제작하거나 엄선한 조명과 적절한 서가와 책상의 배치로 코디한 자신의 작업 공간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손솔잎실장은 큰 기둥과 좁은 통로, 구석진 위치 때문에 창고로나 쓰일 법한 곳을 직접 제작하거나 엄선한 조명과 적절한 서가와 책상의 배치로 코디한 자신의 작업 공간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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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된 사람들은 돌아가고 이 파티를 위해 며칠 밤을 세우다시피한 소소의 식구들과 둘러않았습니다. 박성호대표가 연구원들을 격려하고 손실장은 한 가지 꿈을 얘기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과 더불어 열심히 한 과실果實로 사옥을 지을 수 있다면 51층을 지을 것입니다. 그리고 50층의 전망 좋은 방향으로 여러분들의 방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 방은 여러분의 방 옆 어디쯤이 되겠지요."

저는 51층의 용도가 궁금했습니다.

"손실장을 비롯한 소소의 식구들이 50층을 차지한다면 더욱더 먼 시야를 제공할 51층은 누가 사용하게 되나요?"

"바로 이안수선생님입니다. 이선생님같이 저희들의 열정이 식지 않도록 불을 지펴주신 분들을 고문으로 모시고 그분들의 방을 51층에 내드리고 싶습니다."

최고의 자리를 남에게 양보하는 소소의 겸손이 믿음직스러웠습니다.

자정이 넘은 시간, 모두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박희경연구원이 제게 봄베이사파이어 한 병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박대표가 묵직한 가방을 제게 쥐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가 왜 받아야하는지에 대해 손실장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초대된 모든 사람들에게 제가 디자인한 넥타이를 선물했습니다. 선생님은 양복이 단 한 벌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양복이 없는 분께 넥타이를 선물할 수는 없지요. 봄베이사파이어는 넥타이를 대신한 선물입니다. 그리고 드레스코드를 지키기 위해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오셨습니다. 찢어진 검은 고무신에, 3천원짜리 가죽모자도 출중한 조화입니다. 12인분, 이 LA갈비는 바로 베스트드레서상입니다. 양념은 시카고에서 온 최고의 세프chef인 박대표의 친구가 한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오시기전 모든 사람의 극찬을 받고 제일 먼저 동이 난 오늘밤 최고의 인기 파티메뉴였습니다."

쇼는 정교하게 보여지는 무대보다 경황없는 무대뒤가 더 흥미있듯, 파티는 파티보다 파티뒤의 뒷풀이가 더 흥미있는 법입니다.
 쇼는 정교하게 보여지는 무대보다 경황없는 무대뒤가 더 흥미있듯, 파티는 파티보다 파티뒤의 뒷풀이가 더 흥미있는 법입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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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모래와 같은 것

소엽선생님은 되돌아가는 길에 홍대근처에 새로 인도레스토랑을 개업한 인도인 친구인 소운Soun를 방문하고 싶어 했습니다. 몇 년 전 소엽선생님의 인도 여행시 카주라호Khajuraho에서 만난 소운은 4년 전 한국으로 왔고, 인도에서 만났던 다른 한국인과 인도전문음식점을 개업한 것입니다.

밤 1시의 홍대일대는 여전히 활기찬 대낮과 다름없었습니다. 마중 나와 있던 소운을 따라 그 레스토랑으로 갔습니다. 소운은 2년전 모티프원에 왔을 때와는 달리 한결 여유 있어진 모습이었습니다. '카주라호'라는 간판을 단 레스토랑은 인도분위기로 가득했습니다. 이미 영업이 끝난 레스토랑 안을 구석구석 안내받고 이곳에 주방장으로 와있는 카주라호의 라마다호텔과 현지의 명소인 나무레스토랑의 조리장이었던 깜레쉬Kamlesh와 다니Dhani도 자리에 함께했습니다.

한국속의 작은 인도, 홍대앞 다복길의 카주라호
 한국속의 작은 인도, 홍대앞 다복길의 카주라호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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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운아, 이 레스토랑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니 돈도 많이 벌겠다."
소엽선생님의 덕담에 소운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사실, 저는 인도에서 보다 돈을 많이 벌진 못해요. 인도에서 한국관광객만 안내해도 하루에 10만원에서 20만원은 벌수 있어요. 여기서는 그 반도 안 돼요. 저는 돈을 모래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에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을 찾으러왔어요. 그것은 경험이에요."

저는 '돈은 모래'라는 소운의 비유가 참 적절하다 느꼈습니다. 갖은 노력으로 돈을 한 움큼 쥐었다하더라도 손바닥을 펴면 흘러내리기 마련입니다. 결국은 갖은 구멍으로 흘러나갈 자신의 손바닥 넓이 보다 많은 돈을 얻기 위해 현재의 행복을 유보하는 삶을 사는 상황이 거개의 우리 삶이니까요.

소운의 요청으로 '오리지널 인도 커리가 정말 맛있다'며 주방으로 들어가는 깜레쉬와 다니를 겨우 불러 앉혔습니다. 소소에서 채워온 부른 배 때문에 인도전통차 '짜이'의 대접도 사양했습니다.

소운의 청으로 깜레쉬와 다니는 한국으로 왔습니다. 한국인에게 인도 여행 성수기는 1월과 2월입니다. 이때 카주라호의 유적지는 한국여행자들로 넘쳐나지요. 소운은 능숙한 한국말로 카주라호를 찾은 한국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소운의 청으로 깜레쉬와 다니는 한국으로 왔습니다. 한국인에게 인도 여행 성수기는 1월과 2월입니다. 이때 카주라호의 유적지는 한국여행자들로 넘쳐나지요. 소운은 능숙한 한국말로 카주라호를 찾은 한국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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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면 자신들의 방에 자고 가라는 요청을 뿌리치고 나오면서 저는 깜레쉬와 다니에게 '다음번 영업시간에 오면, 정말 맛난 치킨 쵸우민과 커리를 만들어줄 것과 한국어로 대화할 수 있도록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할 것'의 두 가지를 주문했습니다.

깜레쉬가 한국말로 답했습니다.
"쪼금……."
아마 깜레쉬가 하고 싶었지만 완성하지 못한 말은 '한국말 '조금' 할 수 있을 거예요. 열심히 공부할게요.'일 것입니다.

모티프원으로 돌아오자 새벽 4시였습니다. 하룻밤의 도깨비여행! 정원에서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트라이콜리 해모도 지난밤에 희미하게 밝혀진 서재의 불빛을 보고 제가 독서로 밤을 보낸 것으로 알 것입니다. 저는 책의 여행을 하는 대신 손복길의 방태산과 손솔잎의 51층 빌딩과 소운의 모래밭을 여행했습니다.

손복길선생님께 어떻게 박람강기博覽强記를 자랑 삼을 것이며 손솔잎실장 앞에서 어떻게 자강불식自强不息하지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운과 대화하고도 돈만 쫒는 젊은이가 있다면 자괴지심自愧之心으로 먼저 마음을 소지燒紙해야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과 홈페이지 www.motif1.co.kr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소소커뮤니케이션디자인연구소, #카주라호, #손솔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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